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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다 놓여있는 가지각색의 화분들, 주인이 되찾아 가지 않아 먼지만 잔뜩 쌓인 자전거들, 오래된 벽과 타일들의 퀴퀴한 냄새, 1층 아파트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릴 때 잠깐 살아본 복도식 아파트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어렸을 때는 가난한 아이들만 산다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이것도 다 추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 아파트 4층 404호]. 인터넷에서 사이가 좋았던 친구가 뽑아준 주소였다. 어른들은 항상 인터넷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도무지 그 사건을 나 혼자서 해결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경찰도 부모님도 친한 친구도 내 말이 헛소리라며 믿어주지 않았다. 이제 내가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라곤 이거 하나뿐이었다.
딩동-. 용기를 내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던 건지 먼지가 잔뜩 쌓여있던 데다가 조금 끈적거렸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누군가의 종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사람이 안 살면 어떡하지, 와 같은 걱정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잡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핑크 공주님 맞으시죠?”
현관문을 열어준 사람은 굉장히 젊어 보이는 외형의 여자였다. 미성년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담실은 이쪽이고, 잠깐 차 좀 끓일 테니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 상담실은 큰 책상이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던 작은 방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안방으로 사용하기 제격인 크기였고, 침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래된 나무 책장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서류 문서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파일에서 삐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살인’, ‘방화’, ‘강간’ 같은 강력 범죄들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저 내용을 굳이 읽고 싶진 않아 고개를 돌렸다.
내 앞의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필기구들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도자기 인형들로 난잡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듯, 스티커가 잔뜩 붙여진 노트북 한 대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 독서광이었던 나는 이곳이 셜록의 탐정 사무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홍차 좋아하시나요? 오랜만에 손님이 오신다고 너무 많이 만들어 버렸네요. 아, 이번에 가족이 외국에서 보내주신 쿠키가 있는데, 이것도 한 번 드셔보세요.”
“그럭저럭 좋아합니다.”
“다행이네요.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을지 고민했는데.”
이윽고 그녀는 홍차 두 잔과 각설탕, 버터 쿠키가 잔뜩 올라간 접시를 들고 상담실에 들어왔다. 홍차에 대해 뭐 아는 게 없어 몇 번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버터 쿠키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주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간식이 맛있다는 여자 친구의 말을 무시했던 과거의 내가 바보 같았다.
“이번 사건을 해결할 김재희라고 합니다.”
“임승용입니다.”
“혹시 이 사건을 잡지에 실어도 가능할까요? 안 된다면 적어도 녹음 같은 기록이라도요.” 그녀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상관없었다. 오히려 내 사건이 널리 퍼트려서 내가 겪었던 일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오늘은 2020년 7월 16일 수요일 낮 12시 50분. 의뢰인은 임승용. 지난주 일요일에 겪었던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사무소에 찾아왔습니다.”
여자는 이번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럴 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온몸에 쉬이 긴장이 풀리지 않아 입이 바짝 말랐다.
“처음 상담을 받았을 때는 두 분께서 오시겠다고 했는데, 다른 한 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원래 상담은 여자 친구가 먼저 넣었어요. 지금 제일 괴로워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악화해서 결국 저만 오게 되었어요.”
“현재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시는데, 혹시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병원에서는 불면증에 정신 불안이라면서 약을 지어주셨는데, 처음에는 효과가 조금 보였다가 나중에는 머리만 아파져서 못 먹겠더라고요. 사건 바로 다음 날에는 환상 같은 게 잠깐 보였고요. 여자 친구도 비슷해요.”
“흐음….”
재희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노트북에 무언가를 이리저리 적었다. 누구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끙끙 앓고 있는데, 그걸 들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그곳에 먼저 들어갔던 건 나인데도 불구하고.
“혹시 그 날의 사건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고 무엇을 닮았는지. 차근차근 말해주세요.”
정말이지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온 집안의 물건을 부수었던 적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용기를 내 경찰한테 허겁지겁 설명했지만, 아시다시피 모두 헛수고였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퍼라도 달려있던 것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그냥, 그냥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이라도 가지고 왔으면 순간적으로는 효과를 보았겠지만, 지금 수중에 있는 건 집으로 갈 때 탈 버스비 정도의 돈이 들어있는 교통 카드와 약간의 체크카드 몇 장만 남아있는 가죽 지갑뿐이었다.
“괜찮아요. 이런 일이 있어서 약을 항상 구비 했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가져다준 생수와 알약 하나를 꿀꺽 삼켰다. 아마 입 사이로 물이 흐르는지도 몰랐을 거다.
“안 좋으시다면 다음에라도 말씀해주셔도….”
