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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제130회
그해 吳王 제번(諸樊)이 楚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소(巢) 땅을 지나다가 그 성문을 공격했는데, 소(巢)의 장수 우신(牛臣)이 얕은 성벽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활을 쏘았다. 제번은 화살을 맞고 죽었다. 吳나라 신하들이 선왕 수몽(壽夢)의 유언을 지켜, 제번의 아우 여제(餘祭)를 왕위에 세웠다.
[제121회에, 수몽은 4형제 중 가장 현명한 막내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아우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유언했었다.]
여제가 말했다.
“형님이 전사한 것은 선왕께서 차례대로 아우에게 왕위를 전하라는 유언 때문이었소.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빨리 전하기 위해 목숨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오.”
여제는 밤마다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좌우에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장수(長壽)를 원하는데, 왕께서는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니, 그건 인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여제가 말했다.
“옛적에 선왕 태왕(太王)께서는 장자를 폐하고 막내에게 왕위를 전했기 때문에 결국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었소. 이제 우리 형제가 4명인데,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모두 제 명대로 다 산다면, 계찰(季札)은 늙어버릴 것이오. 그래서 나는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오.”
[주(周)나라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태백(泰伯)·중옹(仲雍)·계력(季歷) 세 아들이 있었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聖德)이 있었다. 태왕은 군위를 계력에게 전하여 창에게 이르게 하고자 하였다. 태백은 그것을 알고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계력을 거쳐 창이 즉위하여 천하의 삼분지이를 차지하였으니, 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차지하였다. 태백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중옹이 뒤를 이어 오나라를 개창했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태백을 시조로 받들었다. 이렇게 형들이 모두 빨리 죽기를 바랐다면, 계찰이 애초에 왕위를 사양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 衛나라 대부 손림보(孫林父)와 영식(寧殖)은 위헌공(衛獻公)을 축출하고 공자 표(剽)를 군위에 세웠었는데 그가 위상공(衛殤公)이다.
[손림보가 위헌공을 축출한 일은 제122회~제123회에 있었다.]
그 후에 영식은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 영희(寧喜)를 불러 말했다.
“우리 영씨(寧氏)는 무공(武公)과 장공(莊公) 이래로 대대로 나라에 충성을 다해 왔다. 구군(舊君)을 축출한 일은 손림보가 한 것이지, 내 뜻이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손림보와 내가 모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밝히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제 죽어 지하에 가면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너는 구군을 복위시킴으로써 내 허물을 덮어다오. 그래야만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너의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영희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식이 세상을 떠나자, 영희가 뒤를 이어 좌상이 되었다. 그때부터 영희는 구군을 복위시킬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위상공이 몇 번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했을 뿐 국내에서는 아무런 일이 없었고, 상경 손림보도 헌공이 자신을 원수로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빈틈이 없었다.
주영왕(周靈王) 24년, 위헌공은 이의(夷儀)를 기습하여 점거하고, 공손 정(丁)을 몰래 도성인 제구성(帝邱城)으로 잠입시켜 영희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대가 부친의 뜻에 반(反)하여 과인을 복위시켜 준다면, 衛나라의 국정을 모두 그대에게 맡기고 과인은 다만 제사만 받들겠소.”
영희는 그렇지 않아도 부친의 유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국정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 생각했다.
“衛侯가 일단 복위하기 위해서 달콤한 말로 나를 속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복위하고 나서 후회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공자 전(鱄)은 어질고 신의가 있으니, 만약 그가 보증한다면 훗날 약속을 어기지 못할 것이다.”
영희는 밀서를 써서 공손 정에게 주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므로 신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자선(子鮮; 공자 전)은 衛나라 사람들이 신뢰하는 분이니, 그분이 와주시면 함께 상의하고자 합니다.
밀서를 본 헌공이 공자 전에게 말했다.
“과인의 복위는 전적으로 영희에게 달려 있으니, 아우는 나를 위해 가주게.”
공자 전은 입으로는 응답했지만, 전혀 갈 뜻이 없었다. 헌공이 재차 재촉하자, 공자 전이 말했다.
“천하에 국정을 맡지 않는 군주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국정을 영희에게 맡긴다고 하셨으니, 훗날 필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영희에게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이니, 저는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헌공이 말했다.
“과인이 지금 망명하여 한쪽 귀퉁이에 숨어 있는 처지이니, 국정이 있을 리 없네. 만약 조상들의 제사만이라도 자손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과인은 그로써 족하네. 어찌 식언(食言)을 하여 아우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주군의 뜻이 결정되었다면, 제가 어찌 감히 일을 피함으로써 주군의 큰 공을 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전은 제구성으로 몰래 들어가 영희를 만나, 헌공의 언약을 전하였다. 영희가 말했다.
