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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34회
공손 교(僑)는 정간공(鄭簡公)에게 말하여, 양소(良霄)의 아들 양지(良止)를 대부로 임명하여 양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공자 가(嘉)의 아들 공손 설(洩)도 대부로 임명하였다. 행인(行人) 유길(游吉)의 字는 자우(子羽)였는데, 유길이 공손 교에게 물었다.
“후사를 세우니 와언(訛言)이 잠잠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행인(行人)’은 사신(使臣)의 일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다. “외교문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비심(裨諶)이 초고(草稿)를 작성하고, 세숙(世叔)이 검토하고, 행인(行人)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동리(東里)의 자산(子産)이 윤색(潤色)하였다.”
집주에서 설명하기를, ‘세숙’은 유길이고, ‘자우’는 공손 휘(揮)라고 하였다. 열국지의 본문이 잘못된 것 같다. ‘동리(東里)’는 자산이 살던 지방 이름이다. 당시 정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여 외교가 중요했기 때문에, 외교문서 하나에도 자산은 이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와언(訛言)’은 사실과는 달리 잘못 전파된 말이다. 유언비어(流言蜚語)와 같다.]
공손 교가 말했다.
“흉악한 자가 비명에 죽으면 그 혼백(魂魄)이 흩어지지 않고 귀신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게 되면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씨의 후사만 세우면 되지, 공손 설을 대부로 임명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공(子孔; 공손 가)도 귀신이 될까 염려하신 것입니까?”
“양소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후사를 세우지 않았는데, 만약 귀신이 나타났기 때문에 후사를 세운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귀신 얘기에 현혹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을 바르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칠목(七穆)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핑계를 대고, 양씨와 공씨의 후사를 함께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현혹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길은 탄복하였다.
[‘칠목(七穆)’은 정목공(鄭穆公)의 13명의 아들 가운데, 영공(靈公) 이(夷)와 양공(襄公) 견(堅) 2명의 군주와 도중에 죽은 자를 제외한 거질(去疾)·희(喜)·비(騑)·발(發)·가(嘉)·언(偃)·서(舒) 7명의 공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편, 주경왕(周景王) 2년, 채경공(蔡景公)은 세자 반(般)을 楚나라 왕녀 미씨(羋氏)와 혼인시켰다. 그런데 경공은 며느리인 미씨와 사통하였다. 세자 반은 노하여 말했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는데, 아들이 아들다울 수 있겠는가!”
[논어에, 제경공(齊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父父子)”]
세자 반은 사냥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심복 내시 몇 명과 내실에 잠복하였다. 경공은 아들이 없는 줄 알고 동궁(東宮)으로 가서 미씨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자 반이 내시들을 거느리고 뛰쳐나와 경공을 죽였다. 세자 반은 경공이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제후들에게 부고(訃告)를 보내고 군위에 올랐다. 그가 채영공(蔡靈公)이다.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세자 반이 아들로서 부친을 시해한 것은 천고의 대변(大變)이다! 하지만 경공이 며느리와 사통하였으니, 그 또한 패역(悖逆)을 저질러 무죄라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新臺醜行污青史 신대(新臺)의 추행이 청사(靑史)에 오점을 남겼는데
蔡景如何復蹈之 채경공은 어찌하여 다시 그 짓을 답습했던가?
逆刃忽從宮內起 역자(逆子)의 칼날이 궁중에서 홀연 번득였으니
因思急子可憐兒 가련한 급자(急子)를 생각게 하는구나!
[제23회에, 위선공(衛宣公)이 아들 급자의 아내로 데려온 강씨(姜氏)를 빼앗아 신대로 데려가 살았으며, 후에 급자를 죽였다.]
채나라 세자 반이, 부군이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는 부고를 제후들에게 보내긴 했지만, 시역(弒逆)한 자취를 끝내 감추지는 못하였다. 본국에서부터 소문이 퍼져나가, 그 사실을 모르는 나라가 없게 되었다. 다만 당시의 맹주가 게을러 토벌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해 가을, 宋나라 궁중에 불이 났다. 宋公의 부인은 魯나라 여인 백희(伯姬)였다.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시녀들이 부인에게 피하라고 아뢰자, 백희가 말했다.
“부인은 유모의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밤에 당 아래로 내려서지 않는 법이다. 불길이 비록 급박하더라도 어찌 법도를 폐할 수 있겠느냐?”