“아뇨. 꼭 말해야 해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머릿속으로 말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난주 일요일에 함께 한 대학 동아리 MT 때부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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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토하고 죽자~!!!”
시작은 대학 동아리 MT였다. 마침 우리가 다니던 대학은 시골 근처에 있었던 덕에 계곡이 가까웠고, 그 날은 선배들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데다가 기말고사 기간이라 이런 좋은 명당에 사람 하나 없어 한적했다. 뭐, 어차피 1학년 때부터 학점 버렸던 우리에게 있어 기말고사 기간은 황금 같은 연휴나 다름없었다.
“키야~ 역시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이렇게 마셔 줘야 한다니깐?!”
“내 말이, 선배들한테 미안하긴 해도 이렇게 여유롭게 즐기는 거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
“에이. 선배님들 지금 응급실 가셨을 텐데 걱정해줘야죠. 그리고 저희 기말고사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슬슬 공부해야 하는데, 차라리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어요...”
MT에 온 사람은 얼마 전에 사귀었던 내 여자 친구 한수림, 우연히 같은 대학교에 오게 된 부랄 친구 김지석,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한 학년 선배인 이예은 선배님까지. 대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다니던 동아리의 부원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끈끈했다. 우리는 거미와 거미줄이었고, 개인적인 시작을 제외하면 항상 개미 떼처럼 몰려다녔다. 일자리 박람회도, 유명한 교수님이 참가한 교양 수업도, 학식 시간에도 말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냐며 선배들이 따끔하게 타일렀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우리를 고치진 않았고, 들을 생각도 없었다.
우리의 관계가 끈끈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무더운 열기 때문에 더위를 먹어서 그랬던 걸까. 그날따라 유독 술이 잘 들어갔다. 평소에는 입안에서 도는 씁쓸함에 거부감을 느껴 마신다고 해도 맥주만 마셨지만, 먹었던 술은 소주뿐이었는데도 씁쓸함은커녕 뒷맛이 달았다. 과거 술과 여색을 즐겼던 폭군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야, 우리 원래 이렇게 놀았잖아. 이렇게 특별한 날에도 똑같이 놀거면 차라리 술집에나 가는 거 어떻냐?”
처음 말을 꺼냈던 건 지석이였다. 지석이는 나와 비교조차 할 수 없던 술고래였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해보던 아이였으니 처음 말을 꺼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네...”
“음...아! 저희 무서운 이야기 하는 건 어때요?”
“그거 좋네! 다들 찬성인 거지?!”
우리의 텐션이 점점 높아졌고, 이윽고 예은 선배가 빈 술병을 가져오면서 술 게임이 시작되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차례대로 술병을 굴린 다음 멈추면 입구 부분이 가리키는 쪽의 앉아있던 사람이 실화 바탕의 괴담을 말해주는 거였고, 만약 실화가 아니라고 판정되면 최악의 벌칙을 맞는 거였다. 술 게임만 100번은 넘게 해봤을 우리에게 있어 너무도 쉬운 규칙이었다.
빙글, 빙글, 빙글, 빙글.
빠르게 돌아가던 술병이 천천히 속도가 느려졌고, 병의 입구는 게임을 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예은 선배 쪽을 가리켰다. 얼마나 술을 들이켰는지, 술의 내성이 강했던 선배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엑, 이게 되네?!”
“선배님 빨리 말해주세요! 기다리다가 죽을 거 같아요...” 수림이가 기다리기 지쳤다는 듯 선배를 재촉했다.
“아, 알겠어. 내가 들려줄 괴담은...”
선배가 들려준 괴담은 우리가 MT를 온 계곡 바로 위에 있다는 흉가에 대한 거였다.
“잘 들어. 한 번 더 말 안 할 테니깐. 이건 내가 1학년 때 겪었던 일이었어. 벌써 몇 년이 지난 건지,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일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어차피 이제 이 문화는 없어져서 너희들은 다신 겪지 못했을 테지만, 하필이면 내가 마지막이었던 탓에 더 끔찍했어. 으,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미친 짓을 10년 넘게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건지 원.”
예은 선배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다이내믹한 걸 좋아했던 선배가 혀를 내두를 정도면 대체 어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좀 더 집중해서 들었다.
“대체 무슨 문화였길래 그렇게 힘들었던 거예요?”
“너희 저기 산에 폐가 있는 거 아니?”
선배의 손가락이 바로 옆 산을 가리켰다. 부를 이름조차 없어서 그냥 뒷산이라 불리는 그 산이었다. 뒷산 바로 옆에 있는 계곡 때문에 매년 찾아왔었는데, 설마 저런 곳에 그런 흉물스러운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네?! 저기에 있다고요?”
