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유배지
영월 청령포
국내 메이저신문 중 첫 번째라는 J일보 주말 부록에 ‘영월관광’기사가 2바닥이나 실렸다. 가만히 있는 영월을 신문에서 기사로 실어줄 리는 없을 터이니 해당 군청의 숨은 노력이 읽혔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유명 관광지들이 거의 폐쇄될 지경에 이르자 손님을 불러들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모양이었다. 단종 유배지로 알려진 영월이고 보니 자연스레 ‘셀프 유배지’란 이름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스스로 거리를 두며 유배처럼 한적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영월이라는 뜻이다. 기사를 읽자니 어쩌다 우리 인간들이 그 미미한 바이러스에 무릎을 꿇고 이 지경까지 왔나 싶어 서글픔이 밀려왔다.
2015년 말 국내에서 기업하기 가장 좋은 기초단체에 영월이 뽑혔던 것을 기억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228개 지자체의 기업을 조사 분석한 결과 영월이 ‘기업전담 마크제’를 시행하여 주관적 만족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던 것. 이처럼 영월이 최고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기업에 대한 밀착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영월군 관내 1100개 기업의 인허가 지원에 공무원 6명을 전담 배치하여 기업 측에서 수시로 상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기업을 살려야만 일자리도 늘어나고 세금수입도 증대되어 주민들이 원하는 복지정책도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을 터이니 영월은 도약했을 터이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영월을 처음 만난 건 직장을 떠나온 직후였다. 전기안전대행업을 하는 학교동창은 부인과 함께 내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무실을 비우면서까지 평일에 우리 부부를 차에 태우고 영월을 향해 달렸다. 그는 내가 미안해 할까봐 변화된 본인 삶의 방식을 미리 털어놓았다. 주말이나 공휴일이 아니라도 부부가 간단한 취사도구와 식재료를 차에 싣고 이삼 일씩 국내 여행지를 찾아다닌 게 벌써 3년째라는 것. 자신의 형편에 맞게 명승지를 돌면서 알뜰여행을 하다보니 건강도 전보다 많이 좋아지더라고 했다.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아 난 그때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었다.
30여 년 전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세무공무원은 퇴직하면 신라의 고도 경주에 가서 살 거라고 했었다. 혹시 경주가 고향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타지를 아직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고 했었다. 요즘 은퇴하는 직장 후배들 중에서도 제주도로 삶의 거처를 아예 옮겨 인생2막을 시작하는 걸 가끔씩 보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호하는 주거지를 새로 찾아서 떠나는 이들의 혜안과 용기에 부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나도 직장 떠나온 20여 년 전에라도 그 무렵 막 체험했던 영월로 보따리를 싸서 삶의 둥지를 옮겼더라면 '셀프 유배지' 비경쯤은 그동안 맘껏 누리며 살지 않았을까 싶다.
동창 친구는 영월에 당도하자 전주이씨 왕족 후손답게 단종의 무덤이 있는 장릉으로 먼저 우리를 데리고 갔었다. 매서운 눈바람이 차갑게 몸속을 파고드는데도 그는 우리 부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단종 유배지 청령포는 끝내 들르지 못한 채 영월여행은 끝나고 말았다. 청령포는 그 몇 년 뒤 직장 은퇴자 단체에서 3백여 명 회원들이 찾을 때 끼어서 첫발을 디뎠다. 어소가 자리했던 청령포는 동남북 3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은 육육봉 험준한 암벽이 가로막혀 섬이나 다름없었다. 매년 봄가을로 탐방행사를 갖는데도 일행은 여느 명승지와는 달리 청령포에서 엄숙한 표정들이었다.
영월을 찾는 사람이라면 결코 단종을 외면할 수는 없을 터이다. 영월 자체가 사실 숙부에게 목숨을 잃은 어린 단종을 기리는 거대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단종이 살아서 영월에 머문 기간은 불과 넉 달 남짓하지만 단종 이전과 이후의 영월은 확연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월 곳곳을 둘러보노라면 단종 유적 대부분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단종 채취가 담긴 유적은 무덤인 장릉과 절해고도의 유배지인 청령포, 목숨이 끊어진 현장 관풍헌 정도로 이 세 곳은 중간을 흐르는 강만 없다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짧은 시간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몇 년 전 영월이 고향인 직장 때 선배가 주선하여 고향을 찾아가는 4명그룹에 내가 낀 건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선배의 영월공고 대선배인 원로와 준공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영월태양광을 주도하던 J박사가 함께 했지만 나는 영월이 무연고인데도 초청을 받았던 것. 여행을 주도한 선배가 차를 몰면서 영월에 도착하기 전 찾아갈 코스와 여행지 내력을 미리 알려주었다. 선배 덕분에 청령포를 둘러보고 나와서도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왕방연 시조비까지 만나게 되었다. 선배는 퇴직 후 재취업해서 산업재해로 생긴 난청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초청한 우리와의 소통도 힘들어 했었다.