“자선께서 그 언약을 보증해 주신다면, 제가 어찌 그 일을 맡지 않겠습니까!”
공자 전이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였다.
“전(鱄)이 이 언약을 어긴다면, 衛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영희가 말했다.
“자선의 맹세는 태산보다 중합니다.”
공자 전은 돌아가 헌공에게 복명하였다.
영희는 선친 영식의 유명(遺命)을 거원(蘧瑗)에게 고하였다. 거원은 귀를 막고 달아나며 말했다.
“나는 주군이 축출된 일도 들은 바가 없는데, 어찌 또 주군이 복위하는 일을 들을 수 있겠소?”
거원은 衛나라를 떠나 魯나라로 가버렸다.
[제122회에, 손림보가 거원에게 위헌공을 축출하려는 거사에 참여하라고 권했는데, 그때에도 거원은 노나라로 떠났었다.]
영희는 다시 대부 석악(石惡)과 북궁유(北宮遺)를 찾아갔는데, 두 사람은 모두 찬성하였다. 영희가 또 우재(右宰) 곡(穀)을 찾아가 얘기하자, 곡이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지금 주군이 즉위한 지 12년이 되었는데, 덕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구군을 복위시키려면 주군을 폐해야 하는데, 그러면 좌상의 父子는 2대에 걸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에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영희가 말했다.
“나는 선친의 유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제가 구군을 한번 만나 뵙고, 예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상의하시지요.”
“좋소.”
우재 곡은 몰래 이의로 가서 헌공을 찾아갔다. 헌공은 그때 발을 씻고 있다가, 곡이 왔다는 말을 듣고 신발도 미처 신지 않고 맨발로 뛰어 나왔다. 헌공은 곡을 보고 만면에 기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자제(子第)가 좌상의 말을 듣고 왔다면, 필시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이 오.”
곡이 대답했다.
“신은 주군을 뵙기 위해 왔을 뿐, 좌상은 모르는 일입니다.”
“자제는 과인을 위하여 좌상에게 가서, 속히 과인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라고 말해 주시오. 좌상이 과인을 복위시키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을지라도, 衛나라의 국정을 도맡는 일에는 관심이 있지 않겠소?”
“군주가 되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국정을 맡는 것인데, 국정을 버리고서 무엇 때문에 군주가 되려 하십니까?”
“그렇지 않소. 소위 군주라는 것은 높은 칭호를 받고 영광스런 명예를 누리는 것이오.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화려한 궁궐에 살고,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소. 부고(府庫)는 가득 차 있고, 명을 받드는 사령(使令)들이 앞에 가득 대기하고 있소. 안으로 들어가면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떠받들고, 밖에 나가면 사냥하는 즐거움이 있소. 그런데 하필이면 국정을 돌보느라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소?”
우재 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우재 곡은 공자 전을 만나, 헌공이 한 말을 전했다. 공자 전이 말했다.
“주군께서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하면서 고생이 너무 심해 즐거움을 갈망하다 보니,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군주는 대신들을 예로써 공경하고,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해야합니다. 재물을 절약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하며, 백성을 구휼하면서 바르게 부려야 합니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관용해야 하며, 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 후에 명예를 누리고 높은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군도 이런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재 곡이 돌아가 영희에게 말했다.
“제가 구군의 말을 들어보니, 분토(糞土)일 뿐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분토(糞土)’는 썩은 흙으로, 똥이나 거름, 쓰레기 등 아주 하찮은 것을 뜻한다.]
영희가 말했다.
“자전(子鮮)은 만나보았습니까?”
“자전의 말은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하지만 구군은 그걸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자전을 믿습니다. 선친의 유명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구군이 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거사를 해야겠다면,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때 손림보는 연로하여, 서장자(庶長子) 손괴(孫蒯)와 함께 자신의 식읍인 척읍(戚邑)에 살면서 두 아들 손가(孫嘉)와 손양(孫襄)을 조정에 남겨놓았다.
주영왕(周靈王) 25년 봄 2월, 손가는 위상공(衛殤公)의 명을 받들어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고, 손양이 도성을 지키고 있었다.
위헌공은 또 공손 정을 영희에게 보내, 거사를 재촉하였다. 우재 곡이 영희에게 말했다.
“좌상께서 거사하시려면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손림보와 손가가 없으니, 손양을 잡을 수 있습니다. 손양만 잡으면, 자숙(子叔; 위상공)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희가 말했다.
“우재의 말이 내 뜻과 합치됩니다.”
영희는 은밀히 가병들을 모았다.
