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세상에 저보다 비참한 여자는 없다 생각했어요. 고아 출신에 흑인 혼혈이란 딱지는 미국 사회 적응을 어렵게 했고, 열일곱에 도피하듯 만난 남편에겐 맞는 게 일이었죠. 삶을 끝내려던 순간, 배고프다 우는 아이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또 버림받게 할 수 없다' 새로 태어나자 생각했죠."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차이나 로빈슨(57·한국 이름 이영숙)은 두 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흑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낯설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패션계에선 상당한 실력자로 꼽힌다. 미국을 대표하는 톱 모델 샤넬 이만(23)의 어머니이자 매니저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직접 모델로 나서는가 하면, 딸과 함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해왔다. 딸 샤넬 이만은 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선 캠프의 유력 인사로, 재선 기금 모금 행사를 열고 지지 연설을 하는 등 모델뿐만 아니라 사회활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두 모녀는 지난 9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의회흑인지도자재단(CBCF) 연차총회에 연설자로 나서기도 했다.
최근 전화로 만난 차이나 로빈슨은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걸 오히려 당당하게 내세워 강점으로 만들자고 생각했더니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말했다. 그 출발은 '개명(改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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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을 대표하는 톱 모델 샤넬 이만의 어머니 차이나 로빈슨은“모두 약점이라 치부했던 내 피부색과 인종을 원망하는 대신‘나 같은 이의 대표자가 되자’고 생각했더니 삶이 찬란해졌다”고 말했다. / 차이나 로빈슨 제공 < dd>
"어린 시절 아이들은 제게 눈을 확 찢어 보이고는 '칭총 차이나(서양에서 동양을 비하할 때 쓰는 말)'라며 비웃고 때리고 괴롭혔죠.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했어요. 백인한테는 물론이고 흑인, 심지어 동양인들도 저와 거리를 뒀어요. 인생 최악이라고 생각됐던 순간 이상하게 오기가 들었어요. 스무 살 때 첫 번째 남편과 이혼을 결정한 뒤 미셸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버리고 아이들이 그토록 놀리던 '차이나'로 이름을 바꿨죠. 차이나가 그간 괴롭힘의 상징이었지만, 나 스스로 이걸 긍정적인 상징으로 바꾸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름을 바꾸면서 자신처럼 고통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대변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자꾸 몰입하고 거기에 압도돼 살았는데, 오히려 그게 저를 못나게 만들더군요. 그날부터 매일 아침 저를 향해 외쳤어요. '넌 재능 있고, 매력적이고, 성격도 좋아.' 단점만 생각하다 보면 단점만 커 보이기 마련인데, 장점을 찾아 그걸 계속 발전시키다 보면 어느새 눈에 그렇게 커 보이던 단점도 장점에 가려지게 되더군요."
생각이 바뀌니 태도와 목소리가 바뀌었다. 눈물과 분노, 피해의식으로 찌들었던 얼굴이 미소로 뒤덮였다. 세탁소, 식당 종업원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학에도 입학했다. '뭔들 못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힘들어도 웃었다. "그간 수동적으로만 살다가 처음으로 제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됐어요. 진짜 '나'를 찾은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미소가 아름답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미국 항공사에 스튜어디스로 합격했다. 특유의 상냥함이 장기였다. 우수 사원으로도 뽑혔다. "상냥하면서도 억척스러운 한국인의 DNA가 제 핏줄에 녹아있었나 봐요. 애 업고 학교 다니고 각종 아르바이트 하면서 돈도 벌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힘이 우리 시대 한국 엄마 그대로였던 거 같아요, 하하."
첫 남편 사이의 두 아이를 데리고 살면서 서른 즈음 재혼도 했다. 틈틈이 상담사 공부도 했다. "난 항상 내가 섞인 인종(아프리칸 아메리칸 아시안)으로서 고통을 감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주변에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을 지닌 사람이 꽤 많은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고통받는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마음을 열어보면 자기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는 걸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사람들을 통해 극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상담사 역할을 하면서 그녀가 배운 게 또 있다. 바로 '용서'였다. 모든 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마지막까지 극복하기 힘든 게 있었다. 자신을 버린 친부모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스스로의 상처도 어느새 아물고 있었다. "몇년 전 한국의 인순이라는 흑인 혼혈 가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녀가 삶을 극복해간 이야기는 제게 정말 큰 감명을 줬죠."