“그래. 아마 너희들은 상상조차 못 했겠지. 어차피 저기 사유지 소유 때문에 못 넘어가기도 했고, 워낙 험해서 저기서 도토리 줍겠다고 들어가시는 어른신 분들 사고 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로 위험해. 근데 우리 동아리, 아니 우리 대학에서는 새내기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오르게 했다니깐. 완전히 미친 거지.”
“완전히 미쳐서 더는 할 말이 없어요, 언니...”
“선배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던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거야 당연히 선배가 엄청 강해서 그런...”
지석이 선배의 몸을 흘깃 보더니 키득거렸다.
“시끄러!! 내가 말하는 동안 다들 합죽이가 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시작은...그래.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시작했어. 지금처럼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MT를 진행했는데, 평소 날 아니꼽게 바라보던 여자 선배가 나 혼자서 그 폐가로 보내자고 제안했어. 내가 예전에 그 선배 전 남자 친구랑 잠깐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 꼬았나 봐. 마침 나와 같은 동기들은 모두 짝이 있었는데 나만 없었으니 변명도 딱 준비되어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합친 인원이 홀수라서 그랬다고 말했지만, 수림이는 여자의 감, 알지?
준비물은 간단했어. 연락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랑 손전등, 증거를 남길 수 있는 유성 네임펜. 폐가 2층의 방이 있는데 그곳에 학번이랑 이름을 쓰는 게 미션이었어. 고대가 내일 낮에 다 확인하고 한 명이라도 빠지면 나중에 전원 소집한다고 기합 줬던 모습도 아직도 기억나. 다른 여자애들은 무섭다고 나중에 가려 했지만, 그 불여우 같은 선배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 있던 내가 결국 제일 먼저 출발하게 되었어. 어차피 주말마다 암벽 등반도 해봤는데, 별문제 없을 줄 알았거든? 근데 그곳 의외로 문제가 엄청나게 쌓여있더라.
우선 가는 길도 워낙 험했어. 그나마 옛날에는 사람들이 살았었는지 잘 닦여있는 길도 있었지만, 나머지 길은 웬만한 등산로보다 더 열악했어. 나무와 밧줄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다 썩어있었지, 바닥에는 나보다 큰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지. 심지어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고 빠른 걸음으로 가도 30분이나 걸릴 정도로 멀었어. 내 뒤에서 따라오던 여자 동기 둘을 빼고는 아무도 내 속도를 따라온 사람이 없었어.
죽기 살기로 등산한 우리 셋 앞에는 오래된 2층 주택이 기다리고 있었어. 맞아, 계속 말했던 폐가였던 거야.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음산하다는 기운만 느꼈어, 원래 폐가들이 다 그런 법이잖아. 먼지는 먼지대로 잔뜩 쌓여있던 데다가 창문은 망가져 있거나 아예 깨져있었고, 현관문은 손잡이가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너덜너덜했고.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썩은 악취가 끊임없이 올라왔어. 밖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딘가 물이 고여 있거나 들짐승들이 그곳에서 죽은 바람에 났던 시체 냄새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바닥에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널부러져 있었어. 용기 내어 한 번 만져보았는데 정말이지 차가웠어. 피부 안에 있는 뼈가 다 시릴 정도로.
그때 MT 장소를 빌려주셨던 백숙집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분께서 그곳은 옛날 6.25 전쟁 때 가난했던 남한 사람들이 피난처로 사용했다던 곳이었다고 알려주었던 게 뒤늦게나마 떠올랐어. 마침 내가 역사를 전공으로 했잖아. 100년도 채 안 된 옛날에 더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밥을 먹고 볼일을 보는 걸 상상하니 자꾸 속이 울렁거렸어. 뒤에서 따라오던 동기 둘도 나랑 비슷한 학과 출신이라 표정이 썩 좋진 않더라. 다른 방들도 몇 개 더 있었지만,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우리 셋은 허겁지겁 2층으로 올라갔어.
2층에는 방 두 개가 있었고, 계단으로 올라오자마자 선배들이 말한 곳을 발견했어. 혹시나 못 찾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왜냐하면, 벽에는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수두룩 빽빽 적혀 있어서 우리가 쓸 공간이 없었어.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하마터면 지릴 뻔했어. 그야 콘트리트 벽에 새빨간 색의 펜으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 공포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잖아. 선배들도 이걸 알고 있었던 건지 벽 대신 새하얀 화이트 보드가 가지런하게 놓여있더라. 아무 이름도 안 적혀 있는 물건으로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화이트 보드 곁으로 다가갔어. 깨진 창문으로는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와 분위기가 음산했지. 거기에 바닥에는 자잘한 돌멩이들이 뿌려져 있어서 가는 내내 기분이 더러웠어. 심지어 그때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액정이 다 나가버리는 참사도 일어났어. 산 지 얼마 안 됐었는데, 허겁지겁 주워보니 완전히 망가져 있었더라. 그때 얼마나 짜증났던지. 그냥 빨리 끝내고 내려오고 싶어 내 이름을 대충 휘갈겼어. 어차피 이름만 쓰면 됐으니깐.
