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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29회
주영왕(周靈王) 23년 여름 5월, 거(莒)나라 여비공(黎比公)은 친히 임치(臨淄)로 와서 제장공(齊莊公)을 알현하였다. 장공은 크게 기뻐하면서 북쪽 성곽에서 연회를 열어 여비공을 대접하였다.
최저(崔杼)의 집도 북쪽 성곽 부근에 있었다. 최저는 장공을 사로잡아 끝장낼 작정을 하고, 감기에 걸려 일어날 수 없다는 거짓 핑계를 댔다. 모든 대부들이 연회에 참석했지만, 최저만 가지 않았다. 최저가 심복을 가수(賈豎)에게 보내 소식을 탐지하게 했는데, 가수가 심복을 통해 말을 전했다.
“주군은 연회가 끝나면, 상국(相國)의 병문안을 갈 것입니다.”
최저는 웃으며 말했다.
“주군이 어찌 내 병을 염려하겠는가? 병문안한다는 핑계로 염치없는 짓일 저지르려는 것뿐이다.”
최저는 아내 당강(棠姜)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이 무도한 혼군(昏君)을 제거할 것이오! 당신이 만약 내 계책을 따른다면 당신의 추행(醜行)을 덮어두고 당신의 아들을 후사(後嗣)로 삼겠소. 하지만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먼저 당신 母子부터 참수할 것이오.”
당강이 말했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합니다. 당신이 명을 내리면, 제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최저는 당무구(棠無咎)로 하여금 내실 좌우에 무사 백 명을 매복시키게 하고, 또 최성(崔成)·최강(崔疆)으로 하여금 무사들을 거느리고 대문 안에 매복하게 했으며, 동곽언(東郭偃)으로 하여금 무사들을 거느리고 대문 밖에 매복하게 하였다. 배정이 끝나자,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정하였다. 최저는 또 사람을 가수에게 보내 밀서를 전하게 하여, ‘주군이 오면 반드시 여차여차 하라.’고 하였다.
[제126회에 보면, 당무구는 당강이 처음에 당공(棠公)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고, 최성과 최강은 최저의 전처 아들들이다. 동곽언은 당강의 친정 오라버니이다. 당강이 최저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은 최명(崔明)이다. 최저는 동곽언과 당무구를 가신으로 임용했었다.]
한편, 제장공은 당강의 미색을 사랑하여 오매불망(寤寐不忘)했으나, 최저가 엄중하게 방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은 자나 깨나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날, 최저가 병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자, 장공은 이미 온 마음이 당강에게 가 있었다. 마침내 연회가 끝나자, 장공은 최저의 집으로 어가를 몰게 하였다. 문지기가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상국은 병이 중하여, 지금 막 약을 드시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장공이 말했다.
“어디에 누워 계시냐?”
“사랑채에 누워 계십니다.”
장공은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내당(內堂)으로 들어갔다. 그때 주작(州綽)·가거(賈舉)·공손오(公孫傲)·누인(僂堙) 네 장수가 따라가려 하자, 가수가 말했다.
“주군께서 왜 오셨는지 장군들도 아실 겁니다. 소란스럽게 들어가서 상국을 놀라게 하지 마시고,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주작 등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모두 대문 밖에서 대기했는데, 가거만은 나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말했다.
“한 사람은 남아 있어도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오.”
가거는 내당에 남아 있었다. 가수는 중문(中門)을 닫고 들어가고, 문지기는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장공이 내실로 들어가자, 당강이 곱게 화장을 하고 나와 영접하였다. 두 사람이 미처 말을 나누기도 전에, 시비(侍婢)가 와서 고하였다.
“상국께서 목이 마르다고 하시면서 꿀물을 찾으십시다.”
당강이 장공에게 말했다.
“첩이 꿀물을 갖다드리고 바로 오겠습니다.”
당강은 시비와 함께 옆문으로 총총히 걸어 나갔다. 장공은 난간에 기대어 기다렸는데, 당강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장공은 노래를 불렀다.
室之幽兮 그윽한 방이여
美所遊兮 미인이 노는 곳이로다!
室之邃兮 깊숙한 방이여
美所會兮 미인을 만나는 곳이로다!
不見美兮 미인이 보이지 않으니
憂心胡底兮 내 마음 우울하구나!
장공이 노래를 마치자, 복도에서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공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곳에 어찌 병사들이 있단 말인가?”
