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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32회
한편, 齊나라 우상(右相) 최저(崔杼)는 장공(莊公)을 시해하고 경공(景公)을 옹립하여, 그 위세가 齊나라를 진동하였다. 좌상(左相) 경봉(慶封)은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즐겨 항상 나라 안에 없었기 때문에, 최저는 혼자 국정을 장악하여 전횡이 점점 심해졌다. 경봉은 최저를 시기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최저는 이전에 당강(棠姜)에게 최명(崔明)을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약속했지만, 장자 최성(崔成)이 팔이 부러졌기 때문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성은 부친의 뜻을 알아채고, 최읍(崔邑)을 식읍으로 주면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최명에게 후사를 양보하겠다고 청하였다. 최저는 허락하였다.
[제126회에, 당강은 최저의 후처이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최명인데, 최저가 후사로 삼겠다고 약속했었다. 최성과 최강은 전처의 아들이다. 제129회에,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할 때 최성은 싸우다가 팔이 부러졌다.]
하지만 동곽언(東郭偃)과 당무구(棠無咎)가 반대하며 말했다.
“최읍은 최씨의 종읍(宗邑)이므로, 반드시 후계자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동곽언은 당강의 오라버니이고, 당무구는 당강의 전남편인 당공(棠公)의 아들이다. 둘 다 최저가 가신으로 삼았었다.]
최저가 최성에게 말했다.
“내가 본래 최읍을 너에게 주려고 했는데, 동곽언과 당무구가 반대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최성이 아우 최강(崔疆)에게 호소하자, 최강이 말했다.
“후사 자리를 양보했는데, 한 읍이 아까워 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동곽언 등이 집안일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형제는 노복(奴僕)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겠습니까?”
최성이 말했다.
“좌상에게 부탁해 보자.”
최성과 최강은 경봉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경봉이 말했다.
“그대들의 부친이 오로지 동곽언과 당무구의 말만 듣고 있으니, 내가 비록 진언하더라도 필시 듣지 않을 것일세. 훗날 저들이 그대들의 부친을 해칠지도 모르는데, 왜 제거하지 않는가?”
최성과 최강이 말했다.
“저희들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만, 힘이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경봉이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세.”
최성과 최강이 돌아간 후, 경봉은 노포별(盧蒲嫳)을 불러 두 사람의 말을 전했다.
[제129회에, 제장공이 신설했던 용작에 속했던 노포계가 제장공이 시해된 후 晉나라로 떠나면서, 아우 노포별에게 최저와 경봉을 잘 섬기면서 복수할 기회를 만들자고 했었다. 노포별은 경봉을 잘 섬겨 그의 가신이 되었다.]
노포별이 말했다.
“최씨 집안의 혼란은 경씨의 이익입니다.”
경봉은 크게 깨달았다.
며칠 후 최성과 최강이 또 와서 동곽언과 당무구을 욕하였다. 경봉이 말했다.
“그대들이 거사하겠다면, 내가 군사를 보내 도와주겠네.”
경봉은 무사 백 명과 병장기들을 내주었다. 최성과 최강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날 밤 최씨 형제는 가병들을 무장시켜 경봉의 무사들과 함께 부친의 집 근처에 매복시켜 놓았다. 동곽언과 당무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문안을 드리기 위해 최저의 집으로 왔는데, 그때 무사들이 뛰쳐나가 두 사람을 죽였다.
최저는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수레를 대령하라고 호령하였다. 하지만 그때 노복들은 이미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마구간에 말을 돌보는 어인(圉人)만 남아 있었다. 최저는 어인에게 수레를 끌고 오게 하여, 어린 동자를 어자로 삼아 경봉을 찾아갔다.
최저가 집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호소하자, 경봉은 아무 것도 모른 척하면서 말했다.
“최씨와 경씨는 성은 다르지만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들들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우상께서 그놈들을 토벌하시겠다면,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최저는 그 말이 진심인 줄 알고 사례하며 말했다.