하지만 문제는 산 아래로 내려갈 때부터였어. 다들 등산할 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 근데 문제는 내가 그 사실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던 거야. 등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면서 멍청한 초짜였어. 그냥 빨리 내려가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주위의 나무를 잡으면서 내려갔어.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바닥이 미끄러웠는데도 거기까지 내가 어떻게 내려갔는지 몰라.
‘꺄아악!!!’. 그렇게 중간까지 내려와서 입구까지 얼마 안 남겨두었을 때 뒤에서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어. 가끔 고라니 같은 야생 동물이 사람처럼 울어대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사람의 목소리였어.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어.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어. 사람이 다쳤다는데, 무서워할 거 자시고 사람부터 살려야 했으니깐.
잠시 후 내가 본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어. 내 뒤를 따라오던 동기 두 명 중 한 명이 작은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엉엉 울면서 덜덜 떨고 있더라. 들어보니 내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무리하다가 바닥에 절벽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고.
‘제, 제발 빨리 구급차 좀 불러줘...이러다가 애 죽을 거 같아...’
이게 정말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조금 전의 나처럼 둘 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거나 부서져 버렸던 거야. 난 아직도 그 동기가 절벽 아래 자기 동기를 좀 살려달라며 내 다리에 울고불고 매달렸어. 곧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야. 그것도 내 선택 때문에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죽는 결말은 생각하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았어.
나는 평소 단련해두었던 암벽 등반 덕에 금세 발이 땅에 닿을 수 있었어. 몸 어딘가가 부러졌을 때 대처법과 응급처치 정도는 상시에 외워두고 있던 덕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어.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이 죽을 일이 벌어질 거냐면서.
그러나 내 두 눈으로 본 광경은 무척이나 끔찍했어. 금방이라도 숨이 멎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위독한 상태였어.
‘빨리 가서 119 불러와! 다른 애들은 핸드폰 가지고 있을 거야!’
나는 허겁지겁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주기 위해 입고 있던 청바지를 천천히 올려냈어. 세상에. 도무지 할 말이 나오지 않았어. 그렇게 끔찍하게 다친 다리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 다리부터 떨어졌던 건지, 허벅지 아래는 스프링처럼 구겨져 있었어. 심지어 다리 안쪽은 바닥에 있던 날카로운 돌 때문에 피부가 완전히 찢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이미 흘린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어. 허벅지 위는 도무지 볼 용기가 안 나서 눈을 돌렸고. 게임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어. 아마 너희는 평생 보지도 못 할 거야.
그대로 1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남았던 건지, 원. 지금의 내가 이렇게 말했어도, 그때는 하려는 응급처치가 정답일지, 과연 이 친구를 내가 살릴 수 있을지, 만약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무서웠어. 지금까지 사람을 살린다는 일에 막중한 책임감을 들어본 적도 없었거든. 물론 상상한 적도 없었고 말이야.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억이 없는 거 아닐까? 어쨌든 나와 다친 그 아이를 구하려고 출동한 몇몇 구급 요원들 덕분에 우리 둘 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내가 입고 있던 웃옷으로 지혈까지 해냈다면서 어느덧 나는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었어. 가끔 얼굴도 본 적 없는 신입생들이 나한테 인사를 해줄 때면 자꾸 그때의 일이 떠오르더라.
동시에 그 문화는 사라지고 말았지.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안 사라지는 게 당연했지. 그리고 그 폐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했고, 출입 금지 표지판도 걸어놓아서 들어간 사람은 나 이후엔 단 한 명도 없었을 거야. 다들 내 이야기를 듣곤 겁먹어서 절대 발도 들이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거 폐가를 빼놓고는 무서운 게 없잖아요?”
지석이 반박했다. 뭐, 평소에 괴담을 많이 찾아보던 지석의 눈에는 방금 이야기가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어두운 숲속에서 다친 사람이 눈앞에 있던 거잖아!”
“맞아. 네가 거기 있었으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었을걸?”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괴담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겨우? 그리고 그런 건 너희 같은 애들이 들을 때 무서워하라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야.”
“그래서 다쳤던 동기는 어떻게 됐어요? 무사히 전부 치료되었나요?”
