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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담기와깨진유리숙우 신체사유 '미션 클리어'
유리 숙우가 깨졌다. 퇴수기 씻어서 다기들을 그 위에 겹쳐 놓았다. 퇴수기를 두 손으로 들고 가다가 순간에 유리숙우가 미끄러져 거실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그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힌 후 쩡'''' 하며 퍼지는 파편들 속에서 나는 좀 전에 잠시 환영처럼 스치던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좀 전에 퇴수기를 비울 때가 되어서 유리 숙우 두 개와 자사호와 개완을 퇴수기에 담아서 씽크대로 가져왔다. 보통 자사호나 개완, 그리고 찻잔 및 유리 숙우는 웬만하면 그 자리에서 씻어서 정돈하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가다 씽크대로 가져갈 때가 있다. 어차피 퇴수기를 씻어야 할 때는 같이 가져가서 씻기도 한다. 다반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오늘은 퇴수기 위에 그대로 다시 담아서 들고 오는 와중에 유리 숙우가 거실 바닥으로 그대로 직강한 것이다.
산산히 부서진 유리 숙우 깨진 소리가 어쩐 일인지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유리 숙우 깨지는 소리는 어쩌면 맑게 거실 안에서 울린 탓인지도 모른다. 공명하는 그 순간에 거실 공간은 통으로 스피커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 두 시로 가는 정적이 깃든 거실, 바닥에 떨어져 순간 '쩡~팍' 하며 외마디 소리를 터트리고는 '''팍''''하며 흩어졌다. 유리 숙우의 마지막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잠시 멍하니 들었다. '그래 너는 맑은 소리를 가지고 있었구나!' 이런 생각과 동시에 애상한 마음이 스쳤다. 유리 숙우와 함께 하였던 시간의 무게가 그 순간에 한꺼번에 스친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순간적으로 환영을 보여주었던 것이냐'
씽크대 앞에서 퇴수기 안에 다기들을 담아서 보온병과 같이 들고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숙우가 '위태'하게 느껴져서(떨어 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보온병만 먼저 다탁에 가져다 놓았다. 다시 씽끄대로 되돌아와서 두 손으로 퇴수기를 감싸 안고 가는 데 그만 유리 숙우가 미끄러진 것이다.
위태하다는 그 느낌 이전에 이미 유리 숙우를 닦는 동안 이 유리 숙우와 보낸 시간을 머릿속에서는 영상처럼 송출하고 있었다. 송출되는 기억에 심취해 있었던 것일까.
위태하다고 느낌이 왔으면 유리숙우를 내려 놓고 다반에 담아서 옮기거나 혹은 유리 숙우만 따로 옮겨도 좋았으리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참으로 집중적으로 많은 스침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저 내머릿속 일로 치부했다. 만약에 유리 숙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 숙우는 사물이다. 사물은 나에게 동작을 지시한다. 나는 그 사물의 형상을 보면서 내가 포개 놓은 그 형태가 위태하다고 여겼으면서도 괜찮을 것이라고 나이브하게 대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유리 숙우를 사용하던 장면이 계속 동영상으로 송출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영상에 젖어 있었다. 그토록 같이 시간을 보내며 아끼고 사랑했다면 유리 숙우의 안전 즉 다루는 방식을 잘 지켜야 했을 것이다.
다반으로 옮기거나 다탁에서 유리 숙우를 '세심'했어야 한다. 다기들은 자주 옮기거나 보호막 없이 먼 거리로 옮기면 금세 깨진다. 여러 그릇이나 다른 것들과 섞여 씽크대에서 씻을 때도 세심하게 주의를 주어 씻지 않으면 금세 부딪혀 깨지거나 이가 나가거나 금이 간다. 다기류는 그 모양이 작고 독특하다. 섬세한 것은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흩어진 유리숙우 파편들을 모아서 뽁뽁이 봉투안에 화장지를 깔고 깨진 유리들을 한데 모아 넣었다. 그리고 스카치 테잎으로 입구를 봉한 후 작은 종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비닐로 싼 후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깨진 유리는 위험하니까 잘 싸서 버렸다.
요즘은 금방까지 같이 놀며 생동감 있었던 것들이 금세 다르게 변한 것들에 대한 어떤 낯설음이 있다.