“만약 그 두 역자(逆子)를 제거하여 최씨 문중이 안정되면, 내가 명(明)으로 하여금 좌상을 부친의 예로써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봉은 가병을 모두 일으키고, 노포별을 불러 그들을 인솔하게 하면서 분부했다.
“여차여차 하라.”
노포별은 명을 받고 가병들을 거느리고 최저의 집으로 갔다. 최성과 최강은, 노포별이 가병들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고, 대문을 닫고 지켰다. 노포별이 말했다.
“저는 좌상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대들을 도우러 온 것이지,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최성이 최강에게 말했다.
“최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닐까?”
최강이 말했다.
“들어오게 하시지요.”
최성이 대문을 열자, 노포별이 들어오면서 가병들도 모두 따라 들어왔다. 최성과 최강은 그들을 막을 수 없어, 노포별에게 물었다.
“좌상께서 어떤 명을 내렸소?”
노포별이 말했다.
“좌상께서는 너희 부친의 호소를 듣고, 너희들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노포별은 가병들에게 호령하였다.
“하수하지 않고 뭣들 하느냐!”
최성과 최강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노포별은 가병들로 하여금 최씨 집안의 모든 재물을 남김없이 노략질하게 하고, 집안을 마구 부수어 버렸다. 당강은 놀라서 방안에서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다만 최명은 바깥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노포별이 최성과 최강의 수급을 수레에 매달고 돌아와 최저에게 복명하였다. 최저는 두 아들의 수급을 보고서, 한편으로 분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슬프기도 하였다. 최저가 노포별에게 물었다.
“내실(內室)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는가?”
노포별이 말했다.
“부인께서는 깊이 잠드셔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최저는 기뻐하며 경봉에게 말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저 어린애가 수레를 모는 데 서투르니, 어자 한 사람만 빌려주십시오.”
노포별이 말했다.
“제가 상국을 위해 수레를 몰겠습니다.”
최저는 경봉에게 재삼 사례하고서, 수레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최저가 집에 당도해 보니,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최저가 집안으로 들어가 곧장 내실로 달려가 보니, 문과 창들이 모두 부서져 있고 방안은 텅 비어 있는데, 당강이 대들보에 매달려 있었다.
최저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노포별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최명을 찾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최저는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며 말했다.
“내가 경봉에게 속아 집을 잃게 되었구나!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최저는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최저에게 닥친 화는 참으로 처참하였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昔日同心起逆戎 예전에는 한마음으로 반역했는데
今朝相軋便相攻 오늘 아침에는 서로 싸우는구나!
莫言崔杼家門慘 최저의 가문이 처참하게 망했다고 말하지 말라.
幾個奸雄得善終 간웅(奸雄)들 중 선종(善終)한 자가 몇이나 있었던가?
최명은 밤중에 몰래 집으로 돌아가, 최저와 당강의 시신을 거두어 관에 담아 나와서, 조상의 무덤 가운데 하나를 파서 그곳에 묻었다. 어인(圉人) 한 사람만 그 일을 도왔을 뿐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일이 끝나자, 최명은 魯나라로 달아났다.
경봉이 제경공(齊景公)에게 아뢰었다.
“최저가 선군을 시해했기 때문에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공은 단지 ‘예’ ‘예’ 할 뿐이었다. 경봉은 그때부터 국정을 혼자 맡았다. 경봉은 齊侯의 명으로 진수무(陳須無)를 齊나라로 불러들였는데, 진수무가 늙었음을 이유로 사퇴하자 그 아들 진무우(陳無宇)로 하여금 부친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때는 주영왕(周靈王) 26년이었다.
[제129회에,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했을 때, 안영이 진수무를 찾아가 신군 옹립을 의논하자고 말하자, 진수무는 사양하고 ‘역적과 함께 조정에 설 수 없다.’고 하면서 송나라로 망명했었다.]
