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賁)
가도(賈島)가,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라고 할까, “중은 달 아래 문을 미네.”라고 할까를 두고 고심했듯이 글은 부단히 고쳐야 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이백 몇 번이나 고쳤다 하지 않는가. 고친다는 건 꾸미는 것이다. 어떻게 꾸밀 건가.
옛날의 귀부인들은 비단 옷을 입은 뒤에 경의(褧衣)라고 하는 얇은 홑옷을 덧입었다고 한다. 경의의 소재는 삼베라는 설도 있고 모시라는 설도 있다. 경의로 외화(外華)를 경계하는 것이 참으로 옷을 잘 입는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한동안 남방셔츠 색깔을 자주 바꾸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흰색만 좋아한다. 꾸미기가 궁극에 다다르면 ‘흰색으로 꾸민다.’라는 뜻을 가진 백비(白賁)라는 고인의 말이 똑 나 들으라고 한 소리인 것 같아 씩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나의 남방셔츠 색깔이 흰색인 줄은 내가 알지만 나의 글들이 흰색인지 아닌지는 내가 모른다.
꾸미는 데 빠지다 보면 비단옷처럼 화려해져서 거짓되게 되기 쉽다. 흰색으로 꾸민다는 말은 꾸미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화려함으로 해서 본 바탕을 잃을까 염려해서 한 말이다.
흰색도 색이다. 무색이 아니다. 흰색도 꾸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꾸밈은 정직하다. 무슨 색이든 무슨 내용이든 그대로 내보이는 색이 흰색이다. 모든 색의 바탕이 되면서도 모든 색을 초월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이 흰색이다. 모든 말의 바탕이 되면서도 모든 말을 압도하는, 심금을 울리는 말이 정직이다. 흰옷 입은 여자 앞에서는 나는 늘 마음이 흔들리고 흰 종이를 대하면 나는 항상 가슴이 뛴다. 정직한 여자 앞에서는 나는 늘 파계승이 되고 정직한 글을 읽으면 나는 항상 연서를 읽는다.
내가 글을 꾸미는 기본 정신은 더 정직한 글이 되게 하려는 데 있다. 부끄럽고 누추하고 초라해도 정직하려고 애쓴다. 겸양은 때로 같잖은 오만이 된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만은 때로 사람을 즐겁게 한다. 정직하기 때문이다. 정직하려는 이 노력은 독자에 대한 글의 최소한도의 예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