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는 아파트가 절간이고 산중이다.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날이 삼십여 년이 된다.
운전을 안 하니 터미널 근처에 터를 잡았고,
나름대로 편리하다가 보니
길들여져서 가끔은 데카르트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람의 왕래가 가장 잦은 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편리함은 골고루 다 누려가면서, 나는
사막 한가운데 못지않은
고적하고 호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만 닫으면 절간이요, 산중인 아파트,
문을 두드려도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없는가 보다고 가는 아파트,
나는 아파트에 경도되어 시골집을 그리워 하지 앟는다.
어떤 때 책에 파묻혀 있을 때는 하루 종일, 깊숙한 산중인양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아파트,
“내가 일찍이 어느 길가에서 임시로 기거할 때에 날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레를, 타고 말을 달리면서 거리를 오락가락하는 자들이 날이 저물도록, 밤이 새도록 떠들어대는 것뿐이다. 나는 탄식하면서 소요부邵堯夫의 시를 외었다.
수레와 말이 오고 가 잠시도 멈추지 않으니,
올 때는 서로 따르는 듯, 갈 때는 서로 다투는 듯,
생각건대 저들은 무슨 일이 있는가?
벼슬 구하는 것 아니면 이름 구함이겠지.
어느 날 저 노상에 물결 밀리듯 다니는 사람들의 떼도 역시 이 시와 더불어 뜻이 같을 것이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畵工을 시켜 이 광경을 그리라 할지라도 이같이 묘하게 그릴 수가 있을까?
사람으로서 산업을 다스리는 것은 기갈을 면하고 춥고 더운 것을 방비할 정도면 또한 넉넉하다고 할 것이다.
좋은 전답이 천만 두렁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 되 곡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큰 집이 천 칸이나 되어도 밤에 누워서 자는 곳은 8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보면 이 어찌 죽은 뒤의 자손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느라고 한평생 노심초사로 이욕利慾에만 급급하게 지낼 것인가?
백향산白香山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경계한 시가 있다.
누에 늙어서 고치를 만들건만 제 몸 가리지 못하고
벌은 굶어가며 꿀 만들어도 남에게 먹히네.
나이 들수록 집 걱정하는 자는
누에와 벌의 헛수고와 무어가 다르리.
이 시야말로 참으로 달관자達觀者로서 천명天命을 아는 자의 말이라 할 것이다. 한 몸뚱이 이외에는 일만 가지 물건이라 하는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니다. 그렇거늘 이 귀중한 몸뚱이를 수고롭게 하여 죽는 날까지 깨끗이 살지 못하는 자들은 홀로 무슨 심정에서 일까?
백향산의 시는 다만 자기 자신을 경계한 시일 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경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홍만종의 지은 <순오지>에 실린 글이다.
오래된 아파트라서 평수는 넓은데 값이 싼 이점이 있고,
그래서 큰 아파트를 사무실처럼 서가처럼 쓰기로 하니
마음이 편한 것이 날아갈 듯 하다.
집이 있으면서도 더 크고 좋은 집을 그리고
더 많은 돈을 원하는 사람들도 지나고 나면 다 헛것이고 돌아갈 때면 모두 다 빈손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 그게 문제로다.
2024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