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eppa (외 2편)
김안 (김명인)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들판에는 머리만 남겨진 비둘기 창문에는 멍든 구멍들 오만과 부끄러움 죄의식과 편견 무능과 순수 게으름과 욕망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 추가된 약의 이름을 생각한다. 약의 개수만큼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귀에 넣고 전진시킨다, 전진, 희망과 삶의 전진. 나는 듣는다, 마지막 우편물에 적힌 주소지에서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 하얀 국수를 삶고 계란을 풀고,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고, 누군가 둥근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환해지는 뱃속,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릇, 끊긴 기타 줄처럼 뒤엉킨 국수, 깨진 거울, 선생님,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습니다만…… 듣는다, 변명을 시작하기 위한 음소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의 이름을. * 리스트(F. Liszt)의 초절 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 시인의 말 내가 젊을 적 쓰고자 했던 것들은 어떤 빈곤함의 형상, 때론 논리와 신랄한 야유, 잠자리 날개 같던 당신의 이마와 별 무리와 당신의 끝,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저 아이일 뿐이었을 때 실수로 듣게 되었던 방의 서걱임 우연한 바다 우연히 흔들리던 바다의 수상한 노래 그러나 내가 젊을 적 좋아했던 것은 노래나 시조차 될 수 없었던 마음들, 혹은 되레 그런 절대가 있다고 믿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향한, 결국에는 비어 있는 미로 그 속에서 홍매 빛깔 같던 돼지 속살이 타오르는 리듬에 부딪는 술잔 같은 것뿐이었으나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뒤룩뒤룩 늙었지 이리도 늙고 뚱뚱해져서야 말의 행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하여 손 내밀다니 겁도 의미도 없이 그저 남이 되려고 만났던 철없는 애인인 양 하지만 이 또한 사랑이고 삶이라고 해봤자 변명과 술수로 한없이 부끄러운 연옥일 뿐이라서 문학성이라는 뻔한 밀교일 뿐이라서 숭고 다리를 끌어본다 세워본다 다시 주저앉아 11월의 가득한 틈새들 사이로 쏟아지는 강철 햇살이 사람들의 발목을 자르는 풍경을 본다 나는 내게 멀리 있어서
아파트 한구석 자전거 보관소에서 나는 눅눅한 쇠 냄새 같은 녹거나 기화하는 썩는 계절이구나 몸은 이미 구석구석 시신이구나 낯선 시신을 눕히는 방식으로 나는 나를 멀찌감치 쓴다
당신은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나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군요 잠과 낮을 잃어버린 채 눈을 감는다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다니 눈을 뜬다 이렇게 어두워야만 하다니
이 믿음이 이 증오가 마음의 선한 쓸모가 몸속 돌이 아닌 돌이 되어 제 아무리 씻겨도 문질러도 둥근 백골은 아니라서
어머니, 뜯어진 옷을 고치는 마음으로 끊겨진 발목을 끼우시는 들판의 돌을 깨부수는 그 뒷모습 너머로 뒷모습을 버티는 가는 발목 사이로
기문비나무가 시커멓고 뾰족한 잎사귀를 움켜쥐고 둥글고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그늘 구석구석 눈부신 발자국들 찍혀 있다 ―시집 『Mazeppa』 2024.2 ------------------------------ 김안(김명인) / 1977년 서울 출생.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및 대학원 박사과정. 2004년 《현대시》 등단. 시집 『오빠생각』 『미제레레』 『아무는 밤』 『Mazepp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