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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26,11-16.24
복 음 :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참眞되고 좋고善 아름다운美 삶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어느 분과의 전화 통화중 제 말마디에 새삼 공감했습니다.
수도원은 ‘늪’이 아니라 ‘숲’이라는 말마디입니다.
안주로 무기력하게 살다 보면 수도원도 늪이 될 수 있고 참으로 깨어 정주의 삶을 살 때
수도원은 숲의 쉼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말끔히 깍아 놓은 풀밭이 숲속의 잔디밭처럼 아름다웠고 풀냄새도 참 싱그러웠습니다.
문득 예전 초등학교 5학년 음악 책에 나왔던 ‘푸른 잔디’라는 동요가 생각났습니다.
70년대 중반인 그때 한 반 아이들은 대략 80명이었고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풀냄새 피어나는’으로 시작되는 ‘푸른잔디’ 동요는
모든 아이들이 제일 좋아했던 노래로 어제는 출력하여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우리들 노래소리 하늘에 퍼져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면은
모두 다 일어나 손을 흔들며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참 아름다운, 동심이 물씬 풍기는 동요입니다.
예전에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참 아이들보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때 80명의 반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하나하나가 보물처럼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오랜된 미래'의 장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어제 신문기사중 인상적인 두 내용의 글을 소개합니다.
-“어린이가 없는 마을은 텅 빈 우물과 같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충격이었습니다.
텅 빈 우물 같은 마을은 날로 늘어가는 오늘날 추세입니다.
“모두가 늙는다.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된 세상에 단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모두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노화는 꽃피고 열매 열리면 낙엽 지는 거지’라고 쉽게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체감하는 노화는 쌓이는 시간의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방심한 사이 어느 순간 이뤄지는 종의 전환에 가깝다.”-
참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얼마나 귀한 참 보물인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어린이가 없는 마을뿐 아니라 어린이가 없는 학교, 수도자들이 날로 줄어가는 수도원도
텅 빈 우물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외적으로는 좋은 발전처럼 보이는 세상인데 실제 사정은 날로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요즘 참 자주 바오로 수사님이 생각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살아야 참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지 못하면 참으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예전 4세기 사막을 찾았던 수도자들의 소망을 반영하는 기도문입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살게 해주십시오(make us truly alive)”.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 깊이에는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있는 법입니다.
또 하나 30여 년 전 강론 때 인용했던 말마디가 문득 떠오릅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
30까지만 살았고 나머지 40년은 살았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무의미한 반복의 죽음과 같은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참으로 영원한 현역으로 살았다면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웃 사람들을 귀히 여기며 진짜 참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참된 삶, 행복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하루하루 매일, 평생, 끊임없이
시편과 미사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 참된 삶의 모범을 오늘 말씀에서 만납니다.
혼탁한 삶의 와중에서 참 삶의 모범은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과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나머지 헤로데를 비롯한 악의 무리와의 대조가 극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출현에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헤로데의 말은 심중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이 없기에 우유부단한 무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이 없는 무지의 삶이 바로 악임을 깨닫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을 통해 참 의로운 참된 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인상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분명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 중심의 참삶을 살려는 각오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 역시 하느님 중심의 참 삶의 모범입니다.
이미 생사를 넘어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에 올인한 삶처럼 보입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참된 삶을 촉구하는 예레미야의 충언에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예언자의 말에 공감하는 대신들과 온 백성들, 그리고 반대편의 무지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이었고
마침내 구사일생 살아 난 예언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참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저절로 하느님의 중심의 참된 삶으로 변모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연옥 같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변질되지 않고 천국의 순수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의 참 보물인 성인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늘은 성 알폰소 축일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헤아려 보니 그 옛날에 91세 장수를 누렸네요.
이렇게 장수의 나이까지 사시다가 성인의 되셨으니 놀랍습니다.
성 알폰소는 18세기 가장 유명한 성인 가운데 한분으로,
주교이며 교회 박사이셨고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의 설립자였습니다.
성인은 윤리신학자들과 고해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고해 사제들에게 참회성사를 집전할 때는
뉘우치는 아들을 언제나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품어 안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이 참으로 강조하신 것은 단 하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다 해도 하느님께서 풍요로우십니다.”
성인의 말씀에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부연 설명합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근본적인 관계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곧 날마다 드리는 기도와 성사생활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경험했을 때, 그 원인을 외부의 어떤 사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건의 결과로 자신이 기쁘다든지, 화가 났다든지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대학에 합격하면 기쁘고, 떨어지면 우울하다. 회사에서 승진하면 기쁘고, 승진에서 탈락하면 슬프다.’
당연합니까? 당연하게 보이는 인과 관계이지만
사실 사건을 바라보는 자기 생각과 신념이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최종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는 어떨까요?
지금의 점수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어서 하향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합격했어도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 때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게 되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면, 실망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두려워합니다.
헤로데는 목 베어 죽인 요한이 되살아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엘리야의 영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부활했기에 더욱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이라면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불합리한 생각이었고,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꾸짖는 세례자 요한만 없어지면 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맹세를 거두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생각 등으로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역사상 잊히지 않는 큰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니 임금의 분노를 사는 편을 택했지요.
