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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종말인가, 새로운 전도인가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현대인의 문제 중 하나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문제 중 하나는 예의 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점이다(<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16쪽)."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기독교의 전도를 보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만을 전파하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영혼 구원이라는 강한 신념 하나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전도의 모습은 전국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비기독교인보다 더 교양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영혼 구원의 강한 신념은 전쟁 중에 있는 나라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파하게 한다. 죽을 수도 있는 나라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다니,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봐야 할까? 기독교의 복음 전도의 모습은 이런 것뿐일까? 오늘날 사람들에게 불평과 불안을 일으키는 기독교 전도는 점차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예의 없는 한국교회
마틴 마티의 말처럼 한국교회의 전도 방식은 신념은 강하지만 예의는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를 걷다 보면 영락없이 볼 수 있는 모습은 노방 전도자가 예의 없이 전도하는 모습이다.
길거리 전도는 교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전도 방법이다. 길거리에서 찬양을 부르거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식의 전도 방법이 길거리 전도에 보편적인 모습이다. 서울의 중심지인 명동에 가 보자. 길거리 전도를 많이 볼 수 있다. 하나같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있다. 이들을 자세히 본다면 전도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확성기로 찬양을 부르거나 자신들의 구호를 외치고, 커다란 깃발과 팸플릿을 들고 전도를 한다. 또 어떤 이는 빨간 십자가를 들고 다니며, 또 어떤 이는 온몸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붙여 다니기까지 한다. 이들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과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전도를 한다. 사람들의 불평과 조롱에도 꿋꿋하게 전도를 한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정말 강한 사명으로 나온 듯하다. 좋은 의도로 나왔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때가 많다. 시끄러운 소리, 사람들에게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협박, 전단지들은 휴지통에 버려지는 게 일쑤다. 가만히 보면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에게 반감만 더하는 모습이다.
2007년도에는 한국 기독교의 예의 없는 모습에 분노를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아프간 피랍 사건'이다. 분당샘물교회에서 출발한 이들은 아프간이 전쟁 중임에도 불과하고 선교를 하러 들어갔다. 그들은 목숨을 복음 전도에 바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복음으로 아프간이 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탈레반에게 잡혀 피랍되고 만다. 피랍된 이들을 보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과 비난의 목소리를 동시에 냈다. 2명의 사망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사 귀환을 했지만, 국민들은 안도하는 모습보다는 비난의 눈초리로 그들을 맞아들인다. 전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으며 국가적 손실을 줬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국민들은 이들이 출발하기 전에 아프간 여행 자제 금지 표지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분노했다. 그리고 돌아오고 나서도 자중의 모습보다는 아프간 피랍 관련 간증 책을 출간했다는 것을 듣고 비난을 퍼부었다.
최근에 다시 한번 국민들의 원성을 샀던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이 있었다. 지난 2010년 10월에 '봉은사 땅 밟기'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찬양인도자학교' 소속이라고 밝힌 이들은 봉은사에 들어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동영상에는 "이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건 파괴될 것이다"고 말하며, 봉은사를 향해 "헛되고 헛되다, 우상은 무너질 것이다"며 불교를 폄하하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것으로 종교와 종교 간의 관계에 긴장감을 더 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타 종교까지 들어가 자신의 종교를 전했던 것일까?
2. 공격적 선교와 전도의 원리
한국 교회의 이러한 무례한 전도 방식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고, 또 한국교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의외로 이러한 공격적 전도 방식은 뿌리가 깊다. 알렌 크라이더(Alan Kreider)의 말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오늘날처럼 전도에 열심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는데, 이는 신자의 삶의 변화 때문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Alan Kreider, 21쪽).
초대교회의 이러한 선교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때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교회의 선교 전략은 대폭 수정되었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기독교 선교는 외적으로 기독교 세계를 팽창시키는 일로 변질되었다. 라민 산네가 말하듯이 확산의 선교였다(<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신선한 통찰>, Darrell L. Guder, 37쪽). 중세 초기에는 라틴 기독교 문화가 점차 팽창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선교의 임무를 기독교가 비기독교 세계로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제국주의다.
선교와 전도를 기독교 세계의 확장으로 보는 제국주의적 선교관은 18~19세기 대각성 운동 때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신광은 목사는 <메가처치 논박>에서 대각성 운동으로 '지상명령'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최고의 명령이라는 뜻을 가진 지상명령(至上命令)은, 대각성 운동 때 부흥사들이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의 명령 중 가장 중요한 명령은 전도다"고 말할 때 생겨났다. 그 뒤 세계 선교 운동가들은 이를 발전시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메가처치 논박>, 신광은, 66쪽). 그런데 부흥사들과 세계 선교 운동가들이 이해하는 전도와 선교는 결국 불신자를 개종시키는 것이요,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이요, 비기독교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전도와 선교관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주의적 기독교 세계의 확장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같은 제국주의적 선교를 한국교회의 토속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공로신학'이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교와 전도에 믿음과 한국의 토속적 신앙이 결합하여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낳고 만 것이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설교하는 한국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의 공로신학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한국교회의 강당에서는 구원은 믿음으로 하지만, 공로를 많이 쌓아야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는다는 식으로 이 둘을 조합하여 가르치고 있다('한국교회여,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자', <기독교 사상>, 김세윤 교수)."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는다는 설교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야기시킨다. 또 교회 성장을 위해 개신교 목사들은 샤머니즘적 축복론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다고 훌러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지적했다. "종교개혁자들이 설교와 신앙이 그리스도 곧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집중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많은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교회 성장과 부의 축복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교회에서 우리 민족의 무속 신앙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 심각한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한국교회여,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자', <기독교 사상>, 김세윤 교수)."