그때 吳나라와 楚나라는 누차 서로 침공하였다. 초강왕(楚康王)은 수군을 양성하여 吳나라를 공격했지만, 吳나라의 방비가 잘 되어 있어, 楚軍은 공을 세우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吳王 여제(餘祭)는 즉위한 지 2년째였는데, 용맹을 좋아하고 생(生)을 가볍게 여겼다. 여제는 楚나라의 침공을 받자 노하여, 상국(相國) 굴호용(屈狐庸)으로 하여금 楚나라의 속국인 서구(舒鳩)를 회유하여 楚나라에 반기를 들게 하였다.
[제130회에, 오왕 제번이 죽고 그 아우 여제가 즉위했었는데,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빨리 물려주기 위해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었다.]
楚나라 영윤 굴건(屈建)이 군대를 일으켜 서구를 정벌하려 하자, 양유기(養繇基)가 선봉을 자청하였다.
[제102회에, 초나라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활을 쏘아 죽인 사람이 바로 신궁(神弓)으로 유명한 양유기였다.]
굴건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이제 늙으셨습니다. 서구는 아주 작은 나라이니, 어찌 승전하지 못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유기가 말했다.
“楚나라가 서구를 정벌하면, 필시 吳나라가 구원하러 올 것이오. 나는 吳軍과 여러 번 싸워 보았기 때문에 그 실정을 잘 알고 있소. 내가 이번에 참전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오.”
굴건은 양유기가 ‘死’ 字를 꺼내자, 슬픈 마음이 들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양유기가 또 말했다.
“나는 선왕으로부터 지우(知遇)을 받아, 항상 보국(報國)하고자 했는데,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소. 이제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하얗게 새버렸는데, 이러다 어느 날 창 아래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면, 영윤이 내 소원을 저버리는 것이오.”
[‘지우(知遇)는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해 주는 것이다.]
굴건은 그의 결심이 이미 굳은 것을 보고 마침내 허락하고, 대부 식환(息桓)으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
양유기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성(離城)에 당도하자, 吳王의 아우 이매(夷昧)가 상국 굴호용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식환이 楚나라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말하자, 양유기가 말했다.
“吳나라 사람들은 수전(水戰)에는 능하지만, 지금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왔소. 궁술과 병거 전투에는 능하지 못하니, 저들이 아직 진영을 갖추기 전에 급습하는 것이 좋겠소.”
양유기는 활을 들고 군사들보다 앞장서서 달려 나가 활을 쏘았다. 그가 활을 쏘는 대로 吳軍 병사들은 맞고 쓰러졌다. 吳軍은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양유기는 추격하다가 병거를 타고 오던 굴호용과 마주쳤다. 양유기가 굴호용을 꾸짖었다.
“나라를 배반한 역적아! 감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굴호용은 굴무(屈巫)의 아들이다. 제113회에, 초나라 대부 굴무는 하희(夏姬)를 데리고 晉나라로 가서 이름을 무신(巫臣)으로 고쳤으며, 晉나라로 하여금 오나라와 우호를 맺게 하고 병거로 싸우는 법을 오나라에 가르쳐 주었다. 무신의 아들 호용은 오나라에서 벼슬을 하였고, 부친 무신이 죽은 후 다시 굴씨 성으로 돌아갔다.]
양유기가 활을 들어 쏘려고 하자, 굴호용은 병거를 돌려 달아났는데 마치 바람처럼 재빨랐다. 양유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吳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병거를 잘 몬단 말인가? 빨리 쏘지 않은 것이 한이로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사면에서 吳나라의 철엽거(鐵葉車)가 나타나 양유기를 포위하였다. 철엽거를 타고 있는 군사들은 모두 강남(江南)의 사수(射手)들이었다. 만 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자, 양유기는 어지럽게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일찍이 초공왕(楚共王)이, 자신의 무예만 믿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오늘 그 말이 들어맞은 것이다.