“글쎄, 내가 지인의 친구의 남동생의 1년 전 같은 반이었던 친구한테 건너 듣기로는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네. 듣기로는 뼈가 두 동강 난 게 아니라 완전히 가루가 되었대. 물론 치료가 아예 불가능하거나 목숨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후유증 같은 게 나올 수도 있다네. 근데 알고 보니 MT 가기 전부터 계속 무용 연습을 했다네. 댄서가 되겠다면서. 처음에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의절까지 할 뻔했는데, 눈에 뵈는 게 있었겠냐? 계속 아르바이트하면서 꾸준히 연습하다가 요번에 나온 대회에 나가려 준비하고 있었대. 잘 하면 데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는데. 하필이면 대회를 2주 남겨두고, 쯧쯧. 아, 그래서 그때 걔 보냈던 선배들은 고소당했다고 대문짝 하게 소문난 이후 휴학했대. 하긴 나라도 후배들한테 얼굴 들기 창피해서 휴학했겠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의 그 동기가 무척이나 불쌍해졌다. 만약 같은 절벽에서 떨어져 두 손이 박살이 난다면. 으.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아마 그곳을 헤집어 놓았다고 죽은 사람들이 저주를 내린 게 아닐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무당들도 그런 곳 함부로 들어가면 천벌을 받는다고 벌벌 떨잖아. 아, 10년 동안 들락날락한 동안 가만히 있었으니깐 아닐 수도 있으려나...?”
“그래서, 증거는 어딨죠?”
“뭐?”
“증거요, 증거. 아까 말했잖아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면 최악의 벌칙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에 그런 증거가 있을 리 없잖아.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야. 가져왔던 손전등은 집에 있는 데다가 나 얼마 전에 핸드폰 망가진 거 기억 안 나? 그때 MT 참가했던 선배들이랑 동기들 전화번호까지 지워졌다고.”
“아니, 선배들 증언은 예은 선배가 협박하면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도 있는 데다가, 손전등은 가져와봤자 그때 사용되었다는 걸 증명 못 하잖아요.”
지석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 아니 나 말고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석의 말에 집중했다. 얼마나 집중했었는지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말을 토씨 하나 잊히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놈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곳을 다녀온 이후 계속 후회했다. 사건을 겪기 전의 나였다면 단박에 거절하거나 막을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막기는커녕 녀석의 말에 옹호나 했지.
“그래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 하나가 있는데 말이죠. 저기 있는 폐가에 선배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다녀오는 거죠. 마침 제가 손전등이랑 이것저것 가져왔거든요? 손전등에다가 휴대폰은 예은 선배 빼고 다 가지고 있는 데다가 그닥 위험하진 않잖아요? 술 취한 선배들이 10년 동안 다녔는데 아무도 안 다친 걸 생각하면 그냥 그 선배가 많이 취했던 거겠죠. 안 그래요?”
“그래도, 나는 저주 들린 곳에는 안 들어가고 싶어. 맨날 공포 영화에서도 이렇게 들어갔다가 줄초상 난다고!!”
“익, 지석이 너. 술 엄청 마신 거 같은데. 그 상태로 등산하는 건 너무 무모해.”
“에이,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지석이 말대로 10년 동안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깐. 이상한 물건만 안 건드리면 되죠.”
“그치만....”
“그럼 우리 다 같이 다녀오는 거지. 선배가 혼자 다녀오셨을 때도 괜찮았는데, 어떻게 4명이나 있을 때 사고가 일어날 수 있겠어? 조심해서 다녀오면 되는 거고.”
“맞아. 앞에 출입 금지 팻말이 있긴 해도 몰래 다녀오면 그만이야. 혹시라도 주민들 만나면 그냥 산책하고 있었다고 거짓말하면 돼. 어차피 그 사람들은 우리가 어딜 싸돌아다니든 별 신경도 안 쓸걸?”
“그, 그래?” 수림이는 나와 지석의 말에 동요했다.
“정말이라니깐! 이왕 이렇게 된 거, 말 나온 김에 당장 가자!”
“야! 잠깐만!”
상황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먼저 말을 꺼낸 지석이가 가방에서 손전등과 핸드폰을 꺼냈고, 나는 예은 선배를 설득시켰다. 곧 들어갈 숲속은 어두운 데다가 길도 복잡해서 이번 폐가 체험을 위해 반드시 동행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때 선배들이 무리하게 속도를 낸 바람에 일어난 사고잖아요.”
“얼마 전에 여기 비 왔던 거 몰라? 여기는 다 말랐더라도, 산은 엄청 미끄러울 거야. 게다가 너희들은 나처럼 매주 암벽 등반도 하지 않았잖아.”
