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2,11-19
그 무렵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역할의 차이
‘금쪽같은 내 새끼 92화 강압적인 아빠와 숨 막히는 3남매’에 나온 사연입니다. 이번 가족은 재혼 가족인데, 가족 구성은 5남매와 뱃속에 1명으로, 이미 자녀가 셋인 상황에서 재혼 후 2명을 더 낳았고, 1명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20살 1호 금쪽이, 19살 2호 금쪽이, 17살 3호 금쪽이 3남매는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반면에 아빠는 출산을 앞둔 엄마를 위해 6살 4호 금쪽이, 4살 5호 금쪽이들을 돌봐주고 엄마를 돕길 원하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방송 내내 아빠는 강압적인 태도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녀들을 억압했습니다. 아빠가 퇴근할 때 집에 자녀들이 없으면, 바로 전화로 소집 명령이 떨어집니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대화할 때 역시 아빠의 눈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회피합니다. 아빠와 대화할 때 자녀들의 눈빛이 참 슬퍼 보입니다. 자녀들이 아빠와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야기는 이내 극단적인 예시로 향합니다. 김치, 쌀 같이 식량이 떨어져 봐야 알겠냐느니, 돈이 없어서 고생해야 하느니 하는 극단적인 예를 들며 아이들을 압박합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물론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자유롭게만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더 큰 문제는 어머니 역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재혼했기 때문에 이미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훈육을 책임지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욕구는 다른데 행동만 바르게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는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당신을 따름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욕구’에 더 관련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은 욕망입니다. 당신은 욕망을 없애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탐욕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마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만 만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육아도 어머니와 아버지, 둘의 합작품입니다. 아버지는 행동을 잘하게 만드는 분인데, 먼저 어머니에게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은 잘하지만 기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엄마는 욕구를 죽여줘야 하고 아빠는 행동을 바꿔줘야 합니다. 엄마가 욕구를 죽여주는 방식은 자녀를 위한 피 흘림입니다. 아빠의 피 흘림만으로 자녀의 욕구가 줄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빠는 행동에 관여하고 엄마는 욕구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합쳐져야 완전해집니다.
‘아빠는 훈육하면 안 돼’ VS ‘아이 문제는 훈육 못 한 엄마 탓!’, 양육 방식 차이로 인한 부부 갈등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 64회’엔 토할 때까지 먹는 예비 초1 남자 금쪽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행동에 대한 단호한 훈육을 엄마가 하고 아빠는 감싸주는 역할만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서 포근함을 얻어 욕망을 절제하고 싶고 아빠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니 욕망도 절제되지 못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엄마 아빠의 역할은 명확해야 합니다.
아빠가 행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아빠의 훈육이란 다름 아닌 ‘모범’입니다. 아이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기력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들 외에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원하고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만나지 않는다면 두 발로 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능력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의 목적지입니다. 계명이 우리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하여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노력과 함께 그리스도를 거쳐야 합니다. 욕구를 버릴 수 있어야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목적으로 가며 순간순간 기쁨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쁨을 느끼려면 어때야 할까요? 먼저 배를 버린 것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겨야 합니다. 욕망이 없어야 합니다.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만났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처럼 따라 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때 비록 물에 빠지기는 해도 나아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담벼락에는 커다랗게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낙서 금지”
워낙 종이나 펜이 귀했기 때문에 담벼락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종이고 그 위에 돌을 연필 삼아 낙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낙서 금지’라는 글이 가장 큰 낙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요. “떠들지 마.”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어쩌면 본인이 더 시끄럽지 않을까요? 또 이런 말도 있지요. “남자는 다 늑대야. 절대로 믿지 마.”라면서 자기만 믿으라고 남자 친구가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본인도 남자면서 말이지요.
이런 역설들 사이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정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정답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3+2=6’이라는 수식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3+2=6’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 경우는 참입니다. ‘거짓이다’라는 문장 하나가 들어가 ‘3+2=6’이라는 수식이 거짓인데도 참이 됩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 안에서 또 많은 역설을 품고 있는 세상 안에서 혼란을 느끼고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세상을 잘 사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멋지고 행복한 삶,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만 잘 지키면 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이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모두 지켜왔다고 예수님께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정말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나고 말지요. 그는 자기의 관점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법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즉,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담긴 주님의 기준을 늘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명약, 그것은 진심에서 나오는 배려이다(메난드로스).
성 비오 10세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