[제116회에, 양유기와 반당이 궁술 시합을 했을 때, 초공왕이 노하여 “장수는 지모(智謀)로써 승전해야지, 어찌 화살 한 대로 요행을 바란단 말이오? 그대들이 그런 재주만 믿고 있다가는 훗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고 말했었다.]
식환이 패군을 수습하고 돌아와 보고하자, 굴건이 탄식하며 말했다.
“양숙(養叔)의 죽음은 스스로 취한 것이다!”
굴건은 서산(栖山)에 정예병을 매복시키고, 별장(別將) 자강(子疆)에게 吳軍을 유인하라고 은밀히 명하였다. 자강이 10여 합 만에 달아나자, 굴호용은 복병을 염려하여 추격하지 않았다.
이매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더니, 楚軍이 보이지 않자 말했다.
“楚軍은 이미 도망쳤다!”
이매가 楚軍을 추격하여 서산 아래에 이르자, 달아나던 자강이 방향을 바꿔 공격하고 복병이 모두 일어나 이매를 포위하였다. 吳軍이 돌격하였으나 포위를 뚫을 수가 없었다. 그때 굴호용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楚軍을 물리치고 이매를 구출하였다. 吳軍은 패전하여 돌아갔고, 굴건은 서구를 멸망시켰다.
다음 해, 초강왕(楚康王)은 다시 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秦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진경공(秦景公)은 아우 공자 침(鍼)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楚나라를 돕게 하였다. 하지만 吳나라의 많은 병력이 강어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楚軍은 吳나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鄭나라가 오랫동안 晉나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楚軍은 방향을 바꿔 鄭나라를 침공하였다. 楚나라 대부 천봉술(穿封戍)는 鄭나라 진영을 공격하여 鄭나라 장수 황힐(皇頡)을 사로잡았다. 공자 위(圍)가 황힐을 빼앗으려 하자, 천봉술은 내주지 않았다.
공자 위가 도리어 초강왕에게 호소하였다.
“제가 황힐을 사로잡았는데, 천봉술이 빼앗아갔습니다.”
잠시 후, 천봉술이 황힐을 끌고 와서 공을 청하면서, 공자 위가 황힐을 빼앗아가려 했다고 호소하였다. 강왕은 판결을 내릴 수가 없어 태재 백주리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였다. 백주리가 아뢰었다.
“鄭나라 포로는 미천한 자가 아니라 대부이니, 포로에게 물어보면 스스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힐을 마당에 세워 놓고, 백주리는 오른쪽에, 공자 위와 천봉술은 왼쪽에 섰다. 백주리가 손을 위로 들고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은 왕자 위인데, 과군의 아우이시다.”
백주리는 다시 손을 아래로 들고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은 천봉술인데, 방성(方城)의 한 고을 다스리는 현윤(縣尹)이다. 누가 너를 사로잡았는지, 사실대로 말하라!”
황힐은, 백주리가 왕자 위를 편들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채고,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왕자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저 왕자 분과 싸우다가 패하여 사로잡혔습니다.”
천봉술이 크게 노하여 시렁에서 창을 하나 꺼내 공자 위를 죽이려고 하자, 위는 깜짝 놀라 달아났다. 천봉술이 뒤쫓아 갔으나 붙잡지 못하였다. 백주리가 쫓아와서 두 사람을 달래서 데리고 돌아왔다. 백주리가 강왕에게 말하여, 공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화해시켰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사로운 정 때문에 왜곡하여 비호하는 것’을 ‘상하기수(上下其手)’라고 하는데, 이 백주리의 일에서 비롯되었다.
[‘상하기수(上下其手)’는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는 뜻으로, 사사로운 인정이나 권세 때문에 시비(是非)를 뒤바뀌게 만든다는 말로 사용한다.]
