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에 불을 밝히고
권영심
섣달 그믐이 지나고, 음력 1월1일 새벽 4시까지 모든 불을 밝히고 가게에 머물렀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주 어렸을 때, 기억 이란 것이 있는 순간부터 했었던 일을 안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시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가게는 9시까지만 하고 문을 닫아야 했을 때도 지켰다. 포장 음식은 할 수 있으나 내 가게는 전문점이 아니어서 단골 손님들이 가져가는 정도였다. 그러니 9시가 되면 거의 모든 불을 끄고 티비만 켜고 앉아 혼자 놀았다.
내 가게만 불을 환히 밝히고 새벽까지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를 열심히 고민했었다. 섣달 그믐에 1일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집의 오랜 풍습이었다. 불을 끄고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집안의 불을 밝히는 전통이 우리나라에 있지만, 우리 집의 것은 조금 다른 데가 있었다.
내가 어릴 때의 명절 대목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었다. 특히 설날 대목은 거의 보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꽉 차서 그냥 마음이 들뜨면서 뭔지 모를 기대감으로 좋았다.
아버지는 날마다 물건을 들여 오고 주문했고, 온 집안은 대목을 볼 상품으로 가득해서 우리들, 아이들도 전투 태세에 돌입한 병사들 같았다. 그렇게 떼쟁이였던 남동생조차 엄마의 말을 순순하게 들었고 가게 모퉁이에서 꼬마 병정처럼 보초를 섰다.
아버지는 알전구를 가게 전체에 몇 개씩이나 새로 달아서, 어둠이 내리면 가게가 축제의 불꽃처럼 환하고 예쁘게 빛났다. 자정 전에 불을 끄고 문을 닫곤 했으나 단대목, 즉 섣달 그믐의 대목장은 가장 절정이었다 .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창고, 부엌 모든 방에 불을 밝히고 설날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소등하지 않았다. 가게도 마찬가지였는 데 불을 끌래야 끌 수가 없는 것이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사를 하느라 대목장을 볼 수 없었던 상인들이 밤새도록 들락 거렸고, 가게가 완전히 문을 닫은 것은 설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그렇게 나의 섣달 그믐밤은 언제나 넘치도록 환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코로나 당시, 내 가게는 이 곳에서 십 년이 지나고 있었고 그 동안 한 번도 섣달 그믐에 불을 끈 적이 없었다. 코비드로 인해, 불을 켜 놓는 나만의 전통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나 혹시라도 영업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몹시 망설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새벽 네 시까지 불을 켜고 있었고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 그 때처럼 바쁜 그믐 밤을 보내면서 일부러 밖을 신경쓰지 않았다. 청소하고 음식하고 티비도 보면서 그렇게 시간을 잘 보내었다.
문은 잠그고 있었는데 세 번 누군가가 두드렸다. 장사 안 해요, 소리치고 열어주지 않았는데 그대로 갔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불빛에 끌려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설날 새벽에 길을 헤메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난감하고 고적할까?
4시까지 기어이 시간을 채우고 가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집도 전부 불을 밝히고 환해서 기분이 좋았고 아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불을 전부 끄고 누웠으나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섣달 그믐부터 설날 오전까지 한숨도 안 자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눈이 좀 아플 뿐 별다르게 힘들지는 않다. 이제 설날이다. 가족들과 친지들이 모여 제사 준비를 하는 집들도 아직은 많을 것이다.
코로나 당시 행복한 설날이 되었었을까? 같은 주민등록에 있지 않으면, 5인 이상 모여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가족끼리도 신고해야 했으니 참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런 날도 언제였던가...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이제는 많이 모여서 제사지내고 떡국을 먹어도 되지만 사람들은 잘 모이지 않는다. 연휴를 각자 보내고 각자 즐기고 설명절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무탈하게, 그저 무탈하길 빌면서 설날을 맞이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