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정암 조광조
몇 년 만에 도동서원을 다녀왔다.
그 사이 터널이 뚫리고,
비를 머금은 은행나무가 연둣빛으로 봄 단장을 하고 있었다.
조광조가 그의 스승인 김굉필을 만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신진사류였다.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의 문인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그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진학자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으로 감찰監察 조원강趙元綱의 둘째아들로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고조였던 조온趙溫은 개국공신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찬성左贊成까지 오른 명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읽기를 좋아했던 조광조가 학문의 길에 입문한 것은 늦은 나이였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회천(회川 현재 평안북도 영변)으로 갔고 그곳에서 유배중이던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익히게 된다. 조광조는 천성이 총명할 뿐 아니라, 성실하였기 때문에 김종직의 문하에서 남달리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찬에 힘을 쏟아, 20세를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 학자로 꼽혔으며 점필재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한훤당의 문하에서 군계일학이 되었다.
조광조를 학문의 길로 인도한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연산군燕山君 四년에 일어났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다. 2년 뒤 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으로 극형에 처해진 사림파士林波의 주축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이 순천으로 유배되기 전까지 2년여에 걸쳐 그의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뒷날 혁신정치를 주장하며 구세력舊勢力의 부정을 과감히 물리치려 하였던 그의 정치 행적은 역시 소위 훈구파勳舊波에 강력히 대항하며 그들의 비행을 규탄하던 사림파의 정치이념을 이어받은 때문이었다. 그 무렵 그의 스승이던 김굉필과의 유명한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진다.
하루는 김굉필이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 두었다. 그때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먹었다. 이를 안 김굉필은 지나칠 정도로 종을 꾸짖었다.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조광조는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은 몸을 일으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구나.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날 이후로 조광조에 대한 김굉필의 사랑은 그 깊이를 더해 갔다
열 여덟에 첨사僉使 한윤형韓允泂의 딸과 혼인한 조광조는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읜다. 이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그는 행동거지가 특별히 단정하였으며, 모든 절차는 꼭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시행하였고, 3년간의 시묘侍墓를 정성껏 다하고 난 뒤에도 선영先塋 밑에 초당草堂을 짓고 머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학문은『소학』․『근사록 近思錄』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연구에 힘써서 김종직의 학통을 잇게 된다.
어느 시기에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결정짓는데,
당신은 현재 누구를 만나고 살고 있는가?
2024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