후인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斬擒功績辨虛真 적장을 참하거나 사로잡은 공적은 진위를 가려야 하는데
私用機門媚貴臣 은밀히 귀천을 알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아첨했도다.
幕府計功多類此 군부(軍府)의 공적이 이처럼 이루어진 바가 많았으니
肯持公道是何人 세상에 그 누가 기꺼이 공도(公道)를 지키려 했겠는가?
한편, 吳나라의 이웃나라인 越나라는 왕실의 작위가 자작(子爵)이었는데,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로서 무여(無余)가 처음 이곳에 봉해진 후 夏나라부터 周나라에 이르기까지 30여 대를 지나 윤상(允常)에 이르게 되었다. 윤상은 나라를 잘 다스려, 越나라는 이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吳나라는 越나라를 꺼려하여, 여제(餘祭)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군대를 일으켜 越나라를 정벌하였다. 여제는 越나라 종인(宗人)을 사로잡아 그 발을 자르고 여황(餘皇)이라는 큰 배를 지키게 하였다.
[‘종인(宗人)’은 예악과 제사를 맡아보는 관직으로, 주나라의 종백(宗伯)에 해당한다.]
여제가 배를 타고 놀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종인이 여제의 패검을 끌러 여제를 찔러 죽였다. 여제의 종자들이 깨어나 종인을 죽였다. 여제의 아우 이매(夷昧)가 뒤를 이어 즉위하고, 국정을 계찰(季札)에게 맡겼다.
[제121회에, 吳王 수몽이 임종 때 제번·여제·이매·계찰 네 아들 중 가장 현명한 막내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아우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유언했었다. 제130회에, 제번이 죽고 여제가 즉위했었는데, 이제 이매가 즉위하였다.]
계찰이 전쟁을 멈추고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원의 제후국들과 우호를 맺으라고 청하자, 이매는 그 말에 따라 계찰을 魯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계찰이 삼대(三代)와 열국의 음악을 듣고 일일이 품평을 했는데 아주 정확하였다. 魯나라 사람들은 그가 음악을 잘 안다고 인정하였다.
계찰은 齊나라로 가서 안영(晏嬰)과 친교를 맺고, 鄭나라로 가서 공손 교(僑)과 친교를 맺고, 衛나라로 가서 거원(蘧瑗)과 친교를 맺었으며, 晉나라로 가서 조무(趙武)·한기(韓起)·위서(魏舒)와 친교를 맺었다. 그가 친교를 맺은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현신(賢臣)들이었으니, 계찰의 현명함도 역시 알 수 있다.
[안영은 제124회에 처음 등장했는데, 제장공(齊莊公)으로 하여금 晉나라와 동맹을 맺게 했었다. 그 후 최저와 경봉에 의해 나라가 혼란했을 때 항상 소신껏 조정을 지켜 왔다. 공손 교는 字가 자산(子產)이며, 제121회에 정나라에서 위지(尉止)가 난을 일으켰을 때 처음 등장했었다. 후에 정나라 재상이 되어 국정을 바로잡게 된다. 거원의 字는 백옥(伯玉)이며, 孔子가 칭찬했던 현인이다. 제122회에 손림보가 위헌공(衛獻公)을 축출하는 거사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때 노나라로 떠났었고, 제130회에 영희가 위헌공을 복위시키는 일에 가담하라고 했을 때에도 노나라로 떠났었다. 조무는 조돈의 손자이고 조삭의 아들로서, 도안가가 조삭을 죽였을 때 공손 저구와 정영의 충의 덕분에 살아남았고, 제128회에 범개가 사퇴하자 뒤를 이어 중군원수가 되었다. 한기는 한궐의 아들이며, 형 한무기와 함께 제127회에 난영의 변란 때 공을 세웠다. 후에 중군원수가 된다. 위서는 제127회에 난영의 변란 때 처음에는 난영과 같은 도당이었으나 결국 범개의 편에 서서 공을 세웠다. 후에 재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