“대신 제가 있잖아요! 고등학생 때는 육상부에 들어갔다고요. 지석이는 기자가 꿈이라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체력 하나만큼은 괜찮을 거예요. 수림이는 제 여자 친구니깐 제가 챙기면 되는 일이고요. 오히려 선배가 같이 가주지 않으면 저희 그곳에서 조난 당할지도 몰라요. 재수 없으면 절벽에서 떨어지던가.”
“벌써 2년 전이야. 나도 선배들이 미리 만들어둔 깃발을 보고 따라간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내가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지 너도 잘 알잖아. 응? 그리고 너 완전 취한 거 보여? 알코올 중독자 같아.”
“야! 다 챙겼으니깐 이제 출발하자. 벌써 새벽 한 시라서 빨리 못 다녀오면 아침에 내려와야 할 수도 있어!!”
결국 나와 지석이는 설득하지 못한 예은 선배를 두고 계곡을 건넜다. 며칠 전에 비가 내린 것치고는 물이 불어나지 않고 얕은 덕에 무릎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수림이는 예은 선배만 아래에 두고 내려오는 게 무섭다고 칭얼거렸지만, 이내 내 손을 잡고 같이 계곡을 건넜다. 계곡 바닥에 잠들어 있던 해초를 밟고 넘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위험했어도 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숲의 입구는 무척이나 음산했다. 다 썩은 나무로 만들어진 표지판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기세였고, 사람들이 이용하라고 만들어둔 듯한 길은 진흙투성이였다. 신고 있던 운동화 깔창이 젖어버렸다. 온기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흙탕물은 금세 내 양말과 발바닥 사이 사이로 스며들어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조심히 올라와. 여기 나뭇가지가 많아.”
“진짜 사람이 안 오긴 했나 봐. 이렇게 장애물이 많은 걸 보면 안 치운 지 10년은 넘은 것 같아.”
지석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꺼냈다. 저번에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못 가져온다고 편집장에게 혼이 났다고 털어놓았던 게 떠올랐다. 아마 이번이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적한 시골 숲속에 지어진 의문의 폐가! 아니지, 폐가라고 말하면 멋이 안 사니깐, 차라리 흉가라고 하는 건 어때? 6.25에 벌어졌던 대학살이 벌어졌던 장소!”
“야, 근데 그거 아직 확실하지도 않는데 뿌려도 괜찮은 거야? 진짜 6.25 사람들이 거기서 살았거나 죽었다는 게 확실하지 않잖아.”
“괜찮아, 괜찮아! 나중에 몰랐다고 해명하고 반성문 쓰면 돼. 내가 그때 살았던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다 알겠어? 역사 강의하는 것도 아닌데 별일 있겠어? 빨리 올라가자. 이렇다간 해가 너무 져버려서 구도가 안 살아!”
이윽고 우리 셋 앞에는 녹슨 표지판 하나가 나왔다. 아까 선배가 말해주었던 출입 금지 표지판인 듯 다 벗겨진 새빨간 페인트로 ‘출입’이라는 단어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어쩐지 기괴하다고 생각한 나였다.
“뭐해? 얼른 따라와. 표지판이 있는 걸 보니 길은 알맞게 온 거 같은데?”
이 와중에 지석은 무섭지도 않은 지 바로 표지판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이라도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공포, 혐오, 두려움 등등. 듣자마자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칙칙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그렇다고 산 아래로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깟 자존심 하나 때문에.
1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 산을 올랐다. 선배님이 말씀하셨던 폐가를 찾기 위해 온산을 쥐잡듯이 돌아다녔다. 30분 만에 폐가를 찾아냈다는 선배가 대단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예은 선배가 또 거짓말 친 거 아냐? 폐가 따위 없다는 거 이미 알고 있어서 안 올라왔던 거지. 그럼 아다리가 딱 떨어지네!”
제일 먼저 인내심이 다 떨어진 사람은 지석이었다. 초반에는 의욕이 넘쳤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그 모습이 어디 가버리고 온몸이 축 늘어졌다. 가끔 짜증이 났는지 지나가는 나무를 발로 걷어찼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자...나 지친다.”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은 더 찾아보자. 혹시 몰라? 이런 깊은 곳에 숨어있을지도?”
“하아, 애초에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폐가가 있다는 게 이상한 거였어. 대체 이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았던 집이 있겠냐고.”
“승용아, 우리 그냥 내려가면 안 돼? 벌칙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면 예은 언니도 아무 말 안 하실 거야.”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온 시간이 아깝잖아. 조금만 더 둘러...잠깐!”
그때 내가 들고 있던 손전등 빛에 무언가가 잡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숲속의 부자연스러운 것.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낡은 주택이었다.
“찾았어! 내가 찾았다니깐?! 조금만 더 찾으면 있다고 했지?”