선배는 영월에 당도하자 우리 일행을 이끌고 가장 먼저 초등학교 동창 집을 찾아갔다. 태양광발전 관계자들까지 합류하여 인원이 제법 많았는데도 맛깔난 향토음식으로 푸짐하게 미각을 감동시킨 동창생에 대한 찬사는 그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었다. 고향 영월을 떠나온 지 반세기가 넘었을 터이지만 선배는 성장기 친구들과 여전히 끈끈한 정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때 이미 팔순에 이른 선배 친구들은 만찬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랄 적 추억을 하나하나 들추는 정담을 나눴다. 선배 고향 친구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가 원주에서 군 생활하던 때를 떠올리게 했고 술자리는 이슥한 밤까지 이어졌었다.
현직 때였던 1960년대 초반 이미 관리자로 영월화력발전소에 몸담아 근무했던 원로선배는 감회가 남달랐을 터인데도 후배들이 묻는 말 외엔 무언으로 일관했다. 뒤에 회사 최고경영자까지 오른 L사장이 선배의 부서에 신입사원으로 와서 함께 근무했다는 일화를 우리가 알고 있었는데도 원로선배는 명상에만 열중했었다. 발전소 방문은 미리 예약을 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깜빡하고 빠트린 탓에 발전소 건너편 고씨동굴 입구에서 카메라에만 전경을 담고 끝냈다. 두꺼운 방한복으로 중무장했지만 영하로 떨어진 산간지역 매서운 한파는 동굴 안까지 따라 들어와 턱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
영월은 원래 태백과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탄광도시였다. 일제 때인 1929년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까지 전국이 부러워하는 도시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었다. 그 당시엔 광부가 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12만 명에 달해 오늘날 4만 인구의 3배가 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월의 황금기를 기억하고 있는 석항역은 삼척탄전지구와 상동광업소로 가는 관문이자 국내 최대의 석탄저장소였으며 당시 검은 진주로 불렸던 석탄이 안겨준 번영의 플랫폼이었다고 선배 친구들은 회고했다. 일찍이 영월에 선배의 모교인 공고가 들어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문인들의 문학기행과 사진가들의 동강 촬영대회에 참여한 것 말고도 영월화력발전소와 태양광발전소를 둘러보느라 몇 차례 더 영월을 찾을 수 있었다. 영월은 탄광지대여서 석탄발전소로 오랜 세월 지역에 전력을 공급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극심한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되어 지금은 기름과 가스를 섞어서 연료로 쓰는 복합발전소로 바뀌었다. 부산에 근무하던 직장 후배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일하고 있어서 두 차례나 초대를 받았고 바뀐 복합발전소 시설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제 그 후배들도 정년을 맞아 영월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추억으로만 발전소를 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올봄엔 선배에게 신세진 것도 갚을 겸 내가 선배를 초대하여 영월을 찾아갈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현존하는 김삿갓' 어른을 비롯해 한시회장까지 영월에서 만날 사람도 미리 꼽아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보다 선배의 부인 병수발이 변수이다. 고왔던 젊은 날의 선배 부인이 떠오른다. 경찰청 강력계에서 은퇴한 유도선수 아버지의 무남독녀였다. 그 아버지는 자신의 회갑연에 하객으로 참석한 우리를 향해 “아이쿠, 우리 아들 친구 분들이 이렇게 친히 찾아주셔서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할는지….”라고 했었다. 당시 변전소에 근무하던 사위를 장인어른이 아들이라고 불렀으니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을까 싶다.
이제 영월 여행은 ‘스스로 결정해서 떠나는 유배’로 불러야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는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 같아 유배 길에서도 거리두기는 필수라 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월을 찾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와 거리를 둔단 말인가. 영월에 당도하면 우선 지난 번 오르려다 옆에서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마대산부터 올라야하리. 유배지에서 무슨 산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강원과 충청을 가르는 산 정상에 서면 동강의 아름다운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산자락에선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도 만날 수 있다. 삿갓 어른을 만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백만 불짜리 웃음소리도 다시 한 번 듣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