장공은 가수를 불렀는데, 응답이 없었다. 잠시 후, 좌우에서 무사들이 나타났다. 장공은 크게 놀라며 변란이 일어날 줄 짐작하고, 급히 뒷문으로 달려갔는데 뒷문은 잠겨 있었다. 장공은 본래 힘이 센 사람이라, 뒷문을 부수고 나가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때 당무구가 무사들을 이끌고 와서 누각을 포위하고 소리쳤다.
“상국의 명을 받들어, 저 음적(淫賊)을 붙잡아라!”
장공이 난간에 기대어 타일렀다.
“나는 너희들의 주군이다. 나를 내보내다오!”
당무구가 말했다.
“상국의 명이 있어,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상국은 어디 있느냐? 내가 맹세컨대 상국을 해치지 않겠다!”
“상국께서는 병이 위중하여 올 수 없습니다.”
“과인은 죄를 알고 있으니, 태묘(太廟)에 가서 자진(自盡)하게 해다오!”
“우리는 단지 간음한 자를 잡으러 왔을 뿐, 주군은 알지 못합니다. 주군이 이미 죄를 알고 있다면 여기서 자진하십시오. 괜히 도망치려다가 치욕을 당하지 마시고.”
장공은 어쩔 수 없이 누각의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화단으로 뛰어올라 담장을 넘어 가려고 했는데, 당무구가 쏜 화살이 날아와 왼쪽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담장에서 떨어지자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찔러 죽였다. 당무구는 종을 몇 번 울렸다.
그때는 황혼 무렵이었다. 가거는 중당(堂中)에 있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홀연 가수가 등불을 들고 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내실에 도적이 들어, 주군께서 장군을 부르십니다. 장군은 얼른 들어가 보십시오. 저는 주장군(州將軍) 등에게 알리겠습니다.”
가거가 말했다.
“등불은 나한테 주고 가시오.”
가수는 등불을 건네는 척하다가 일부러 땅에 떨어뜨렸다. 등불이 꺼지자, 가거는 검을 뽑아 들고 더듬거리며 중문(中門)으로 들어서다가 올가미에 걸려 넘어졌다. 그때 문 옆에 매복해 있던 최강이 뛰쳐나와 가거를 칼로 쳐서 죽였다.
주작 등은 대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곽언이 나와서 그들을 행랑채로 인도하여 술과 고기를 대접하였다. 동곽언은 그들에게 검을 풀어놓고 편하게 마시라고 권하면서, 종자들에게도 모두 술을 권했다.
홀연 집안에서 종소리가 들리자, 동곽언이 말했다.
“주군께서 술을 드시는 것입니다.”
주작이 말했다.
“상국께서 싫어하지 않겠소?”
동곽언이 말했다.
“상국께서는 병이 위중하신데, 무엇을 싫어하겠습니까?”
잠시 후 또 종이 울리자, 동곽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들어가 살펴봐야겠습니다.”
동곽언이 방 밖으로 나가자, 무사들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주작 등이 급히 무기를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동곽언이 사람들을 시켜 훔쳐내 간 뒤였다. 주작은 크게 노하여 대문 앞에 놓여 있던 수레를 탈 때 디디는 섬돌을 번쩍 들어 던졌다. 하지만 날아간 섬돌은 달려가던 누인에게 잘못 맞아, 누인은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공손오는 말을 매어 두는 기둥을 뽑아 들고 휘둘러, 다친 무사들이 많았다. 무사들은 횃불을 들고 공손오를 공격하여, 공손오는 머리털과 수염이 다 타버렸다.
그때 중문이 활짝 열리면서 최성과 최강이 무사들을 이끌고 안에서 뛰쳐나왔다. 공손오는 맨손으로 최성을 붙잡아 팔을 부러뜨렸다. 그때 최강이 창으로 공손오를 찔러 죽이고, 누인도 죽였다. 주작은 무사들의 창을 빼앗아 다시 싸웠다. 그때 동곽언이 소리쳤다.
“무도한 혼군은 간음하다가 이미 죽음을 당했소! 장군들은 그 일과 상관없는데, 어찌하여 살아서 새 주군을 섬길 생각을 하지 않소?”
주작은 창을 내던지고 말했다.