이를테면 텃밭에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뽑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 쏙 뽑아든 순간 그걸로 배추의 생장은 그걸로 끝이었다. 금세 단절된 배추의 생을 보고 있자니 못내 어떤 서러움도 찾아왔었다.
손은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배추 뿌리를 자르고 겉잎을 떼어내고 겉잎을 찢어서 다시 흙과 섞어 주고 있었다. 손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이 장면은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는 어떤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듯한 느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마음은 어떤 것을 지각하고 있고 내 손은 시간을 계산하며 그것에 맞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는 시선과 내 마음이 보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유리 숙우도 그렇다. 나는 유리 숙우를 보며, 이런 생각들이 일어나서 참담한 마음이었다. 아... 이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 그런데 쩡! 팍~ 소리와 파편으로 퍼지는 그 장면은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 하고 있는데 몸은 잠시 당황하다가 침착해야 돼! 하며, 유리가 퍼진 반경을 대략 확인 후, 티슈와 물티슈를 포개서 손에 쥐고 바닥을 쓸어 가기 시작했다. 흩어진 파편들을 모두 전부 다 가운데로 모았다. 그리고 더 흩어진 것은 없는지 살폈다.
아~ 이 이중적인 마음과 몸의 움직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은 관조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에게 신체사유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의 끝에는 항상 '죽음' 있었다. 목숨이란 '순간'이었다. 배추도 뿌리 뽑힌 그 전과 그 이후 그 사이의 '순간'이었다. 유리숙우도 바닥에 떨어지기 전과 그 후, 그 사이는 순간이었다. 순간에 모든 게 결정된다. 삶과 죽음도 순간이었다. 살아 있으면 포장도 다르게 한다. 죽음은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 그것은 낙엽처럼 부서지며 다시 되돌아 가는 것. 죽음은 그저 생이 지속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 사물이 더 이상 어떤 기의를 내보내지 않는 것. 몸이 지속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배추는 김치로 화했다. 어쨌든, 사라질 것이다. 죽음을 늦춘 것, 그것은 미생물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다만 유리숙우는 수리할 수도 없이 조각나 버렸으므로 죽음을 늦줄 수 없게 되었다.
유리 숙우 사려면 몇 천원에서 만원이면 산다. 내가 이리 쓴 것은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조상하는 것이다. 애도란 무엇인가. 나는 다기들을 사용하는 그 시간 자체가 애도였다고 여긴다. 배추와 함께한 시간 자체가 애도였다. 어쩌면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그 자체가 애도이다.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함께하여 좋은 그 시간을 현재에서 기뻐하기도 하고 추억하며 그 자신의 생을 채운다. 그때 그 기쁨과 같이 흐르는 또 하나의 줄기가 있다. 그것은 슬픔이다. 그 애상함이 기쁨과 항상 동시에 흐른다.
우리가 추억할 때 그리움과 애상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슬픔과 애상함이 전면화되기 때문이다. 기쁨 뒤에 같이 흐르던 그 슬픔.
우리가 기억들의 총체성을 느낄 때 아름답게 가슴 벅차게 피어나는 그 감정이 슬픔과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시간성에 의한 것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흩어지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다. 그것에 대해 이미 기쁨이나 즐거움은 어떤 그 시점을 찍고 있고 그 이후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변화되는 것을 슬픔이 관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때의 그 감정은 다시 느낄 수 없는 것이므로 상실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모든 조건과 그 자신도 그때로 되돌아가야만 그때의 감정 그대로 느끼겠지만,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다.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눈 앞에 현상은 무엇을 알려주고자 함인가? 첫 생각은 사태를 본 후 느끼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심연의 저 깊은 생각은 내가 깨진 다기를 본 후 지금 글을 쓰는 바로 그 생각일 것이다.