이러한 한국교회의 제국주의적 선교 및 전도 행위는 신광은 목사가 말하는 소위 메가 처치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전도와 선교는 기독교 세계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불러와 교회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기독교 세계의 확대며,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오늘도 전도인들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채 전도를 해 대고 있는 것이다.
3. 변화하고 있는 선교 개념
한국교회는 전 세계 어느 교회보다 전도와 선교에 열심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고 있다. 지금의 전도 방식과 선교의 모습은 지성인들에게는 잘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반감만 사고 있다. 그렇다면 전도와 선교를 하지 말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예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하고,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
최근 전도와 선교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추세다.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 선교가 아닌 교회 그 존재 자체가 선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내심받은 교회의 본질이 선교(missio dei)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근거로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냈으며,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러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본질상 선교적으로 부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교회는 보내는 자가 아닌, 보냄을 받는 자이다. 교회의 선교는 그 존재에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파송을 받고, 선교를 위해 세워지는 데 있다"고 말한다( <변화하고 있는 선교>, David Bosch, 553쪽).
이러한 선교의 변화를 주었던 인물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35년 동안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그는 인도 빈민촌에서 봤었던 희망을 기독교 국가라는 영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서구의 재복음화를 주장하며, 스스로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리면서 교회의 본질을 잃었다고 지적했다('교회론의 변천을 통해 본 선교적 교회론 이해', , 이현모).
새로운 선교의 중점은 교회 자체가 선교의 본질이며, 선교지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어 하나님의 선교를 하는 교회의 주된 목적은 영역 확대가 아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을 지시하고, 현현의 성탄절을 끊임없이 기념하면서 세상의 눈앞에 성자 하나님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변화하고 있는 선교>, David Bosch, 579쪽).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선교 목적은 무엇인가? 침례신학대학교의 이현모 교수는 보수적 교회가 회심, 개종, 교회 개척을 선교 목적으로 제시했으며, 그는 이를 축소주의라고 비판했다('교회론의 변천을 통해 본 선교적 교회론 이해', , 이현모). 또 데이비드 보쉬는 교회 개척이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변화하고 있는 선교>, David Bosch, 579쪽).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선교 목적일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성취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전파하는 것이 선교이며, 교회의 본질이다. 세상과 다른 질서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구원이며 자유함이다.
"복음이 단지 한순간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만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오히려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그분의 선교에 동참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교회론의 변천을 통해 본 선교적 교회론 이해', , 이현모)."
4. 새로운 선교의 적용
한국교회의 예의 없는 모습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보다는, 살만 부풀려 가는 모습이다. 오래전부터 나타난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버리고 살 수는 없을까?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전도와 선교에 힘과 열정을 다하지 않았다. 알렌 크라이더의 <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은 지금 현재의 전도와는 상이한 모습이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구별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 그리스도안의 자유와 올바른 삶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발견하게 해 주었다(<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Alan Kreider, 34쪽). 이것은 강압적인 전도도 아니고 공격적이지도 않다. 순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호기심인 것이다. '새로운 백성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주를 따르는 삶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데 자신들을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믿고 있었다(<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Alan Kreider, 38쪽). 초대교회의 모습에는 교회를 부풀리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주의적인 모습보다는 삶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뜻을 따라 500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했던 한 기독교회가 있다. 아나뱁티스트들이다. 이들은 제자도를 따르며 세상의 통치 질서를 거부하며 살았다.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 제국주의를 반대했으며, 자발적인 신앙을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신앙이란 '따름'이었다. 믿는다는 의미는 회개와 제자도를 동시에 나타낸 통합적인 의미였다. 이들에게 전도의 최고의 전략은 '삶의 변화'였다('아나뱁티스트에게 배우자 4', <뉴스앤조이>, 신광은). 예수의 삶에 참여함으로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참된 증거는 삶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여도, 비그리스도인에게 말로 전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삶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참된 증거이기 때문이다(<외길 영성>, David Augsberger, 221쪽).
초대교회와 아나뱁티스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동일한 모습이 있다. 그리스도의 삶이다. 예수님이 하셨듯이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브라이언 맥레런 목사는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따르지 않으면서 전도 명령을 수행해 봤자 백해무익하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길, 즉 하나님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삶의 길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주님이 행하신 대로 세상에서 종으로서 섬기며, 선을 행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뜻한다(<외길 영성>, David Augsberger, 229쪽)"고 말했다.
5. 결론
필자는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기사를 읽다가 마음에 찔리는 질문이 있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출세와 안일을 추구하면서 남들에게는 천국의 영생 복락을 얻으라고 설교했으며, 스스로도 구원받은 자다운 감사와 보답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으니 그 전도와 선교에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천국에 갈 수 없는 예수쟁이들', <뉴스앤조이>, 송강호)."
남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던 건 아닌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답하고 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길거리 전도, 해외 선교, 봉은사 땅 밟기 등 기독교의 무례한 모습들은 찾아보기 쉽다.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기에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 때도 많다. 거리마다 전도하는 모습들은 자신의 신념을 믿고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강요는 이질감만 더할 뿐이다.
이제 제국주의적인 옛 모습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을 때다. 존재 자체의 선교를 보여 주자. 교회가 전도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도를 몸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몸으로 사는 것, 아나뱁티스트가 말한 그리스도의 삶의 참여를 참된 증거로 삼아 전하자. 복음 전도는 사회에 꼭 필요하다.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John Stott, 118쪽). 분명 그러한 능력이 있다. 그렇게 '살 때' 말이다. "우리의 공동체를 통해 직접 보여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메시지는 신빙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46쪽)."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숨길 수 없다.…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