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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대받는 세대 원문보기 글쓴이: 地坪
◆최고를 향해 도전하라
나는 평생을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다. 30년 전에도 나는 우리만의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한낱 젊은 엔지니어였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겁 없이 도전하는 것, 구것밖에 할 줄 몰랐지만
시대가 바뀌고 기술 수준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소양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 최초로 자동차 엔진 개발에 도전하다
이현순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 1984년 정주영 회장의 스카우트 제의로 GM(제너럴모터스)에서 현대차로 옮긴 첫 날부터
직속상관에게서 "미쓰비시도 만들기 어려운 엔진을 어떻게 만들겟다는 거야?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많지 않은 사람이 사기를 쳐도 정도껏 쳐야지!"라는 말을 들었다.
월급도 GM에 비하면 3분의 1정도 수준이며, 심지어 회사의 엔진 개발 연구소는 건물 시공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부하 다섯 명을 배속받아 고국에서 일을 한번 내보겠다는 젊은 엔지니어의 향후 행보가 캄캄하기만 했다. 하지만 대접을 받으려고 고국행을 결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도전정신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대체 뭘 보고 사기꾼이라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많지 않은 사람이 무슨 재주로 엔진을 개발하겠다는 건가? 엔진 개발이 애들 장난인 줄 아나? 사기를 쳐도 정도껏 쳐야지. 쯧쯧"
엔진 개발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실패하면 그때 가서 얘기하십시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자 상관은 못 마땅한 듯 눈길을 거두면서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먼"
고故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기술의 꽃이자 심장인 엔진을 우리 기술로 개발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에게 자동차 엔진을 함께 개발해 보자고 설득해왔던 것이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처럼, 정 회장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구애가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당시 그는 서울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하면서 엔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갈증이 더했다. 어렵게 외국 논문을 구해서 읽다 보면 한국의 엔진 기술이 걸음마 수준임을 느낄 수 있었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 한국은 좁았다.
한 해에 600명만 선정해 유학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는 공군사관학교를 전역하자 마자 유학을 결심하고 대상 학교를 물색하다가 로켓 엔진의 권위자인 어바인 교수가 재직중인 미국 뉴욕주립대학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어바인 교수 밑에서 비행기 엔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싶었다.
뉴욕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비행기 엔진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인 유학생 신분으로는 쉽지 않았다.
당시 비행기 엔진 연구 비용은 미 국방성에서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웠지만 그는 자동차 엔진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이 선택은 그에게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다.
1980년대는 미국에서 자동차산업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는 많은 자동회사들 중에서 GM에 입사햇다. 이곳에는 박사 연구원이 1,200명이 넘는 세계적인 회사였다.
그가 신형 엔진 연구에 몰두할 당시 한국은 현대자동차가 1976년부터 포니와 스텔라를 출시한 후 엑셀을 미국 시장에 수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포니와 엑셀은 현대의 기술력을 대변하지 못했다.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이나 변속기 등은 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현대자동차는 연간 10만 대 정도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78년부터는 국내 생산을 연간 30만 대로 키울 공장 건설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정치 상황이 현대차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정부 관게자는 외국 제품과 비교해 경쟁력이 뒤쳐지는 분야는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섬유산업 같은 분야는 더 육성하고 기술력이 부족한 자동차산업 같은 분야는 포기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10년 간의 현대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 초기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정주영 회장은 중공업과 자동차산업 중 택일하라는 정부의 강요에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내놓고 현대자동차를 선택했다.
그리고 1983년 9월 현대차는 '신엔진 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이 프로젝트를 맡을 사람을 백방으로 찾아나섰고 현대차는 GM에 근무하던 이현순 연구원을 낙점했다.
'GM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로 가서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
아내와 가족들도 은근히 귀국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는 세계적인 기업 GM의 연구원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보다 이제 막 시작하는 한국의 자동차산업 발전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독자적으로 자동차 엔진을 개발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현대에서 도움을 청하는 손을 잡았다.
적군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회사 내에서 알파엔진이 안 된다는 얘기가 자꾸 흘러나오는데, 어디 해명 좀 해보게"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쓰비시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기술을 전수해주고 로열티를 챙겨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그들의 낡은 기술을 수입해서 쓰기를 바랐다. 당연히 우리의 독자 엔진 개발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미쓰비시가 우리 아군입니까, 적군입니까?" 정 회장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적군이지" 정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실험실에서 연구 중인 그를 정주영 회장이 급히 찾았다. 경기도 용인 마북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현대그룹 본사에 있는 서울 계동까지 급히 달려갔다.
