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영
제가 어느 성경 구절을 참되게 소화하고 싶을 때는 대략 이렇게 합니다. 첫째, 성경 본문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냅니다. 이것을 위해 ‘바이블 허브’ 앱에 있는 수십 개의 영어 성경들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고, <원문 대조 성경>에 부록으로 첨부된 헬라어 사전에서 해당 스트롱 번호(단어) 원어의 뜻을 살핍니다. 둘째, 앞 뒤 구절들과 해당 각주 등을 통해 전후 문맥에서 그 본문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파악합니다. 셋째, 설교자들이 해당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 검색을 통해 점검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말씀을 체험할 수 있도록 빛을 주시고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구변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래 말씀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겁내는 영이 아니라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맑은 생각의 영이기 때문입니다(딤후 1:7).
위 본문은 영을 네 부류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이고, 셋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 중에서 특히 ‘사랑의 영’을 많이 묵상하고 누렸지만, 다른 셋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1. 겁내는 영: <개정 개역성경>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과 달리, <표준새번역>은 ‘비겁한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두려워하는’의 원문은 ‘데일리아스’(1169)로서 겁’(cowardice)이라는 뜻이며, 호크마 주석은 이것을 “의기소침해 있거나 비겁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영어 성경은 마음이 아니라 영(spiri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핸리 알포드와 <회복역 신약성경> 각주는 이 ‘영’을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는 사람의 영(요 3:6, 롬 8:16)”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모두를 요약하면, 여기서의 겁내는 영은 어떤 소극적인 외적 환경 때문에 <위축되어 있는 사람의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인인 데모데가 처한 그 당시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2. 능력의 영: 이것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되도록 우리의 의지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이런 방면의 영은 많은 분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3. 사랑의 영: 이것은 우리 영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 아가페(26)가 우리의 감정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4. 맑은 생각의 영: <킹제임스 성경>이 이것을 ‘건전한 생각의 영’으로 번역한 것과 달리, 많은 영어와 한글 성경들은 이것을 ‘근신’ 혹은 ‘절제’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M.R. Vine은 ‘절제’보다 ‘건전한 생각’이 더 ‘소프흐로니스모스’(4995)라는 원어에 더 가깝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참고로 <회복역 성경> 각주는 유사한 헬라어가 쓰인 “(젊은 여자를) 훈련시켜”(4994, 딛 2:4)에 대해, “헬라어로는 ‘신중한 생각, 곧 건전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 … 그러므로 이것은 건전한 판단과 분별력을 훈련하고 개발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주 예수님만이 이런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따라서 위 ‘젊은 여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고전 2:16).
이제 제가 위 네 종류의 영 중에서 ‘사랑의 영’에 대해서 묵상하고 누렸던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는데, 왜 주변에서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영’을 살아내는 이들을 보기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해당 원문이 ‘마음’이 아니라 ‘영’ 임을 확인했을 때 금방 풀렸습니다. 즉 이 사랑의 영은 우리의 영 안에는 주어졌지만 아직 많은 이들의 천연적인 혼 안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참된 자기 부인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마음은 사람의 양심에 혼을 구성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더해진 개념입니다.
둘째, 고린도전서 13장에 열거된 신성한 사랑의 열 다섯 방면은 사실 주님 자신이며, 이 주님은 지금 우리 거듭난 영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혼을 통해 나타나려면 조건이 필요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 믿음-미덕-지식-자제-인내-경건-형제사랑 후에 오는 아가페 사랑이 나타나려면 영적인 생명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 1:5-7). 2) 또한 주님께서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의 계명들을 지킬 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요 15:10-11).
셋째, 이 사랑의 영이 우리 영 안에 주어졌지만(7절), “부채질하여 불타오르게”(6절) 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은 부끄럼이 없이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8절)하는 것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밝아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글을 쓰거나 신언의 말을 하는 부담은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 추구를 통해 그동안의 저의 말과 글에는 아가페의 사랑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책망이 있습니다. 이어서 어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뽐내지 않게 하시고, 무례히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남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을 덮어 주는 것(It covers all things)을 더 배우고 훈련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