“나는 齊나라로 망명해 온 사람인데, 齊侯에게 지기(知己)의 은혜를 입었다. 오늘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도리어 누인만 해쳤으니, 하늘의 뜻인가 보다! 내 마땅히 이 한 목숨을 바쳐 齊侯의 은총에 보답하겠다! 어찌 구차하게 살아서 齊나라와 晉나라 양국의 비웃음을 사겠는가?”
주작은 돌담장에 머리를 서너 번 찧었다. 돌도 깨지고 주작의 머리도 깨져 죽었다. 병사(邴師)는 장공의 죽음을 듣고 조문(朝門) 밖에서 자결하였고, 구봉(封具)은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탁보(鐸父)와 양윤(襄尹)은 서로 약속하여 장공의 시신을 찾아가 곡을 하려고 했는데, 도중에 가거 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자결하였다.
[제125회에, 제장공이 용작(勇爵) 계급을 신설하여, 식작·곽최·가거·병사·공손오·봉구·탁보·양윤·누인을 임명했었는데, 식작과 곽최를 제외한 7명이 이제 모두 죽었다. 제128회에, 식작과 곽최는 난영을 따라 晉나라로 갔다가, 난영이 패전하자 식작은 위나라로 달아나고 곽최는 秦나라로 달아났다. 제125회에 주작과 형괴는 난영을 따라 제나라로 갔었는데, 제128회에 형괴는 제장공이 晉나라를 침공할 때 따라갔다가 공산 아래에서 노숙하던 중 독사에게 물려 죽었고, 주작은 지금 죽었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似虎如龍勇絕倫 범 같고 용 같은 절륜한 용장(勇將)들이었는데
因懷君寵命輕塵 주군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먼지처럼 버렸도다.
私恩只許私恩報 사사로운 은혜를 단지 사사로이 갚을 뿐이었으니
殉難何曾有大臣 난(難)에 임하여 순사(殉死)한 대신들은 없었도다.
그때 왕하(王何)가 노포계(盧蒲癸)에게 함께 자결하자고 말하자, 노포계가 말했다.
[제126회에, 제장공은 주작과 형괴를 영입했을 때 용작(勇爵)을 용작(龍爵)과 호작(虎爵)으로 나누어, 호작은 식작과 곽최를 우두머리로 삼고 가거 등 7명을 예전대로 두고, 주작과 형괴를 용작의 우두머리로 삼고 제나라 사람 노포계와 왕하를 선발하여 그 아래에 배치했었다.]
“그건 무익(無益)한 일이오. 차라리 일단 달아났다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다행히 한 사람이라도 다시 나라를 되찾으면, 그땐 서로 끌어주기로 합시다.”
왕하가 말했다.
“그럼 맹세합시다!”
맹세를 한 다음, 왕하는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노포계는 떠나기에 앞서 아우 노포별(盧蒲嫳)에게 말했다.
“주군이 용작이라는 계급을 만든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주군과 함께 죽는다고 해서 주군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는 떠날 테니, 너는 최저와 경봉(慶封)을 잘 섬겨서 내가 귀국할 수 있도록 해줘라. 그러면 내가 주군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주군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허망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노포별이 승낙하자, 노포계는 晉나라로 달아났다. 노포별이 경봉을 잘 섬기자, 경봉은 그를 가신으로 삼았다. 신선우(申鮮虞)는 楚나라로 달아났는데, 후에 楚나라에서 우윤(右尹)이 되었다. 그때 齊나라의 대부들은 최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모두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제128회에, 제장공이 晉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신선우는 부장으로 참전했었다.]
오직 안영(晏嬰)만 최저의 집으로 찾아가 장공의 시신 앞에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한 후에 돌아갔다.
[제124회에 안영이 처음 등장했는데, 제장공으로 하여금 晉나라와 동맹을 맺게 했었다.]
당무구가 말했다.
“반드시 안영을 죽여야만 사람들의 비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최저가 말했다.
“그는 어질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그를 죽이면 인심을 잃게 될 것이다.”
안영은 진수무(陳須無)를 찾아가 말했다.
“어찌하여 신군을 세울 의논을 하지 않습니까?”
진수무가 말했다.
“세신(世臣)으로는 고지(高止)와 국하(國夏)가 있고, 권력은 최저와 경봉에게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영이 물러가자, 진수무가 말했다.
“역적들이 조정에 있으니,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
진수무는 宋나라로 망명하였다.
[논어에 이런 대화가 있다.
자장(子張)이 물었다. “최저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陳文子; 진수무)는 말 40필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부 최저와 같다’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또 한 나라에 가서도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부 최저와 같다’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청렴하도다!”