“뭐? 어디, 어디!”
“얘들아, 조금만 천천히 가!”
나는 건물을 향해 허겁지겁 뛰었다. 바위에 앉아 카메라를 닦던 지석과 물을 마시는 수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따라왔다. 바닥에 고여 있던 흙탕물을 밟아 운동화가 질퍽거렸다. 여기저기 자라나 있던 나뭇가지가 피부를 스치고 차가운 빗물을 묻혔다. 발견한 사람은 나였지만, 정작 나도 이곳에 이런 게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여기 있다니깐. 나 아니었으면 그냥 내려갈 뻔했네?”
“이야~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있지? 미친 거 아냐? 어쨌든 정말 고맙다. 다음에 커피 한 잔 쏠게.”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지석은 카메라로 폐가를 이곳저곳 찍기 시작했다.
폐가에는 정말이지 오래된 흔적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벽에는 덩굴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있었고, 입구로 보이는 곳의 현관문은 반쯤 떨어져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렸다. 바닥에는 죽은 잡초들로 보이는 새카만 것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입구에서는 바람을 탄 덕에 도무지 맡을 수 없는 썩은 악취가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고약한 악취가 날 수 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똑똑똑,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시나요? 있으시다면 취재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석은 다 망가진 현관문에 세 번 노크했다. 폐가 안에는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야! 그거 하면 진짜 귀신이 나와서 대답한단 말이야!” 수림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겠냐? 당연히 귀신 나오라고 하는 거지. 귀신이 나와서 물건을 건드린다던가, 아니면 대답이라도 해서 이 카메라나 녹음기에 포착되기라도 하면. 바로 인터넷에 쫙 뿌려져서 ‘대한민국 7대 흉가’로 소문나는 건 시간 문제라고!”
그럼 나는 이 폐가를 처음 촬영한 기자가 될 수 있는 거잖아! 지석은 입이 찢어질 정도로 실실 웃어댔다.
“녹음기는 또 언제 가져왔대.”
“이게 바로 프로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임마. 너도 좀 배워.”
“호오, 그런 게 프로 정신이라는 거야? 정말이지 쓰레기 같네.”
“악!!!!”
그의 말에 대답했던 사람은 나도, 수림이도, 지석도 아니었다. 아까 산 아래에서 가지 말라고 계속 붙잡았던 예은 선배였다. 그것도 혼자 손전등 하나만 들고 산을 올라온 덕에 입고 있던 옷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던 데다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아, 미안.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거 되게 심심해서 지름길로 먼저 올라왔어.”
“대체 그 꼴은 어떻게 된 건데요.”
“지름길이 워낙 험해야지. 오는 길에 실수로 발이 미끄러져서 그래.”
“...혼자 오면 위험하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아, 그래. 진짜 미안하다.”
예은 선배가 시큰둥하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너희는 굼벵이냐? 20분이나 늦게 출발했는데 내가 먼저 도착했잖아.”
“그야 저희는 길도 모르는 쌩 초짜였잖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숲속에서 길 찾기가 되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어쨌든 빨리 들어가자. 여기 오는 거 되게 기분이 더러워. 이런 게 대체 뭐가 재밌다고...”
예은 선배는 그 누구보다 먼저 폐가에 발을 들였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까까지 싱글벙글 웃고 있던 해맑은 표정 대신 잔뜩 구겨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놓고 불편하다는 걸 잔뜩 티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체험이 두 번째이니 덜 무서울 수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들어가는 건 다른 의미에서 무서웠다. 제일 신나게 사진을 촬영했던 지석이조차 잠깐 멈칫했는데.
“뭐해, 먼저 들어오자고 졸랐잖아. 같이 들어가야지.”
예은 선배의 뒤를 따라 들어온 폐가의 안쪽은 무척이나 지저분했다. 거기에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벽과 기둥은 쥐가 갉아 먹었는지, 여기저기 빈틈이 많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바닥에는 부식된 가루들이 난잡하게 널려있었다. 이 와중에 입구부터 계속 이어지던 악취는 더욱 심해져 제대로 숨조차 못 쉬었다.
“어우, 이런 악취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 저번에 왔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하네. 여기저기 물이 고여서 그런 건가?”
나는 예은 선배의 발에 공감했다. 아무래도 여긴 천장이 있어서 물이 증발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가 지하실 같은 구석진 곳에 있는 수도관이 터져 몇십 년간 고여 있는 것도 가능할 듯 보였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몇 개의 문과 철제 계단이 나왔다.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바로 무너질 것처럼 많이 부식되어 있었다. 원래는 더 튼튼한 계단을 지으려 했던 건지 철제 계단 아래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았다.
