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예레 31,1-7
복 음 : 마태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영적 탄력
-주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죽어 저 세상에 가서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하는, 살아야 하는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 나라 천국을 살지도 누리지도 못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만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 나라 천국이요 행복입니다.
연옥 같은 세상이라, 지옥 같은 세상이라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오늘 지금 연옥 같은, 지옥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도
하늘 나라 천국을 사는 이들이 진짜 참으로 살 줄 아는 성인들이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이 중요합니다.
삶에는 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삶의 두 측면을 잊지 않고 한 눈에 조망하는 깊고 넓은 시야가 필수입니다.
제가 폭우로 인한 시냇물 소리에 환호하지만 곳곳에서 수해로 아우성입니다.
제가 집무실에서 글을 쓰며 공부하는 동안 수도원 책임을 맡고 있는 수도형제는
비옷을 입고 포크레인으로 개집 마당에 모인 물을 빼고자 땅을 파고 배수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수도형제라 제가 야생화에 감탄할 때 밭에 번지는 피해를 이야기 했습니다.
‘새들아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이상이고
현실은 배 열매를 무차별적으로 쪼아대는 새들의 만행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농장 수도형제들입니다.
사과밭에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하나 있기에 사진을 찍으려 하니
뒤에 반쪽은 무참히 쪼아져 있기에 앞면만 나오도록 하여 찍었습니다.
야생 동물에 대한 사랑이전에 극심한 피해로 큰 덫을 놓아 멧돼지를 포획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멧돼지를 생포했던 큰 덫 안에는 작은 참새들이 무수히 날아와 자유로이 먹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크고 무겁지 않고 작고 가볍기에 갇히지 않고 빈틈 사이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요 며칠간은 참 행복했던 날들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생각입니다.
짬짬이 휴식 시간에는 수도원 경내를 자유로이 거닐며
‘푸른 잔디’와 ‘파란마음 하얀 마음’ 동요를 2절까지 맘껏 아마 수백번은 불렀을 것입니다.
흡사 동요이면서 찬미가의 기도처럼 느껴졌습니다.
두 편의 시도 주었습니다. 시는 짓는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발견하여 줍는 선물입니다.
-“마음은/언제나/끊임없이 맑게 샘솟는/우물이고 싶다
마음은/언제나/끊임없이 맑게 흐르는/강물이고 싶다”-
-“하늘비 내린 뒤/두런두런/말소리에 깜짝 놀라
반가워 가만히 귀 기울여/들여다보니
곳곳에서/들려오는/도랑물 흐르는 소리/메말랐던 대지의 찬미가였네”-
사랑의 찬미입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는 그대로 하느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의 표현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보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쟁의 삶에 백절불굴, 칠전팔기의 영적탄력 좋게 하는 데에는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기도의 힘은 그대로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과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그대로 탄력 좋은 용수철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요 기도의 사람이자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싸움에, 자기와의 싸움에 믿음으로 승리한 주님의 전사입니다.
그녀의 영적 탄력은 얼마나 탁월한지요.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좌절하지 않고 기도로 도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의 냉담한 반응에 개의치 않고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난한 여자입니다.
참으로 완전히 자기를 비운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마침내 주님과의 싸움에,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한
가나안 여자의 영적 탄력 좋은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에 기쁘게, 흔쾌히 응답한 주님이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침내 치유의 구원입니다.
연옥 같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 구원되어 하늘 나라 천국을 살게 된 가나안 여자입니다.
주님을 만나 운명이 바뀐 가나안 여자는 이제 옛 가나안 여자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행복한 내적부요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가나안 여자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여자의 영적승리의 비결은 참 좋은 영적 탄력에 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탄력의 비결은, 영적승리의 비결은 무엇이겠는지요.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내적 신망애의 마음이자 삶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대한 깊고도 확고한 흔들림 없는 신뢰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고백하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통해 분명 이런 하느님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자.
주 하느님께 아나가자.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처녀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가나안 여자요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 대한 주님의 한결같은 자애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백절불굴의 영적탄력을 지니게 하며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요즘은 흐르는 물처럼 산책하며 동요 부르는 재미로 삽니다.
오늘은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산책할까 합니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영적보약으로 우리의 약함과 아픔을 말끔히 치유해 주시며,
무엇보다도 당신 향한 참 좋은 믿음, 희망, 사랑을 선물하시어
영적탄력 좋은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 어떻게 혼자 살 수 있어요?”
많은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 되었을 때부터 들었으니 정말로 이 말을 오랫동안 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 50이 넘어가니 이 말씀을 잘 하지 않으십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할 것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아무튼,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선 “혼자 살 수 없어요.”라고 답합니다.
법적으로는 혼자 사는 독신으로 보이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만나는 사람도 있고, 순례 오신 분들과 만남,
그밖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또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절대 살 수 없습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혼자 지내는 것 같지만,
이 역시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물건은 제가 샀을 뿐 직접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 편리한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사람인(人)의 한자를 보면, 서로 의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런데 이 사람의 기본 모습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미워하고 원망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의지하지도
또 기대지도 않는 비인간의 길을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라며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여인이 소리를 지른다고 아우성칩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인 것처럼, 강아지에 비유하면서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고 기대려는 모습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를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딸이 나았습니다.
배척하고 부정하는 삶은 결코 믿음의 삶도 또 사람의 삶도 아닙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사람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 믿음의 삶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삶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찹찹해지기도 합니다.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이러한 묵묵부답의 하느님의 침묵에 배신당했다고 여기기도 하고, 상처받고 실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한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키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침묵 안에 완성되어 사랑의 외침을 들어야할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이 깊어갈수록 절망 속 원망이 깊어갑니다.
