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義妓) 강아(江娥)
입하가 지났고 며칠 후면 망종이니 초여름 날씨가 완연하다. 정철 문학관이 있다고 하는 송강 마을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혼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삼송 역에 내리니 마을버스가 연결된다. 마을버스로 30여분 가 내린 곳이 송강 마을이라고 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송강 문학관이 있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문학관 건물은 보이지를 않았다. 문학관의 정체는 의기 관아의 무덤이었던 것 같다.
대로변에 커다란 시비(詩碑)만 있는 ‘송강 시비공원’ 을 지나 야트막한 산속으로 들어서니 초라하지만 아담한 무덤 하나가 나타났고, 무덤 비석에는 ‘의기 강아묘’ 라고 쓰여 있었다. 송강문학관 건물은 눈에 뜨이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정철과 의기 강아의 애틋한 사랑의 역사를 반추(反芻)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묘비 앞 잔디에 앉아 오랜 시간동안 남녀 간의 사랑과 의리라는 걸 생각해 보며 감상에 젖었다.
조선시대 전라도 기녀 진옥(眞玉)은 의기로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가련한 여인 이다.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감영에 있을 때, 노기(老妓)들의 청을 들어 당시 동기(童妓)였던 진옥을 만나게 된다.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자(字)를 따라 진옥은 강아라고 불렸다. 불과 십여세 남짓의 어린 소녀였던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청렴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서방’의 이름을 빌려 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인물로 느꼈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사미인곡’ 등 가사문학을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웠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그를 마음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년 도승지로 임명을 받은 정철은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된다. 떠나가는 정철을 강아는 붙잡을 수도, 쫓아 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강아의 서글픈 마음을 눈치 챈 정철은 작별의 시를 써 주며 그녀를 위로 하였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배롱나무) 곱게 펴/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 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가 담겨있다. 좋은 낭군을 구해서 시집을 가 잘 살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아는 정철을 향한 그리움으로 10년 이라는 긴 세월을 보낸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정철을 만나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를 잊지 못하였다. 기생의 처지로 다른 남자의 유혹을 거부하며 수절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철에 대한 깊은 애모와 여심의 끝에 들려온 소식은, 정철이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 이었다. 강아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작은 발로 삼천리 길을 걸어 강계에 이른 강아는 초라한 초막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정철을 보고 눈앞이 아찔해 진다. 정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강아는 그 앞에 엎드려 울었다. 정철은 당황하여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몰라 본 것이다. 10년전 십여세 안팎의 어린 소녀였으니 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 정치가이자 일세의 문장가인 정철의 유배생활은 몹시 가혹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실의와 비판 속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송강과 강아 두 문인들은 ‘살 송곳’ 과 ‘골풀무’ 라는 남녀 성기를 상징하는 음사시(淫辭詩)를 나누며 뜨거운 정념으로 무르익었다. 그날 이후로 정철의 적소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옆에서 기쁨을 주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생활의 반려자, 혹은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예술적 호흡을 같이 하는 지혜로운 여인 이었다.
정철이 유배지에서 부인 안 씨에게 서신을 보낼 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냈다. 부인 서신 속에서도 강아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 보다는 남편의 적소생활을 위로해 주는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강아 역시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알뜰히 정철을 보살폈다. 누구에게도 찾기 힘든 두 연 인간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애정관계란 영원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은 다시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부인 안 씨는 강아와 함께 서울에 올 것을 정철에게 권했지만, 강아는 끝내 거절 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애틋한 여심이 이루어낸 고귀한 사랑!
그 후 강애는 소심(素心)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입산수도 하다가 송강 묘를 찾아 한평생을 마감했다. 아마 지금도 강계의 땅에는 청산처럼 기대고 산 정철과 강아의 혼이 슬프게 맴돌지도 모르겠다.
묘지 앞에서 일어나 사랑의 슬픔과 인생무상을 느끼며 산길을 걸었다.
첫댓글 진옥이 소심보살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