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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아버지, 결혼해 어려운 살림 이루며 사느라 아버지란 이름을 잊고 살았다. 첫 아이를 낳고 백일만에 들린 친정,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손주를 안으며 ㅡ그놈 참 잘 생겼구나, 이름은 지웠나? ㅡ네 이름을 지었습니다. ㅡ아 그럼 됐다. 뭐라고 지었나? ㅡ네 지혜로울지, 클 석, 지석이라 지었습니다. ㅡ음 그럼 됐다. 내가 원석이라 지었는데 지석이도 괜찮다. ㅡ아 네 진작 아버님께 부탁을 드릴 걸 그랬습니다. ㅡ음 지석이 이름도 괜찮다. 뜻도 좋고 사주도 괜찮고,
아버지의 장방에는 정돈되지 않은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희붐한 새벽마다 소리 내어 읽으시던 한지 위 글자들, 엄지를 중심으로 손가락 끝 셈을 하듯이 자축인묘진사... 절기와 기후를 알았고 가까운 이웃 작명을 하시고 시조를 읊으시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다. 아버지의 그 내력으로 집안의 생활 습관은 아침형 인간으로 살았고 그 습관은 지금도 형제, 자매들에게 이어오고 있다. 검어 본 적이 없는 듯한 흰 머리칼과 밥상머리에서 그날의 글귀를 명품처럼 풀어놓던 기억들. 아버지 머리형 스타일은 단정한 하이칼라였다. 콧대가 선 긴 얼굴에 인품과 학문이 두툼해 보였다. 아버지 대쪽 같은 성격에서 나오는 말은 집안의 법이었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무서웠다. 새벽에 한자 공부를 배우러 오던 동네 분이 몇 있었으니 신라문화제 초청을 받은 날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집을 나서던 그때가 기억 저 멀리서 생각이 물결친다.
그러다가 막내딸 결혼을 앞두고 목이 간질거린다며 잔기침을 자주 하셨는데 시골이라 민간요법 썼다. 가마솥 밑 숯을 긁어모아 부드럽게 체에 쳐 대롱으로 목 안으로 불어넣고 입을 다물어 지긋이 숯을 한참 물고 있으면 아픈 부위에 좋다는 주위의 권유와 액운을 감한다는 속설을 따라 하셨다. 여러 가지 민간 치료법을 가볍게 시도하다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병원에 갔더니 진찰 결과 이미 늦은 후두암 3기 말이라는 판명이 났다. 결혼 그 이듬해 아버지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되어 일 년 만에 돌아가셨다. 결혼 일 년을 막 넘긴 스물여섯이었던 것 같다. 사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행동이었다는 걸 알겠다.
아버지는 외동아들에 효자셨다. 두 형제를 낳은 할아버지의 첫아들이었는데 똑똑하던 삼촌이 대학 졸업 후 괜찮은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자마자 패결핵으로 사망했다. 혼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꺼이꺼이 슬퍼했다. 할아버지의 기름진 재산을 오롯이 물려받은 아버지는 시골의 땅 부자였다. 장성한 머슴을 두고 풍족한 생활을 한 듯했다. 그러나 일 년에 제사가 13번과 대가족을 거느리고 아이들 공부 시키며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결혼은 현실이라고 하지 않든가, 살아 보니 충분히 아버지 심정을 알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복숭아밭에서 풀을 베다가 땀을 닦으시며 어린 나에게 말씀하시길 ㅡ내 평생 땅 한 평 못 샀는데 이번에 여기 복숭아밭 자투리를 사기로 했다. 저 옆구리 ㄱ자로 된 귀퉁이 50평을 사서 넣으니 네모반듯한 땅이 되었다. ㅡ조상의 은덕으로 재산을 이어받아 축을 내지 않고 자손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목표였다. 는 말씀과 팍팍한 살림살이이지만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데 보람을 느낀다며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독백처럼 한마디 하셨다. 어린 나에게, 묵직한 아버지 말씀을 무서워했던 나에게, 깊은 공감으로 갑자기 자신이 훌쩍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후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시골 살림 장성한 머슴 새경으로 나락 10 섬을 꾹꾹 눌러 주었고 많은 식구 먹고 쓰는 일, 자식들 대학 보내기까지, 특별히 버는 사람 없으니 알뜰살뜰 허리띠 졸라매어야 했던 빡빡한 아버지의 살림살이, 책임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찬물로 몸을 닦고 멀리 가파른 콧등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단석산으로 새벽마다 올랐다. 매일매일 할아버지께 아침 문안 인사를 다니러 가시는 아버지는, 흰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흰개미 움직임처럼 산 오르고 내리기를 삼 년을 이었었다. 제사 때마다 눈물 훔치던 효자 아들의 시대는 갔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벌써 우리가 그 시대로 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세상은 변하고, 변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그때만 해도 행복이라 생각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족한 건 못 느끼며 살았다.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고 음악을 듣고 책은 보고 느긋하게 집안 청소를 하고, 들판을 걷다가 갈대나 찔레꽃이 보이면 꺾어다 꽃꽂이를 하고,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고, 결혼 생활은 의례히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실직으로 이어지고, ㅡ아 바람이 불어도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어린 나이의 새댁이 알뜰해지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부업도 하고 시간제 아르바이트도 했으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림이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서야 남편건강이 조금씩 나아졌다. 몇 년 힘든 생활을 버티며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름대로 성숙 돼 있었다. 살림도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살아가는데 보약은 역시 경제가 탄탄해야 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아득히 멀리서 아버지가 오셨다. 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집고 어느 교회 성직자들이 드나드는 대형 문을 두 팔로 활짝 열었다. 문 쪽에서 사선으로 환한 강한 빛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눈이 부셨으나 아버지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가는 목소리로 ㅡ아버지 ㅡ그래 내다. 아버지다. 잘 지냈나 ㅡ네 아버지ㅡ그래 수고가 많구나 ㅡ너그 밥 먹으러 왔다. 한 상 차리 봐라 ㅡ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다가 깊은 잠에서 꿈을 깼다. 아버지 생각을 며칠 더 하다가 오봉산 자락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가기로 했다. 친정 엄마, 오빠 내외, 언니 내외, 우리 남편과 집안 식구들이 모여 제수 상에 올릴 떡과 음식을 고루 간단하게 마련하고 가족 나들이처럼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맑은 오월 봄날 탱글한 햇살이 내려앉은 산소 주변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 참 시간을 보냈다. 산소를 둘러보니 할미꽃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아버지 다녀가신 후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 아버지의 꿈을 행운처럼 기다리게 되었다.
빛
한영채
문이 열린다
두루마기 입은 갓 쓴 그가 문을 연다
계단 아래 어둠에 깊이 웅크린 그녀가
문의 길이보다 길게 빛이 열린다
판데온 천정처럼
빛이 내린다
고개 숙인 눈동자가 반쯤 열리고
빛을 향해 누굴까 하는 사이
말없이 내려다보는 따뜻한 눈빛이, 아버지다
죽음과 삶이 함께한다
어깨를 두드리는 오른손이 빛이다
새 발자국을 따라오신 것일까
힘든 시간을 견딘 그녀에게
어둠을 밝혀주는 빛
그가 웃는다 그녀도 웃는다
어둠에서 손을 잡고
빛을 향한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꿈 속을 벗어난다
2006년 문학예술 등단
시집으로, 모량시편, 신화마을, 모나크 나비처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