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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안전운행으로 모시겠습니다”
상수는 제가 모는 관광버스에 꼭 한 번 동창들을 태우고 싶다고 했다. 오늘 그는 줄무늬 셔츠에 검정 신사복이다. 그의 흰 장갑 안에는 뭉툭한 검지가 들어있다. 한때 그는 도박으로 이리저리 궁지에 몰리다 왼손 검지 두 마디를 제 손으로 잘라냈다는데, 그 토막 난 검지는 도마 위에서 굴러떨어져 통통 튀다가 도박이란 놈을 냉큼 집어 변기 속에 넣어버렸다고. 그는 1억 원짜리 버스를 통째로 도둑맞은 적도 있다는데 그 버스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날아가 뜬구름이 되었을 거라는데, 지금도 그 뜬구름은 카리브해안을 유람하고 있을까?
상수의 검지는 충분히 믿을 만했다. 강원도 횡성읍 북천리에서 섬강을 따라 시오리를 더 들어가면 머지고개가 있다. 오르다가 힘들어서 숨이 멎는다는 그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려 내려다보면 옥을 갈아서 뿌린 듯한 모래의 강이 마을을 감싸고 돈다. 모래와 물빛이 늘 희어서 수백水白이라 불리는 동네였다. 거기 수백초등학교 19회 동창생 촌놈 26명의 여행을 운전한 그는 1등급 기사였다. 신바람이 불어도 규정 속도를 준수하고 도미니카의 뜬구름이 기웃거려도 결코 곁눈을 주지 않았다.
창문엔 6월이 푸르다. 우린 한때 같은 창문(同窓) 아래에서 같은 창문을 통과하는 햇살을 받으며 자랐다. 그 아득하고 깊은 창문 속에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둘러싼 백양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그 나뭇잎들은 언제나 파들거렸다. 가늘고 긴 잎자루에 매달려 미풍에도 온몸을 하얗게 뒤집어가며 반짝거렸다. 그럴 때마다 숲에서는 구름이 피었다 사라지고 다시 피어나곤 했다.
구름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던 순자는 구름을 따라 다시 숲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구름은 교사 뒤쪽에 걸린 무쇠솥에서 옥수수죽으로 푹푹 끓기도 하고 빈 양은도시락에 옥수수죽을 받으려고 줄 선 아이들 틈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배급받은 전지분유가 새마을 노래를 따라 구름처럼 흩어질 때 기성회비 미납자 누구는 수업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누구누구는 빈 구름을 타고 서울 무슨 공장으로 날아갔다.
그 백양나무 숲에는 색다른 구름이 피어나기도 했다. 단옷날 그네뛰기대회에서 그네가 높이 올라간 정도를 측정하는 줄자에 목이 감겨서 송아지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죽을 뻔했었다. 그날 은희 엄마 치맛자락에서 펄럭거리던 구름이 상철이 아부지 가슴팍에서도 피어나 나무꼭대기를 마구 흔들어대다 소문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상품으로 놓인 양은 쟁반과 노란 주전자가 지금도 반짝거리는 곳
창밖 어디선가 끝없이 구름이 밀려오고 구름 밖으로 버스는 자꾸 달아나는데, 김밥은 영자가, 더덕무침과 메밀부침은 숙자가 어젯밤 만든 거래, 상수와 인숙이가 찬조금을 조금 더 내고, 쑥떡은 동성이 마누라가 봄에 뜯은 쑥을 버무려서 새벽 4시에 방앗간에서 해왔대, 이랑처럼 패인 주름들이 우물우물 뭔가를 씹는다. “그래, 잘 지내고 있니?”, “응, 애들 혼인시키고 밥은 먹고 살지, 뭐.”, “근데 봉희는 왜 안 왔대?”, “오래 차 타는 게 힘든가 봐”
누구는 폐 이식수술을 기다리는 중이고 누구는 치매 요양원에 있고 누구는 외아들을 잃고 누구는 전기를 먹어서 이빨과 다리가 부러지고 누구는 남편 죽고 혼자 산대. 또 누구는 세탁소 일에 화물차 운전에 형님 선거운동에 바쁘고 누구는 칠전팔기 세무사업에 성공하고 누구는 퇴직하고 누구는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야. 오지 않은 구름은 빼놓고 다행 쪽에 앉은 구름들만 버스 안에서 웅성거린다. 창밖 멀리 낯선 마을에선 밤나무가 한창 꽃구름을 피우고 있다.
장사도 가는 배 위에서 새우깡을 던진다. 파도에 앉았던 갈매기가 용케 먹이를 건져낸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친다. 모자를 움켜쥐고 선실로 몰려든다. 1층 선실은 대낮에도 나이트클럽이다. 뽕짝 메들리에 맞춰서 흔드는 라면 머리, 쭈그러진 주름, 그을린 얼굴들, 우리도 좀 흔들어 볼까? 창문 깊은 곳에서 어린애들이 까르르 허리를 뒤집는다. 백양나무 회백색 몸통들이 줄지어 기울어진다. 숲이 파도처럼 넘실대고 구름이 뭉클뭉클 생겨난다. 선창 밖에서는 바람이 파도를 부추긴다. 구름들 그림자들 출렁인다.
“야, 새새끼, 사진 잘 박아, (바닷)물이 잘 나오게”
“얌마, 그렇게 부르지 말래두, 새새끼 다 자라서 붕새 됐다구”
“익재랑 춘희랑 그때 그렇게 좋아했었다잖아, 이제 다 늦게 다시 만나 그렇게 잘산다지”
“너 생각나니? 내가 중학교에 못 간다고 했을 때, 네가 울 아부지를 설득한다고 오리 길을 걸어 우리 집엘 왔었어, 수정이도 중학교에 가게 해주세요 했지,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된다는 말 대신, 기집애가 배워서 뭣하냐고 하셨어”
“바우야 바우야 글 배워라 네 어머니 너 부르던 소리, 참 부러웠지”
“영자, 너 말야, 변소 앞에 줄 서서도 연실 껌을 씹길래 똥 누면서도 씹느냐고 물었더니 입을 다물고 씹는다구 그랬어, 큭”
“졸업식 전날이었어, 과자파티를 한다고 해서 너한테 과자값 5원을 빌렸어, 졸업하고 없는 돈 있는 돈 석 달 만에 마련해서 가져갔는데 네가 받지 않았어”
“아폴로 11호가 달나라에 가던 날, 그 밤에 우리 모두 얼마나 달을 쳐다봤던지”
“그때 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걸어갔었지”
동창 몇은 백양나무 숲이 사라진 빈터에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는 1박 2일 동안 동창同窓을 지고 다녔다. 그것은 나비처럼 가벼웠다가 돌산처럼 무겁고, 단추구멍 만하게 줄어들었다가 느닷없이 펄럭거렸다.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2019《시인동네》등단
시집 『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외
2010 농촌문학상, 현상동인, 선경문학상운영위원, 포엠피플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