그 길로 친어머니 소재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었던 보육원이 이미 불타 없어져 친어머니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입양될 당시 얼마나 많은 전쟁고아가 길에 버려지고, 굶어 죽고, 고통받았는지를 들었어요. 엄마가 날 보육원에 맡긴 게 '날 살리기 위해서였구나'라고 생각하고 보니 마음의 평화 같은 걸 얻게 됐죠. "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샤넬 이만은 그녀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됐다. 샤넬이란 이름은 그 유명한 샤넬에서 따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디자이너이자, 여성을 답답한 코르셋에서 해방시켜 '여성해방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코코 샤넬처럼 딸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으로 커 주길 바라는 그녀의 바람을 담았다. 샤넬 이만은 열세 살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계에 데뷔했다. 마크 제이콥스·돌체앤가바나·발렌티노 등의 유명 패션쇼 메인 무대를 석권하며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매혹적'인 외모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전화로 딸의 이야기를 하던 차이나 로빈슨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세상에나 정말 신기하죠? 제가 한국에서 입양된 전쟁고아 출신 혼혈이란 걸 처음 알았던 게 열세 살 때였어요. 제 핏줄과 외모 때문에 가장 좌절하고 가장 핍박받았던 시기였죠. 그런데 딱 바로 그 나이에 제 딸은 세상으로부터 더할 나위 없는 환영을 받았어요. 제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과 맞섰기에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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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 로빈슨의 딸이자 톱 모델인 샤넬 이만(왼쪽)이 어머니의 품에서 활짝 웃고 있다. / 차이나 로빈슨 제공 < dd>
엄마는 때로는 딸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벽한 보디가드가 돼 딸을 지켰다. "제 딸아이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어디든 함께 다니고, 아이가 자칫 이상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밀착 방어해온 걸 보면 한국 엄마가 맞긴 맞나 봐요, 하하."
누가 모녀 아니랄까 봐 딸은 엄마 차이나 로빈슨의 성격을 빼다박았다. 딸 샤넬 이만은 엄마 못지않게 당찼다. 보수적인 패션계에서 자칫 '왕따'가 되거나 아예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지만 샤넬 이만은 용기를 냈다.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나서는 샤넬 이만의 목소리는 영국 더 타임스, 미 CNN 등을 장식했다. 다수 언론은 그녀를 '또 다른 샤넬'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다양성의 상징' '다양성의 옹호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샤넬 이만은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놀림을 받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인종이 바뀌는 게 아닌 이상 네 인종의 대표가 돼라'고 조언하셨죠. 이는 세상의 부정적인 시각에 맞서고 버틸 수 있는 든든한 뼈대가 됐습니다. 흑인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모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딸의 말을 듣던 어머니 차이나 로빈슨이 말을 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는데 백조였어요. 죽어 없어질 수도 있었던 혼혈 고아가 50년 뒤 이렇게 패션계 중심에 선 딸을 두고, 유색인종의 대변인이 되고, 주위의 관심을 받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의 이야기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버려지고, 또 버려야 했던 많은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랍니다."
첫댓글 오늘 아침 조선일보 기사인데 물론 이미 읽은 탱이들도 있겠지만 한번 더 읽어 보고 또 한번 짜릿한 감동에 가슴을 적셔 보시기 바랍니다. 이 아줌마 이름이 내 마누라 이름과 똑 같고 용모도 비슷하게 생겼다? 물론 내 마누라가 쪼끔 더 이쁘지만.....
쉽지않은 인간승리 스토리네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누라 피.알을 하는 이동재영감는 실로 영리하네요. 피할것은 피하고 알릴것은 알리라는 뜻의 PR인데 앞으로 이영숙씨 찾는 전화등쌀에 신경 좀 쓰이겠수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