유모가 달려왔을 때에는 백희는 이미 불에 타죽은 후였다. 宋나라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였다.
그때 진평공(晉平公)은 宋나라가 晉·楚의 화해를 성립시키는 데에 공이 있었음을 생각하여, 화재를 당한 것을 동정하였다. 그리하여 전연(澶淵) 땅에 제후들을 소집하여 재물을 출연하여 宋나라를 돕게 하였다.
[제131회에, 송나라 좌사 상수가 미병지회(弭兵之會)를 주창하여, 열국의 대부들을 송나라에 소집하였고, 晉나라 정경 조무와 초나라 영윤 굴건이 화평을 맺게 했었다.]
훗날 宋나라의 유학자 호안국(胡安國)은 이 일을 논하여 이렇게 말했다.
“채나라 세자가 부군을 시해한 죄를 토벌하지 못하고 宋나라의 재난만 도운 것은, 경중(輕重)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진평공이 패권을 잃게 된 원인이다.”
주경왕(周景王) 4년, 晉나라와 楚나라는 宋나라의 주선으로 동맹을 맺은 후 다시 괵(虢) 땅에서 회맹하기로 하였다.
그때는 楚나라 공자 위(圍)가 굴건을 대신하여 영윤이 되어 있었다. 공자 위는 초공왕(楚共王)의 서자인데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사람됨이 거만하고 공손하지 못했으며, 남의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자신의 재능만 믿고 은밀히 반역할 뜻을 기르고 있었다. 웅균(熊麇)이 미약한 것을 업신여겨, 국정을 멋대로 처결하였다.
[제133회에, 주영왕이 붕어하고 주경왕이 즉위한 해에 초강왕이 훙거하고 강왕의 아들 웅균이 즉위하였으며, 얼마 후 굴건이 죽고, 공자 위가 영윤이 되었다고 하였다. 제132회에, 楚軍이 정나라를 침공하여 천봉술이 정나라 장수 황힐을 생포했는데, 공자 위가 황힐을 빼앗으려고 했었다.]
공자 위는 대부 원엄(薳掩)의 충직함을 꺼려하여,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誣告)하여 그 아내와 함께 죽였다. 그리고 대부 원파(薳罷)와 오거(伍舉)를 심복으로 삼아, 날마다 찬역을 모의하였다.
[제108회, 초장왕이 晉軍에게 승전하고 돌아와 오삼(伍參)을 대부로 임명했는데, 오삼의 아들이 오거이고, 손자는 오사(伍奢)이며, 오사의 아들이 오상(伍尚)과 오원(伍員; 오자서)이라고 했었다.]
어느 날, 공자 위는 교외로 사냥을 나가면서 멋대로 楚王의 깃발을 수레에 꽂고 갔다. 우읍(芋邑)에 당도하자, 우윤(芋尹) 신무우(申無宇)가 그의 분수에 넘치는 짓을 책망하면서 왕의 깃발을 빼앗아 다시 부고에 넣었다. 그때부터 공자 위의 기세는 조금 꺾였다.
晉나라와 회맹하기 위해 괵 땅으로 가야 할 때가 다가오자, 공자 위는 괵 땅으로 가기 전에 먼저 鄭나라에 가서 풍씨(豐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청하였다. 공자 위는 떠나기에 앞서 楚王 웅균에게 말했다.
“楚나라는 이미 왕호를 칭하여 제후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신이 제후의 예(禮)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楚나라의 존엄을 열국이 알게 하십시오.”
웅균은 허락하였다. 공자 위는 국군(國君)의 행차를 참용(僭用)하여 의복과 기물을 모두 제후의 예법을 따랐으며, 창을 든 두 장수가 앞장서서 인도하게 하였다.
공자 위의 행렬이 鄭나라 교외에 당도하자, 교외 사람들은 楚王이 온 줄 알고 깜짝 놀라 급히 도성에 보고하였다. 鄭나라 君臣도 모두 크게 놀라, 밤중인데도 거의 기다시피 하여 교외로 영접하러 나갔다. 그런데 막상 수레에서 내린 사람은 楚王이 아니라 공자 위였다.
공손 교는 그걸 불길하게 여겨, 혹 공자 위를 도성으로 들어오게 하면 변란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행인 유길을 보내, 성중의 관사가 낡아 수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 밖의 관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통보하게 하였다.
