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祖大王과 隆健陵 그리고 龍珠寺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1776~1800)는 비명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영조의 탕평정치를 계승하였다. 이를 위해 할아버지 영조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남인의 고학(古學), 서울 노론의 북학(北學)은 물론, 불교와 한당유학에 이르기까지 왕권강화에 필요한 여라 학문을 폭 넓게 수용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준론탕평’(峻論蕩平)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 벽파를 견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왕권강화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닦은 학문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영조와 마찬가지로 치통(治統)과 도통(道統)을 겸비한 군사(君師) 의 입장에서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을 자처하면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184권 100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군주로서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과시하였다.
정조는 양반=사족중심의 국가운영을 탈피하여 소민(小民)을 보호하는 민국(民國)건설에 목표를 두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기구를 원하였다. 그것이 바로 즉위 초(1776) 창덕궁 안에 세운 규장각(奎章閣)이다. 이곳에는 수만 권의 한국 책과 중국 책을 모으고, 젊은 학자들을 학사(學士)로 기용하여 그들에게 문한(文翰)의 기능, 비서실의 기능 그리고 과거시험 주관기능 등 여러 특권을 부여 하였다.특히 당하관 관료의 재교육을 위해 초계문신제( 抄啓文臣制)를 시행하여 시험성적에 의하여 승진시킴으로서 정조의 학문과 정치노선을 강하게 주입시켰다. 규장각은 바로 정조시대의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이 되었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하여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창설된 부대가 장용영(壯勇營)이다. 규장각이라는 친위적 학자집단과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장악한 정조는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였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양주에 있던 아버지 묘소를 수원(水原)으로 옮겨 ‘현릉원(顯陵園)이라 하고, 현릉원 북쪽의 팔달산 밑에 새로운 성곽도시로 화성(華城,수원)을 건설하였다.(정조20,1796) 1804년에 15세가 되는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혜경궁을 모시고 이곳으로 은퇴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1800년에 타계하여 은퇴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양의 건축기구들을 참고하여 정약용 등 실학자들로 하여금 거중기, 녹로등을 제작케 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의 과학적 공법으로 이룩된 화성(華城)에는 행궁(行宮)과 장용영(壯勇營)의 외영(外營)을 두었으며, 대유둔전(大有屯田)이라는 국영농장을 설치하여 화성경비에 충당하고, 만석거(萬石渠)와 만년제(萬年堤)등 수리시설을 개선하였다. 한편 상공인(商工人)들을 유치하여 상업도시, 농업도시, 군사도시로 키웠다. 화성은 정조의 혁신정치를 상징하는 시범적인 자급도시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한 후 북방의 개성(松都), 서방의 강화도(沁都),동방의 남한산성(廣州)을 함께 묶어 서울을 비호하는 네 개의 위성도시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서울을 중 고대의 수도인 장안(長安)과 동등한 도시로 위상을 높였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화성에 행차하였는데, 대략 2,000명의 수행원과 800필의 말이 행차를 따라 그 위엄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행차의 편의를 위해 새로이 신작로(新作路,지금의 시흥대로)를 만들고, 한강에는 80여척의 배를 동원하여 배다리(舟橋)를 건설하였으며, 행차기간에 지방유생들 및 일반주민들과 가깝게 어울리면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특히 정조의 아버지,어머니(惠慶宮 洪氏)가 동시에 회갑을 맞이하는 1705년(정조19)의 행차 규모가 가장 컸으며, 이 행차에 관련된 일정, 비용, 참가자명단 그리고 행차그림 등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797)로 편찬하여 행사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궁정화가들로 하여금 주요 행사를 대형 병풍그림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 병풍그림이 지금 여러 종류가 전해져 당시의 정치와 문화수준이 어떠했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8도의 지방유생들을 포용하기 위해 각 도별로 유생의 명단인 빈흥록(賓興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안정과 문화부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폈다. 정조는 계지술사(繼志述事)를 내걸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국가경영을 혁신하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통공정책(通共政策,1791)을 써서 시전상인들과 자유상인 통제권[금난전법]을 폐지하여 자유 상업을 진작시키고, 전국 각지의 광산개발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서울은 인구가 집중되어 도성 밖에 새 마을(新村)이 곳곳에 형성되고, 한강에는 많은 상선들이 출입하면서 포구가 늘어났다.
한편, 정조대에는 재야사림이 주관하던 군현단위의 향약을 수령에게 맡겨 지방사림족의 발호를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문화사업면에서도 괄목할만한 변화가 나타나 대전통편,동문휘고,탁지지,추관지,규장각지,홍문관지,증정문헌비고,해동여지통재,규장전운 등 수백 종의 거창한 서적을 국가사업으로 간행하였다.
한편 정조는 자신의 정치를 스스로 기록하여 매일매일 반성하는 전통을 세워 세손 때부터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왕이 된 뒤에는 규장각의 신하들이 왕을 대신하여 매일 매일의 주요 정사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규장각 설립 이후에는 규장각의 일을 매일 기록한 내각일력(內閣日歷,규장각 소장)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문화편찬사업과 병행하여 활자도 아름답게 개량하고 미술분야에서도 뛰어난 걸작이 나타났다. 지도제작에 있어서도 당시의 과학수준을 반영하여 현대지도에 방불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채색지도도 많이 제작되었다.
영조에 뒤이어 개혁과 대대적인 편찬사업으로 조선왕조는 15세기에 이어 300년 만에 경제적으로 강력해지고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조선왕조는 세도김씨의 발호 등 여러 원인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자료: 한영우 저 다시 찾는 우리역사에서 발췌)
정조(1752~1800) 어진 선원보감
정조대왕의 정식 어진은 전해지지 않으나 궁중비록인 선원보감에 간략한 어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보면 정조대왕은 무인의 상으로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성질은 불같고 욕을 잘했다고 하며 평소 술과 담배를
즐겼고 여자는 멀리했다고 한다.
융릉融陵
융릉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현경의황후의 능이다. 정조13년(1789) 양주 배본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릉원이라 고쳐 불렀다. 순조 16년(1816년) 현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합장 광무3년 장종으로 추존하고 융릉으로 높였다.
추존 장조의황제(1735~1762)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글과 시를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정권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이를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 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 즉위 후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렸으며, 광무3년(1899)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하였다.
건릉健陵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 선황후의 능이다. 1800년(정조24) 현릉원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조성하고 정조 안장하고(초장) 순조 22년 (1821) 현릉원 서쪽 산줄기 지금의 자리로 옮겨(천장) 효의선황후와 합장하였다.
효의선황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영조 38년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의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순조 21년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의왕후로 올렸으며, 광무 3년 효의선황후로 추존하였다.
융·건릉 배치도
용주사(龍珠寺)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용주사 대웅전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호성전(護聖殿)·독성각(獨聖閣)·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첫댓글 오는 5월 11일 경기56회 봄나들이에 융.건릉과 용주사 답사를 포함시키게 되어 간략히 소개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