우재 곡은 공손 정과 함께 가병들을 거느리고 손양을 잡으러 갔다. 손씨의 저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공궁(公宮)에 버금갔다. 담장이 견고하고 두터웠으며, 가병 천 명이 지키고 있었다. 옹서(雍鉏)와 저대(褚帶)라는 두 장수가 가병들을 거느리고 번갈아 가며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그날은 저대가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우재 곡이 가병들을 거느리고 당도하자, 저대가 대문을 닫고 누각에 올라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우재 곡이 말했다.
“이 집 주인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소.”
저대가 말했다.
“일을 상의하러 왔다면서, 가병들은 왜 거느리고 왔습니까?”
저대가 활을 쏘려고 하자, 곡은 급히 물러나 가병들에게 대문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손양이 친히 누각에 올라와 독려하였다. 저대는 활 잘 쏘는 자들을 늘어세우고 교대로 누각에 접근하는 적들을 쏘게 하였다. 영희의 가병들이 많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옹서도 저택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접응하러 왔다. 양군은 혼전을 벌여, 상호간에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우재 곡은 승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가병들을 이끌고 퇴각하였다.
손양은 대문을 열고 친히 말을 타고 추격하여, 긴 갈고리로 우재 곡이 타고 있는 병거를 걸어 당겼다. 그러자 곡이 소리쳤다.
“공손은 빨리 활을 쏘시오!”
공손 정은 손양을 알아보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양의 가슴에 적중하였다. 그때 옹서와 저대가 달려와 손양을 구하여 돌아갔다.
[공손 정은 위헌공의 궁술 스승이었다.]
호증(胡曾)선생이 시를 읊었다.
孫氏無成寧氏昌 손씨는 쇠락하고 영씨는 번성케 하고자
天教一矢中孫襄 하늘이 화살 한 대가 손양을 맞추게 하였네.
安排兔窟千年富 토끼굴을 마련하여 천년의 부(富)를 쌓아 놨는데
誰料寒灰發火光 차가운 잿더미에서 불이 다시 일어날 줄 누가 알았으랴!
[제122회에, 손림보가 부고의 재물과 금은보화를 자신의 식읍인 척읍으로 옮겨 갔었다.]
우재 곡이 돌아가 영희에게 말했다.
“손양의 집은 공격하기가 어렵습니다. 공손의 신전(神箭)이 손양을 맞히지 못했다면, 추격병들이 여기까지 쫓아왔을 것입니다.”
영희가 말했다.
“1차 공격이 실패했으니, 2차 공격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화살을 맞았으니, 군심(軍心)이 필시 혼란해졌을 것입니다. 오늘 밤 내가 친히 공격하러 가겠습니다.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도망쳐서 화를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손씨는 이미 양립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병거와 무기를 정돈하고, 가족을 먼저 교외로 내보내 만약 패하게 되면 탈출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손씨 집으로 보내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황혼 무렵, 정탐하러 갔던 자가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손씨 부중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에 출입하는 자들이 매우 다급해 하고 있습니다.”
영희가 말했다.
“손양이 중상을 입고 죽은 것이 틀림없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북궁유가 와서 말했다.
“손양이 죽었습니다. 집에 주인에 없으니, 빨리 공격하십시오.”
그때는 이미 자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영희는 갑옷을 입고 북궁유, 우재 곡, 공손 정 등과 함께 가병을 모두 일으켜 다시 손씨 부중으로 쳐들어갔다. 옹서와 저대는 손양의 시신 앞에서 곡을 하고 있다가, 영씨의 가병이 다시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황급히 갑옷을 입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영씨의 가병들이 대문을 깨뜨리고 돌입한 후였다.
옹서와 저대는 급히 중문(中門)을 닫아걸었지만, 이미 손씨의 가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후여서 중문을 지킬 자가 없었다. 중문도 깨뜨려지자, 옹서는 뒷담을 넘어 도망쳐 척읍으로 달아났다. 저대는 난군 속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아왔을 때에는, 영희가 이미 손양의 가속들을 몰살한 후였다. 영희는 손양의 수급을 잘라서 들고 공궁으로 가서, 위상공을 알현하고 아뢰었다.
“손씨가 국정을 오랫동안 전횡하여 반역할 뜻을 품었기에, 제가 병력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고 손양의 수급을 가져왔습니다.”
상공이 말했다.
“손씨가 과연 모반할 뜻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과인에게 알리지 않았소? 그대는 이미 과인이 안중에 없으면서, 또 뭣 때문에 과인을 찾아왔소?”
영희가 일어나 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주군은 손씨가 옹립했지, 선군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백관과 백성은 모두 구군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자리에서 물러나 요순(堯舜)이 선양한 것과 같은 덕을 보이십시오.”
상공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함부로 세신(世臣)을 죽이고 군주의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너야말로 진정 반역자가 아니냐! 과인이 남면하여 군주가 된 지 이미 13년이 지났다. 차라리 죽음을 당할지언정 치욕을 당할 수는 없다!”