공자 위는 오거를 성중으로 들여보내, 풍씨와 혼인을 의논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鄭伯은 허락하였다. 공자 위가 풍씨에게 예물을 보냈는데, 예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혼인날이 다가오자, 공자 위는 홀연 鄭나라를 기습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부를 맞이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병거들을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기회를 봐서 거사하려고 하였다
공손 교가 유길에게 말했다.
“공자 위의 속셈을 예측할 수 없으니, 반드시 그 일행을 떼놓고 성중으로 들어오게 하시오.”
유길이 말했다.
“제가 다시 가서 거절하겠습니다.”
유길이 공자 위에게 가서 말했다.
“영윤께서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부를 맞이하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폐읍은 협소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성 밖의 넓은 땅을 청소해 드릴 테니, 그곳에서 신부를 맞이하십시오.”
공자 위가 말했다.
“鄭伯께서 나에게 풍씨와의 혼인을 허락하셨는데, 어떻게 야외에서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를 수 있겠소?”
“예법에 의하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혼례를 치르면서 어찌 군사를 거느리고 가시려 합니까? 만약 영윤께서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성대한 혼례를 치르고자 하신다면, 무장은 해제하고 가십시오.”
오거가 은밀히 공자 위에게 말했다.
“鄭나라 사람들이 이미 알고 대비하는 것 같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 위는 군사들에게 활과 화살을 버리고 활집만 거꾸로 매고 가게 하였다. 군사들이 도성으로 들어가 풍씨를 맞이하여 관사로 모시고 왔다. 공자 위는 관사에서 혼례를 치르고, 회맹 장소인 괵 땅으로 갔다.
괵 땅에는 晉나라 조무(趙武)를 비롯하여 宋·魯·齊·衛·陳·蔡·鄭·許 등 각국 대부들이 먼저 와 있었다. 공자 위는 사자를 조무에게 보내 말했다.
“楚와 晉은 전에 맹약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호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니, 다시 맹약문에 서명하거나 삽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宋나라에서 서명한 맹약문을 한번 읽음으로써 각국의 대부들이 잊지 않도록 하면 족할 것입니다.”
기오(祁午)가 조무에게 말했다.
“공자 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晉이 앞장설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晉이 楚에 양보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 晉이 楚에 앞서서 회맹을 주관해야 합니다. 만약 지난번의 맹약문을 그대로 읽는다면, 楚가 항상 앞에 서는 꼴이 됩니다. 원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무가 말했다.
“공자 위가 회맹에 온 모습을 보니, 거처하는 것은 왕궁과 같고 위의(威儀)는 楚王과 다를 바 없소. 그 뜻이 단지 바깥으로 열국에 대해 오만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장차 안으로 반역을 모의하고 있을 것이오. 차라리 잠시 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뜻을 더욱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난번에는 굴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회맹에 왔었지만 다행히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또 공자 위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우리는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우호를 맺으려는 목적이 전쟁을 그치기 위해서요. 나는 다만 신의를 지키는 일만 알 뿐, 다른 일은 알지 못하오.”
열국의 대부들이 단에 오르자, 공자 위는 지난번의 맹약문을 읽게 하고 희생을 제단에 바쳤다. 조무는 ‘예’ ‘예’ 하면서 공자 위가 하는 대로 따랐다. 회맹이 끝나자, 공자 위는 급히 귀국하였다. 열국의 대부들은 공자 위가 장차 楚君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任教貴倨稱公子 거만한 공자가 제멋대로 하게 놓아두고
何事威儀效楚王 어찌하여 楚王의 위의를 흉내 내게 했던가?
列國盡知成跋扈 열국은 모두 공자의 발호(跋扈)를 알았는데
郟敖燕雀尚怡堂 연작 같은 겹오(郟敖)는 조당에서 마음 놓고 있었네.
[‘연작(燕雀)’는 ‘제비와 참새’인데, 도량이 좁은 작은 인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겹오(郟敖)’는 楚王 웅균을 지칭하는데, 군주의 지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을 초나라에서는 ‘오(敖)’라고 하였고, 겹(郟) 땅에 장례 지냈기 때문에 ‘겹오’라고 하였다.]
조무는 지난번의 맹약문을 다시 읽고 또 회맹을 주도하는 일을 楚나라에 양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일을 수치라고 말할까 염려되어 자신은 신의를 지켰을 뿐이라고 각국의 대부들에게 재삼 강조하여 말했다.
