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에서 보리굴비를 먹으며 조기 생각을 하다.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의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라는 옛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까지 물이 돌아서 호수와 산이 아름답고, 민가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나라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겸은 칠산 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이 잡혔던 영광 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법성포는 조선시대에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 기능을 하였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나주와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광주, 옥과, 동복, 남평, 창평, 곡성, 화순, 순창, 담양, 정읍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 12개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척에서 50척까지, 전선이 22척, 수군 1,700여 명이 머물렀다.
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波市가 섰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이제 법성포는 회상 속에나 등장할 뿐이고, 화려했던 모습은 옛이야기 속의 한 토막이 되었다.
도온 시일러 가세에에
돈 실러으어 가으세에에
여영광에 버법성포에라 돈 시일러 가.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조기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은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 때마다 흥청거리던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법성포에는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르는 조기들이 걸려 있다. ‘영광 굴비’ 또는 ‘이자겸 굴비’라고 쓰인 간판들을 보아야 비로소 이곳이 바로 굴비의 고장인 영광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곳의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인종 때 인종의 외조부이면서 장인이었던 이자겸 때문이다. 사위를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했던 이자겸은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인 척준경이 배반하여 이곳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는 맛이 빼어나게 좋은 영광 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으로 임금께 진상하였다. 석어라는 이름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토굴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놓았다가 하룻밤을 지낸 뒤에 꺼내어 말렸기 때문에 붙인 것이고, 굴비라는 이름은 비겁하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 안에서 영광 굴비를 최고로 치는 것은 이곳에서는 통통히 알이 밴 오사리 때 조기를 잡아서 말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다른 지방과 다르게 ‘섭 간장’ 방법으로 조기를 말려 굴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알이 통통하게 밴 조기를 소금물로 씻은 다음 사흘 동안에 걸쳐 절이는데 그때 맨 밑에다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조기, 소금, 조기의 순서로 차곡차곡 쟁여놓은 다음 맨 위에 다시 가마니를 덮어놓고 묶는다. 이때 소금은 하얗고 고운 것을 써야 한다. 이렇게 사흘 동안 절여두었다가 알맞게 절여지면 다섯 마리씩 엮어서 걸대에 걸어놓고 2주일쯤 햇볕에 말린 뒤 통보리 속에 묻어서 저장한다. 이것이 예전 이 지역에서 만들었던 ‘오사리 굴비’인데 이 굴비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은 토사가 쌓여 지난 시절의 법성포를 떠올리기가 민망한 법성포에서 보리굴비로 저녁을 먹고, 거닐며 바라보는 항구는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느 작은 배들이 촘촘이 잇대어 있었다.
2024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