헤로데는 맹세를 깨뜨리는 것과 손님들의 눈을 겁냈지만,
사실 이보다 훨씬 무서운 하느님을 겁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바로 하느님 편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백처럼,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예레 26,15)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선포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8)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며,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고,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마치,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 14,8)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6년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군 생활은 내무반 생활이 중요합니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내무반의 질서와 군기를 주도하는 상병,
실질적으로 내무반의 일을 실행하는 일병, 이제 막 내무반으로 온 이등병입니다.
제게 내무반은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신발을 정리하고, 맨 구석에서 눈치를 보면서 지냈습니다.
일도 일머리를 알아야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리모컨이 있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TV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1986년에는 86 아시안 게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담배를 피우던 병장이 ‘채널 좀 돌려봐라.’라고 말하였고, 저는 뛰다시피 가서 채널을 돌렸습니다.
채널을 볼 수 있는 주도권은 병장에게 있었습니다. 병장의 관심사에 따라서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던 축구경기는 함께 보았고, 늦은 시간이라도 일직하사가 눈감아 주었습니다.
돌아보니 아득한 추억입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사회는 무선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이 무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빨간색 공중전화, 동전을 넣고 통화하던 공중전화는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공중전화 때문에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스마트폰은 이제 움직이는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은행업무, 쇼핑, 예약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임기도 되었습니다.
저도 스마트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줌으로 화상회의도 하였습니다.
무선으로 연결되는 것 중에는 블루투스가 있습니다.
컴퓨터, 스피커, 자동차, 스마트폰을 연결해 주는 기능입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사회(Uncontact Society)가 가속화 될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비대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입자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파동으로 된 세상에서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입자는 서로 연결되어야만 형체를 이루고, 변화되고, 생성합니다.
원자, 세포, 조직은 이렇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파동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에너지라고 하고, 기(氣)라고 합니다.
태양은 입자가 아니어도 에너지를 지구에 보내고 있습니다. 파동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무선으로 연결되는 전기는 파동으로 전해집니다.
신앙 안에서 비대면 사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에너지가, 하느님의 기운이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도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은 조용해졌습니다.
말씀으로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귀머거리는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물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의 힘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표징을 당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옳은 일을 하였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의 힘에 의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고,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
세례자 요한 이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는 어리석을 수 있고, 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하였던 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은 그분들의 피와 땀으로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분들의 순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었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분노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력은 지금 모두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교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속상하고,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려하면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 사랑과 평화만이 나를 참된 안식에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마태 14, 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시작한
알폰소 성인의 축일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통해
교회의 역할을
다시금 고민하게 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복음의 아름다운 꽃입니다.
삶의
가장 큰 기쁨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중의 기쁨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 기쁨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길이
실은
서로를 살리는 길입니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인
실패와 좌절까지
은총의 길임을 다시 보여줍니다.
은총은
집착하지 않는
떠남의 여정이며
자아를 벗어나는
복음의 여정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이
새롭고 구체적으로
이 시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삶의 중심이
언제나
하느님께 있는
삶의 기쁨입니다.
삶은
하느님을 향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안으로
사랑이 되시어 오십니다.
사랑의 참된 기쁨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의 기쁨을
기쁘게 만납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과 기쁨을
가장 낮은 곳에서
되찾는
새로운 날 되십시오.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의 반응이고,
두 번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인식한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죽은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난다." 는 말 안에서
헤로데의 부활 신앙을 볼 수 있다.
헤로데는 에수님을 세례자 요한으로 오해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은
마르코 6, 17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가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부친, 헤로데 대왕과
왕비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이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과 왕비 마리암네 1세 사이에 태어난
이복동생 아리스토불로스의 딸이다.
헤로디아는 숙부인 헤로데 필리포스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 2세를 낳았으나 이혼하고,
또 다른 숙부 헤로데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해왔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런 요한을 죽이려 했으나
군중이 두려워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군중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위기 20, 21을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짓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규정이 나오고,
레위기 18장에서는
이런 근친상간의 성관계를 엄격히 단죄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나 헤로디아의 결혼이
유대법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옳지 않다고 책망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 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생일날,
공주 살로메의 춤바람과
헤로디아의 부추김으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다.
헤로데는 왕으로써 자기 생일날, 나라의 경축일에
죄인에게 사면을 해주는 특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말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결백한 사람을 석방시키지 않고
죽이는 행동을 한다.
복음사가는 정치인들이 헛맹세와 체면 때문에
의인의 생명을 경시하고 죽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둠의 세력은 어리석고 비겁한 행동을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처럼
헤로데의 정권을 위태롭게 하거나
헤로데의 잘못된 사생활을 지적하면,
헤로데가 의인 세례자 요한을 죽이듯이
예수님을 빌라도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예고해 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 또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어둠의 세력에 동조하거나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여 내 몸을 도사려 행동하지 않거나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침묵으로
어둠에 동조하는 일은 없는지
잘 살피는 하루가 되어야겠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