“仁者입니까?”
“알 수 없다. 어찌 仁者라 할 수 있겠느냐?”
주자(朱子)가 이렇게 해석하였다.
“진문자는 자신을 결백하게 하여 난(亂)을 떠났으므로 청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 마음이 과연 의리(義理)의 당연함을 깨달아 기꺼이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해(利害)의 사심(私心)에서 부득이하여 오히려 원망과 후회를 면하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 그 청렴은 인정하셨으나 그 仁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제38회에, 진여공(陳厲公)의 아들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망명했는데, 제환공이 그를 공정(工正)으로 임명하고 전(田)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때부터 공자 완은 진완(陳完) 또는 전완(田完)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훗날 제나라를 강씨(姜氏)로부터 찬탈한 전씨(田氏)의 시조가 되었다. 진수무는 진완의 증손자이다.]
안영은 다시 고지(高止)와 국하(國夏)를 찾아갔는데, 두 사람도 이렇게 말했다.
“최저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고 경봉도 있으니,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영은 탄식하며 돌아갔다.
한편, 경봉은 아들 경사(慶舍)로 하여금 장공의 여당(餘黨)을 수색하여 모조리 죽이거나 쫓아내게 하였다. 경봉은 수레를 타고 나가 최저를 맞이하여 함께 조정으로 들어갔다. 고지와 국하를 불러 신군 세울 일을 의논하자, 고지와 국하는 최저와 경봉에게 미루었다. 경봉이 또 최저에게 미루자, 최저가 말했다.
“영공(靈公)의 아들 저구(杵臼)가 장성했으니, 그를 옹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게다가 그 모친은 魯나라 대부 숙손교여(叔孫僑如)의 딸이니, 魯나라와 우호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제123회에 제영공에게는 광(光)·아(牙)·저구 세 아들이 있었는데, 제124회에 광이 아를 죽이고 즉위하였으니 그가 제장공이다. 이제 제장공이 죽었으니, 영공의 아들은 저구만 남았다. 제111회에, 노나라의 정권은 계손행보(季孫行父)·숙손교여·중손멸(仲孫蔑) 세 사람이 쥐고 있었다. 그 후에도 노나라는 군주의 힘이 약하고 계손씨·숙손씨·맹손씨(중손씨) 삼가(三家)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삼가의 내력은 제44회에 나왔었다.]
백관은 그저 ‘예’ ‘예’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공자 저구를 군위에 세우니, 그가 제경공(齊景公)이다. 그때 경공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최저는 스스로 우상(右相)이 되고, 경봉을 좌상(左相)으로 삼았다.
최저는 백관을 태공(太公)의 사당 앞에 모아 놓고 희생을 잡아 삽혈하면서 맹세하였다.
[‘태공’은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姜太公)이다.]
“최저·경봉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자는, 저 태양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경봉이 뒤를 이어 같은 맹세를 했고, 고지와 국하도 역시 같은 맹세를 했다. 백관도 순서대로 같은 맹세를 하다가, 안영의 차례가 되었다. 안영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사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 안영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는 자가 있다면, 상제(上帝)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최저와 경봉의 안색이 변하자, 고지와 국하가 말했다.
“두 분의 오늘 거사가 바로 주군에게 충성하고 사직을 이롭게 하는 일입니다.”
최저와 경봉은 비로소 기뻐하였다.
그때 거나라 여비공은 아직 제나라에 있었다. 최저와 경봉은 경공으로 하여금 여비공과 동맹을 맺게 하였다. 여비공은 거나라로 돌아갔다.
최저는 당무구에 명하여, 주작과 가거 등의 시신을 거두어 장공(莊公)의 시신과 함께 북쪽 성곽 부근에 매장하되 격식을 간소하게 하고 병기(兵器)를 함께 묻지 못하게 하면서 말했다.
“지하에서도 저들이 용맹을 자랑할까 두렵다.”
최저는 태사(太史) 백(伯)에게 장공이 학질(瘧疾)로 죽었다고 기록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태사 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죽간(竹簡)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여름 5월 을해일(乙亥日)에 최저가 군주 광(光)을 시해하였다.
최저는 그걸 보고 크게 노하여, 태사 백을 죽였다. 태사 백에게는 중(仲)·숙(叔)·계(季) 세 아우가 있었는데 모두 사관(士官)이었다.