회장실에 들어서자 정주영 회장은 화가 난 얼굴로 그에게 정말 엔진 개발이 가능하냐면서 거짓말은 용납못하겠다는 발언이었다.
정회장이 그에게 내민 서류는 바로 '미쓰비시 답변서'였다. 그들은 현대에서 개발중인 엔진 기술은 난이도가 높아 대량생산이 어렵고 사업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학교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테스트하는 미래 기술로 자동차회사에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울산연구소 책임자가 미쓰비시에 의견을 물어 얻은 답변이었던 것이다. 이를 읽은 회장이 실현가능성도 없는 개발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이 박사, 얼른 가서 실험하시오. 꼭 성공시켜야 하오"
그때 현대차는 엔진이나 변속기 등 핵심 기술은 모두 미쓰비시로부터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현대차 임원들 중에는 그들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정주영 회장은 이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엔진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번은 필요한 부품을 구매하려고 독일 출장을 다녀와보니 그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너무나도 황당했다. '보직 해임'이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현대전자 설립 문제로 무척 바빠서 그의 해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해임은 미쓰비시의 압력 탓이었다. 현대의 엔진 개발을 막고자 친 미쓰비시 임원들에게 압력을 넣어 그런 결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접받을지라도 그는 미쓰비시에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연구소 복도에 책상을 놓고 6개월 동안 1,000편의 논문을 읽었다.
현대전자 설립을 마무리한 정주영 회장이 그의 보직 해임 얘기를 듣고 바로 '엔진개발실장'으로 인사조치를 했다.
이후에도 미쓰비시의 방해는 계속되었다. 미쓰비시 구보 회장은 현대차를 방문해 정 회장에게 자체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반으로 깎아주겠다"는 당근을 내밀었다.
아 사실을 그에게 전하며 정 회장은 "구보 회장이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나한테 제안할 리가 있나?
나는 구보 회장 말을 듣고 이 박사가 설계한 엔진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네. 그러니 열심히 해서 꼭 성공시키게"라고 말했다. 그 후 정 회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하다
"지금 방금 한국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현대자동차에 갔더니 아주 독한 엔지니어가 한 명 있습니다. 모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10년 내에 우리가 현대동차 기술을 배우러 다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기술을 개발하십시오"
이는 미쓰비시 구보 회장이 미스비시 연구소 대강당에서 천 명이 넘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행한 연설이다.
이에 앞서 구보 회장은 마북리 연구소를 방문해 그를 찾아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알파엔진를 구경하고 개발과정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격의없이 서로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후속 엔진 개발은 계속됐다. 현대자동차의 기술력은 날로 향상되었다. 덩달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의 입지를 높였다.
포니의 후속 모델 엑셀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현대자동차가 엔진 개발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현대차와 파트너가 되어 엔진 부품을 공동 개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보쉬였다.
1984년에 마북리연구소를 설립하고 약 7년 만에 알파엔진을 개발했다.
두 번째 엔진 베타엔진의 개발에는 4년이 소요됐다. 베타엔진 이후로는 거의 1년에 한 대 꼴로 새로운 엔진을 출시했다. 세타엔진은 여섯 번째 가솔린 엔진으로 13년만의 쾌거였다.
타 회사의 기술을 사서 쓰던 현대차가 마침내 타 회사에 로열티를 받게 되었다. 2002년 미국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일본 미쓰비시에 기술을 수출했다.
●기술력으로 승부하라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이 부도났을 때 그는 실사단장으로 각 기업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인수한다면 그 기업들을 회생시킬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현대자동차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는 동안 그들은 왜 줄줄이 도산햇을까?
그는 부도난 기업의 내부를 속속들이 실사하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술을 모르는 경영자가 기업 경영의 전권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독자 엔진을 개발할 때부터 정주영 회장은 엔진 개발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그에게 넘겨줬다. 경영자로서 독자 엔진 개발이라는 방향성은 제시했지만 그 외의 실무는 전부 엔지니어인 그에게 일임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는 엔진 설계 같은 실무에서부터 예산 집행까지 엔진 개발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큰 실수 없이 연구소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매사에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타 회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이 스스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실력이 쌓이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저절로 회사도 발전한다.
그래서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회사에 나와 있는 시간의 51퍼센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나머지 49퍼센트만 회사를 위해 쓰라고 조언하곤 했다.
그들이 49퍼센트만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해도 회사 입장에서는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원 개개인이 각자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으면 회사의 실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최고를 향해 도전하라"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이왕이면 큰 꿈을 가지고 겁 없이 도전하기 바란다. 부디 세상에 주눅 들지 않고, 패기 있게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를 바란다. 엔지니어의 길을 먼저 겅었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여러분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 '에필로그' 중에서 by/오대석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