“자! 이제 각자 두 명씩 갈라지자!”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야, 너희 귀신 나올까 봐 무서우니까 4명이서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거잖아. 어차피 이 폐가 그렇게까지 안 넓어서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으니깐 괜찮아.”
예은 선배는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팀 정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내가 승용이랑 1층 돌아다니고, 2층은 지석이랑 수림이가 담당해 줘.”
“선배님, 차라리 제가 승용이랑 다녀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승용이가 없으면 왠지 계속 불안해져서...”
수림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물론 나는 찬성이었다. 평소 손잡는 것도 부끄러워해서 한 달 내내 한 거라곤 신호등 바뀔 때 잠깐 손목을 잡았던 것뿐이었는데. 이참에 밀렸던 진도를 확 뺄 수 있을 거란 확신에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고 말았다.
“임승용. 너 얘랑 진도 뺄 거라는 거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엑, 정말요?!”
“안 되겠어. 원래는 해주려고 잠깐 고민했는데, 너희 둘이서 하라는 폐가 체험은 안 하고 꽁냥거릴 걸 생각하면 도저히 못 견디겠어.”
결국 나와 수림이는 다른 팀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겨우 누가 1층과 2층을 돌아다닐까, 의 간단한 문제이긴 해도 떨어질 생각조차 안 했던 닭살 커플 같던 우리 둘에게는 큰 문제였다.
“선배 때문에 다 망쳐버렸잖아요. 진도 빼려고 이 야밤에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건데, 다 헛수고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누가 그 엿 같은 표정 지으랬냐? 아무리 내 귀여운 후배라지만 더러워서 참을 수 있어야지. 아까 봐, 지석이도 표정 구려져서 내 의견에 적극 찬성했잖아.”
이래서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졌겠냐? 예은 선배는 혀를 찼다. 그게 그렇게까지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었나.
우리가 둘러볼 1층은 굉장히 별거 없었다. 총 3개로 이루어진 방 안과 거실로 보이는 이곳을 둘러보는 것. 다들 폐가 체험 장소를 폐가나 정신 병원으로 잡아서 대충 둘러본다고 해도 1시간은 걸린다던데, 우리는 10분도 안 된 채 끝날 위기였다.
“이거 너만 알아야 해. 사실 나도 여기 와본 적 없어.”
나는 깜짝 놀라 예은 선배를 쳐다보았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너무 생생하게 들려서 의심이 많았던 나조차도 속았는데 거짓이었다니. 머리에서 알코올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 여기에 이런 폐가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건데요?”
“내 몇 년 위 선배가 여기 다녀온 거 말했을 뿐이고, 동기가 다리 다쳤다는 건 즉석에서 만들어냈지~ 근데도 알아서 잘 속더라? 나중에 사기꾼 조심해야겠어.”
그래도 6.25 전쟁 때 사람이 살았다는 건 진짜 백숙집 할머니한테 들었대. 내가 대학 오기 1년 전에 문을 닫아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선배님은 거짓말 좀 그만 치세요. 그러다간 아무도 안 믿을걸요?”
“그래, 그래~ 빨리 둘러보고 2층이나 올라가자. 네 여친이 목 놓아 기다리고 있잖아.”
예은 선배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곤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열쇠를 넣고 돌려야 열리는 구조였지만, 너무 오래되었던 덕에 손잡이를 살짝 돌리자 금방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안은 별다를 거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 먼지가 잔뜩 낀 녹슨 거울과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어서 무엇인지 가늠조차 힘든 매트리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 놓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고약한 악취가 나던 원인이 이거였다고 생각한 나였다.
“뭐야, 재미없게. 선배가 그렇게 재밌다고 했는데, 겨우 이거뿐이야? 막 귀신같은 것도 안 나오는데 차라리 이거 전당포에 가져다 팔면 돈이라도 될 것 같지 않아? 사연 있는 물건은 값이 잘 나가잖아.”
예은 선배는 망설임 없이 거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미 다 깨져있던 거울로 선배의 얼굴이 기괴하게 비췄다. 금방이라도 공포 영화의 귀신이 거울 속에서 튀어나와 선배의 목을 졸라 죽여버릴 것 같아 침이 바짝 말랐다.
“이 와중에도 물건 팔아 돈 벌려는 선배는 완전히 미친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미쳤어요. 공포 체험도 할 겸 정신 병원 찾아가는 건 어때요?”
“농담이야, 농담. 다 깨진 거울을 어떻게 팔아? 빨리 다음 방 가자.”
나는 예은 선배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방에서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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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소설이야^&^
와 보자마자 스크롤 쭉 내려봄
문단 띄어쓰기해주시면 어떻겠음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총잡이는 게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