[제43회에도 설명했듯이, 원래 伯·仲·叔·季는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중도 백과 똑같이 기록하자, 최저는 중도 죽였다. 숙도 똑같이 기록하자, 최저는 숙도 죽였다. 계도 똑같이 기록하자, 최저는 죽간을 쥐고 계에게 말했다.
“너의 세 형이 모두 죽었는데, 너는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만약 다시 고쳐 쓴다면, 너를 살려 주겠다.”
계가 대답하였다.
“사실을 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사관의 직무입니다. 직무를 저버리고 산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합니다. 예전에 조천(趙穿)이 진영공(晉靈公)을 시해했을 때, 태사 동호(董狐)는 조돈(趙盾)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역적을 벌하지 않았다 하여, ‘조돈이 그 주군 이고(夷皋)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래도 조돈은 동호를 죽이지 않았으니, 사관의 임무를 저버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기록하지 않더라도, 천하에는 반드시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설혹 기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국의 추행(醜行)을 덮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식자(識者)들의 비웃음만 살 것입니다. 저는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니, 상국께서 마음대로 처분하십시오.”
[‘동호직필(董狐直筆)’은 제101회에 있었다.]
최저는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사직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거사를 한 것이다. 비록 사실대로 기록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것이다.”
최저는 죽간을 계에게 돌려주었다. 계가 죽간을 가지고 사관(史館)으로 돌아가다가 사관으로 오는 남사씨(南史氏)를 만났다. 계가 남사씨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시오?”
남사씨가 말했다.
“그대 형제가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 5월 을해일의 사건이 묻혀 버릴까 염려하여 기록하러 왔소.”
계가 죽간을 보여주자, 남사씨는 돌아갔다.
염옹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朝綱紐解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니
亂臣接跡 난신(亂臣)이 연이어 일어났도다.
斧鉞不加 부월(斧鉞)로 벌하지는 못했지만
誅之以筆 붓으로 성토했노라.
不畏身死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 않고
而畏溺職 사명을 저버릴까 두려워하였도다.
南史同心 남사씨도 같은 마음이었으니
有遂無格 나아감은 있되 물러섬이 없었더라.
皎日青天 청천(靑天)의 밝은 해가
奸雄奪魄 간웅(奸雄)의 혼백을 빼앗도다.
彼哉諛語 아첨이나 일삼는 자들아
羞此史冊 이 사서에 부끄럽지 않느냐?
최저는 태사의 직필(直筆)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 가수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렸다.
그해 같은 5월에, 진평공(晉平公)은 수세(水勢)가 물러가자 다시 제후들을 이의(夷儀)에 소집하여 齊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제128회에, 진평공이 宋·魯·衛·鄭 등 각국 제후들과 이의에서 회맹하여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큰비가 내려 황하가 범람하는 바람에 중지했었다.]
최저는 좌상 경봉을 晉나라 군영으로 보내 고하게 하였다.
“齊나라 신하들은 상국(上國)의 정벌로 인하여 사직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미 상국을 대신하여 혼군을 죽였습니다. 신군 저구는 노희(魯姬) 소생인데, 다시 상국을 섬겨 예전의 우호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빼앗은 조가(朝歌) 땅을 상국에 돌려드리고, 약간의 종기(宗器)와 악기(樂器)를 바칩니다.”
[제128회에, 제장공은 晉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조가를 함락했었다. ‘종기(宗器)’는 종묘의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이다.]
경봉은 다른 제후들에게도 뇌물을 주었다. 진평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호를 맺고 회군하였으며, 다른 제후들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晉나라와 齊나라는 다시 화합하였다.
그때 衛나라에 있던 식작(殖綽)은 주작과 형괴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齊나라로 돌아갔다. 齊나라에 망명해 있던 위헌공(衛獻公) 간(衎)은 평소에 식작의 용맹함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공손 정(丁)에게 많은 예물을 주어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식작은 위헌공을 섬기게 되었다.
[제128회에, 난악(欒樂)이 晉軍과 싸우다 전사하자 곽최는 秦나라로 달아나고 식작은 위나라로 달아났었다. 제122회에, 위헌공이 아첨배를 좋아하고 사냥과 음악만 즐기다가 손림보와 영식에 의해 축출되고 공자 표(剽; 위상공)가 즉위하였으며, 위헌공은 궁술 스승인 공손 정(丁)과 동복아우 공자 전(鱄)과 함께 제나라로 망명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