'실존한다'와 '실존에 빠지다'의 차이는 어떤 낯선 상황에 그 자신이 노출되었을 때,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몸이 얼어 붙어서 움직이지 않거나 몸이 천근만근이 되거나 또는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오지 않은 상태는 실존에 빠진 것이리라. 저 깊은 심연에서 몸을 건져올리지 못한 것이다. 즉 그것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신체 경험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은 그때 몸과 분리된다. 마음이 몸을 떠나서 그 밖에서 두려워 떤다. 자아가 몸과 분리된 것이다. 자기 몸이라 생각했던 몸이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몸에 대해 자포자기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둘을 다시 통합하려면 이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의식이다. 뇌는 연결시키려 한다. 낯선 상황, 즉 낯선 환경을 뇌는 빠르게 스캔한다. 뇌는 축적된 정보를 활용한다. 이 낯선 상황을 신체 경험의 장으로 만든다. 즉 하나의 가상 공간으로 만든다. 그 자신은 이제 하나의 게임의 장에 갇힌 상태가 된다. 미션을 클리어 해야만 이 게임의 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료했느냐 못했느냐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소에 훈련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체 훈련이다. 이 신체 훈련을 통해서 뇌는 의식을 만든다. 이 만들어진 의식이 낯선 상황에서도 몸을 통제하여 자동으로 반응하게 한다. 즉 상황에 맞게 대처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사건은 그 후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며 어떤 하나의 사건을 몸이 신체사유하도록 강요한다. 그 신체사유를 통하여 몸은 훈련된다. 서로 연결된 상태가 의식이다. 작은 사건들은 일종의 '징후'이다. 기호이다. 이 기호들이 내뿜는 의미를 알도록 강요하는 것이 '신체 사유'다. 신체사유 방식은 이렇게 진행된다. 내품는 기호가 방출하고 있는 것에서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 끈질기게 따라 붙어야 한다. 그것은 늘 그것에 대해 연결시키는 촉수를 벼르고 있어야 하며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일상을 살면서 문득 튀어 나오는 것이 기호이므로, 그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강렬한 사건은 그 후로도 그 자신에게 징후를 계속 탐지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차리도록 신체훈련을 시킨다. 경험하게 한다. 이것을 그 자신이 알아차리느냐! 아니냐!는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리고..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내 마음에는 가장 크게 그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리 생각하고나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결'이 나에게 스치고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결을 내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예스면 계속 가는 것이고 노면 그 길은 봉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과 악의 관점보다는 그 자신의 현재 상태가 더 개입된다. 현재 그 자신과 무엇을 연결시킬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우쳐 준 것이 유리 숙우가 깨진 사건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판단하며 문을 열고 다음 스테이지로 진행하는 방향일 것이다.
몸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내면을 관조한다. 이것이 애도일 것이다. 함께한 지난 시간을 추억하면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방출된 기호(징후)에 대해서, 그것은 유리 숙우가 깨질 것에 대한 징후인가? 아니면 방지하기 위한 징후인가? 결론적으로는 깨졌지만, 깨진 그것은 나의 사유를 '정도'에서 연결시켰다. 아니었다면 그 사유는 다른 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정도'란 내 사유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건을 신체사유를 통하여 끝까지 밀고 가는 것 말이다.
나를 깨고 알에서 나와야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차생활을 하는 것이 현재 나의 삶이다. 본 줄기를 말함이다.
이번에 '김장담기'는 나에게 하나의 게임의 장이었다고 여긴다. 키우고 캐고 다듬고 씻고 간하고 다시 씻고 물 빼고 양념장 만들고 배추에 양념 바르고 바르고 또 바르고 분배하여 택배 보내고 뒷정리 하고 뒷정리 뒤늦게 김장김치 맛 보고 보쌈으로 먹으려다 너무 삶은 보쌈이 입에서 살살 녹고 직접 키운 배추가 고소하고 단맛이 난다는 뒷맛과 함께 '이거 김치 사업'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또다른 재능 발견에 '갓'과 덜 자란 배추에 쌈 싸먹는 손길이 바쁘고 그러다 이내 덜 자란 배추를 캐오지 않아서 이 추위에 얼어 죽은 것이 못내 애통하여 자책감이 들어서 이거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고민하다가 올해 정말로 일년간 큰 공부했다라고 자평하게 되었다.
이 모든 생각들이 김장 담기와 동시에 진행된 일이고 생각들이어서 하나의 글로 썼다. 물 빠진 배추에 양념을 처벅처벅바를 때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게임 같았다. 이걸 끝내지 않으면 그 다음이 진행되지 않으니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였다. 밤을 지새웠는데 서서히 졸린데도 이 상태에서 도망갈 순 없었다. 잠들어 버리면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시간은 지나가리라'를 외우며 묵묵하게 차박차박 배추에 양념을 바르다 보니 별 생각이 다 스쳤다. '김장 담기' 미션을 클리어 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해방도 그런 해방이 없었다!
*사진에 깨진 유리 숙우 사진은 없다. 다만 김장 김치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