당신은 삼킬 것 같은 풍랑 속에서 말없이 주무시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십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앞에서 말없이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고,
끝내 여인을 구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골고다로 끌려가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하오니, 당신의 침묵 속에서 제 믿음과 겸손을 양육하소서.
더 깊이,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고추를 키우면서 느낀 것입니다.
처음에 나온 잎을 따 주었습니다.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고추는 줄기를 더 튼튼하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꽃이 피면서 고추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지 않았다면 고추는 줄기를 튼튼하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꽃이 필지라도 먹음직한 고추는 열리지 않았을 겁니다.
고추가 줄기를 곧게 세우기 위해서는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어야 했습니다.
크게 자란 나무를 보면 중간 중간 가지가 잘려나간 걸 봅니다.
나무는 그렇게 아픔을 간직하면서 큰 나무가 됩니다.
감나무도, 대추나무도 바람이 불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는 걸 봅니다.
그래야 가을이면 알찬 열매가 맺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근심이라는 잎, 걱정이라는 잎, 시기와 질투라는 잎을 따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의 줄기가 곧게 서고, 사랑의 꽃이 피며, 믿음의 열매가 열리는 겁니다.
코로나19의 위세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 나온 고추의 잎을 따주듯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듯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듯이 우리에게 아직도 원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올 때가지는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고,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영상으로 미사를 보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 앞에 작은 텃밭을 가꾸기도 합니다.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만 채워지는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처럼 가만있어도 채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굶주림도 있었고, 목마름도 있었습니다. 의심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습니다.
참고 견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모두 타는 목마름으로 여름을 견뎠습니다.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리 골절 수술을 한 사람은 한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합니다. 뼈가 붙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리의 힘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목발을 놓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고난과 시련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오늘 문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또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음악적 재능이나 뛰어난 추진력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재산이나, 업적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끝까지 믿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던 자캐오처럼
우리들이 소유하기 보다는 나눌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행복해 하실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작은 부스러기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부스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기적은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감사로이 받아먹는
은총입니다.
사랑하면
부스러기조차 소중합니다.
모든 사랑은
부스러기처럼
간절한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
주님을 찾습니다.
참된 기도는
절박하기에 낮아집니다.
부스러기의 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에 진실합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낮아지는
소중함에 있습니다.
간절하기에
장애물도
단숨에 뛰어 넘습니다.
믿음은
부스러기같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자아가 부서져야
믿음이 됩니다.
부서지는
부스러기의 힘을 믿습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부서지는
부스러기의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부서지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때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인데 잘 안 풀리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긍정의 힘’이라는 식의 책이나 강연을 한 번쯤은 읽어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정말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하늘 일마다 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대로 좋지 못한 삶을 삽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 당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미국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의 차이입니다.
중공군은 포로가 탈출을 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사기를 꺾는 교육을 했습니다.
탈출은 불가능하니 결국 순응하라는 것입니다.
이 교육에 넘어간 미국 병사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고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무기력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올 때부터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중공군의 교육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긍정 마인드를 키운 터키 군사들은 거의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정말 긍정 마인드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도 긍정적인데 왜 삶은 이 모양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잘 될 거야!’를 끊임없이 되뇌지만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진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긍정에 무언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이라는 사람은 미 해군 장교로서
베트남 전쟁 당시 8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도 건강하게 돌아와
미국 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당시 베트남 하노이 수용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극도의 고통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톡데일은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이 누구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절망에 빠져 희망을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안 되어 결국 다 죽어갔습니다.
도대체 왜 어떤 이들은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선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 잘 될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안 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 여인은 심하게 마귀에 든 딸아이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심지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모질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녀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청합니다.
어째서 이 여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 존재가 ‘좋으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분을 좋은 분으로 여기지 못한 천사는 사탄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분이 자비로운 분임을 믿지 못했기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분임을 믿을 때에야
지금의 고난이나 청한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도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가 청한 것이 들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버텨낼 수 있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여기면 둬 번 청하다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이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감사일기의 대명사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삼촌의 성폭행으로 14살의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내다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삶이 변한 이유를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면 주님을 좋은 분으로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긍정이 망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에서 보듯, ‘의미’는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삶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려 하면 지쳐 쓰러집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주님께 대한 긍정이 먼저 있다면 아무리 힘든 난관도 다 헤쳐 나갑니다.
세상에서 긍정 마인드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수준의 믿음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사람은 그 신을 좋은 분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긍정의 힘이 모든 난관과 실패를 극복하게 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키웁시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을 합시다.
그리고 모든 것에 긍정합시다. 그러면 나의 긍정이 기필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오늘 복음 속 여인은 딸을 위해 기꺼이..
외면하는 이들을 향해 소리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 매달리고
엎드리고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이 여인의 기꺼움에 마음이 머뭅니다.
모든 이를 위한 영적 어머니가 되겠다고..
그런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 하면서
얼마나 이런 기꺼움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면, 거부, 낮추어 보는 낌새라도 보일라치면
한껏 기분 나쁨을 표출하고 또 그런 취급을 당하지 않게
조금씩 나 자신을 무섭게, 건드리지 못하게 굳혀갑니다.
이런 딱딱함 안에서는 기꺼움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기꺼움은.. 나를 버리고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리를 대었을때 드러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처럼.
여인이 젖먹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희를 더 사랑한다고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외치며 기꺼움을 보여주시는 주님께
굳은 나의 마음을 봉헌하며
그 안의 기꺼움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닮아 믿음으로 낮은 곳을 찾게 하시고
낮은 곳의 사람들을 사랑하여 기꺼이 존중하고 돕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