상공이 창을 들어 영희를 찌르려고 하자, 영희는 달아나 궁문을 빠져나왔다. 상공이 영희를 쫓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창검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는데 영씨의 가병들이 궁 밖에 가득 포진해 있었다. 상공은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때 영희가 소리치며 손짓을 하자, 가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상공을 붙잡았다.
세자 각(角)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검을 들고 부군을 구하러 달려왔지만 공손 정의 창에 찔려 죽었다. 영희는 명을 내려, 상공을 태묘에 감금하게 하고 강제로 독약을 먹여 죽이게 하였다. 때는 주영왕(周靈王) 25년 봄 2월 신묘일(辛卯日)이었다.
영희는 교외로 내보냈던 가족을 다시 부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조당에 백관을 소집하여 구군을 다시 옹립할 일을 의논하였다. 백관이 모두 당도했는데, 태숙(太叔) 의(儀)만 병을 핑계대로 오지 않았다. 그는 위성공(衛成公)의 아들이며 위문공(衛文公)의 손자였는데 그때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 어떤 사람이 까닭을 묻자, 의가 말했다.
“신군이든 구군이든 모두 주군이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일을 겪었는데, 노신이 어찌 차마 그걸 볼 수 있겠는가?”
[위헌공이 위성공의 증손자이므로, 태숙 의는 위헌공의 조부 항렬이다.]
영희는 상공의 궁중 권속들을 바깥으로 옮기고, 궁실을 청소하였다. 어가를 준비하여, 우재 곡으로 하여금 북궁유와 공손 정을 데리고 이의로 가서 헌공을 영접해 오게 하였다.
헌공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수레를 달려 사흘 후에 국경에 당도했는데, 대부 공손 면여(免餘)가 마중하러 나왔다. 헌공은 먼 곳까지 마중 나온 것에 감격하여,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 그대와 다시 君臣 관계가 될 줄 몰랐소.”
이때부터 면여는 헌공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헌공이 국경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대부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였다. 헌공은 수레에서 내려 읍을 하였다. 헌공이 도성으로 들어가 태묘에 고하고 조당에 임하자, 백관이 하례를 올렸다.
태숙 의는 그때에도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헌공이 사람을 보내 책망하여 말했다.
“태숙은 과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과인을 거부하십니까?”
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전에 주군께서 출국하셨을 때 신이 따라가지 못했으니, 그것이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바깥에 계실 때 신이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어 안팎의 소식을 통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입국하려 하실 때 신은 또 그 일을 듣지 못했으니, 그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주군께서 그 세 가지 죄로 신을 책망하시니, 신은 죽음을 피해 달아나야겠습니다.”
태숙 의는 수레를 타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헌공이 친히 가서 만류하였다. 의는 헌공을 보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면서, 상공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헌공은 허락하였다. 후에 헌공은 태숙 의를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서게 하였다.
헌공은 영희를 단독 재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전결하게 하고, 식읍 3천 호(戶)를 더 하사하였다. 북궁유, 우재 곡, 석악, 공손 면여 등은 모두 더 많은 봉록을 받게 되었다. 공손 정과 식작은 망명길을 수행한 공로로 인해, 공손 무지(無地)와 공손 신(臣)은 부친이 국난 때 지킨 절의로 인해 모두 대부가 되었다. 그 외 태숙 의, 제악(齊惡), 공기(孔羈), 저사신(褚師申) 등은 모두 예전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거원을 노나라에서 불러들여 복위시켰다.
한편, 손가는 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바꿔 척읍으로 갔다. 손림보는 헌공이 필시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척읍을 晉나라에 바치고, 영희가 시군한 악행을 호소하면서 晉侯가 토벌해 주기를 청하였다. 또한 衛侯가 조만간 척읍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것이니, 구원병을 보내 함께 방어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진평공(晉平公)은 군사 3백 명을 보내주었다. 손림보는 晉兵을 모씨(茅氏) 땅으로 보내 지키게 하였다. 손괴가 간했다.
“晉兵의 숫자가 적어 衛軍을 막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하려 하십니까?”
손림보가 웃으며 말했다.
“3백 명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동쪽 경계를 맡긴 것이다. 만약 衛軍이 晉軍을 공격하여 죽인다면, 필시 晉의 노여움을 격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晉이 우리를 돕지 않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손괴가 말했다.
“아버지의 고견(高見)은 제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영희는 손림보가 병력을 청했는데, 晉나라가 겨우 3백 명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晉나라가 진정으로 손림보를 도울 생각이라면, 어찌 3백 명만 보내겠습니까?”
영희는 식작으로 하여금 군사 천 명을 선발하여, 모씨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