조무는 귀국하는 길에 鄭나라를 거쳐 가면서 魯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조무가 또 자신은 신의를 지켰다고 말하자, 숙손표가 말했다.
“상군(相君)께서는 전쟁을 그치겠다는 약속을 계속 말씀하시는데,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까?”
조무가 말했다.
“우리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조석(朝夕)으로 평안하기만 하면 되지, 어느 겨를에 먼 장래의 일을 묻습니까?”
숙손표는 물러나 鄭나라 대부 한호(罕虎)에게 말했다.
“조맹(趙孟; 조무)은 곧 죽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보니, 장래에 대한 계획이 없고 나이가 오십도 되지 않았는데 어투가 8~90세 노인처럼 간곡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 조무가 죽고, 한기(韓起)가 그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한편, 楚나라 공자 위가 귀국해 보니, 楚王 웅균이 마침 병이 나서 궁에 누워 있었다. 공자 위는 병문안을 하러 궁으로 들어가서, 은밀히 아뢸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비빈과 시종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공자 위는 관끈을 풀어 웅균의 목을 졸라 죽였다.
웅균에게는 막(幕)과 평하(平夏)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검을 들고 달려와 공자 위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공자 위의 용력이 대단하여 둘 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웅균에는 아우가 둘 있었는데, 우윤(右尹) 웅비(熊比)의 字는 자간(子干)이고, 궁구윤(宮廄尹) 웅흑굉(熊黑肱)의 字는 자석(子晳)이었다. 두 사람은 楚王 父子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워하여 웅비는 晉나라로 달아나고 웅흑굉은 鄭나라로 달아났다.
[웅비와 웅흑굉이 웅균의 아우라고 했는데, 착오가 있다. 제137회에 보면, 웅비와 웅흑굉은 강왕(康王)의 아우라고 했으니, 웅균의 숙부이다. ‘궁구윤(宮廄尹)’은 왕궁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공자 위는 열국의 제후들에게 부고를 알렸다.
“과군 웅균이 세상을 떠나고, 나 대부 위가 뒤를 이었습니다.”
오거가 부고를 보고, 말을 바꾸었다.
“공왕(共王)의 아들 중 장자인 위가 뒤를 이었습니다.”
공자 위는 왕위에 올라 이름을 웅건(熊虔)이라 바꾸었는데, 그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원파(薳罷)를 영윤, 정단(鄭丹)을 우윤(右尹), 오거를 좌윤(左尹), 투성연(鬥成然)을 교윤(郊尹)에 임명하였다.
태재(太宰) 백주리(伯州犁)가 공사(公事)가 있어 겹(郟) 땅에 가 있었는데, 영왕은 그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사람을 보내 죽였다. 그리고 웅균을 겹 땅에 장사 지냈다. 그리하여 웅균은 겹오(郟敖)라 불리게 되었다. 영왕은 원계강(薳啟疆)을 태재로 임명하고, 장자 녹(祿)을 세자로 삼았다.
영왕은 왕위에 오르자 더욱 교만방자(驕慢放恣)하여 중원의 패자가 되려는 뜻을 품었다. 오거를 晉나라로 보내 제후들을 소집해 달라고 청하고, 풍씨의 딸이 집안이 미천하여 부인으로 삼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晉侯에게 구혼하였다. 진평공(晉平公)은 조무도 막 세상을 떠난 데다 또 楚나라의 강성함이 두려워 감히 楚王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들어주었다.
주경왕(周景王) 6년, 초영왕 2년 겨울 12월, 정간공(鄭簡公)과 허도공(許悼公)이 楚나라로 왔는데, 영왕은 그들을 머물게 하고 오거가 晉나라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거가 돌아와 복명하였다.
“晉侯가 두 가지를 모두 승낙하였습니다.”
영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사신을 열국에 보내 내년 봄 3월 신(申) 땅에서 회맹할 것이라고 알렸다. 정간공이 자신이 먼저 신 땅으로 가서 제후들을 맞이하겠다고 청하자, 영왕이 허락하였다.
다음 해 봄, 열국의 제후들이 속속 신 땅에 당도했는데, 魯侯와 衛侯는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오지 않았고 宋나라는 대부 상수(向戍)를 대신 보냈다. 그 외 채(蔡)·진(陳)·서(徐)·등(滕)·돈(頓)·호(胡)·심(沈)·소주(小邾) 등의 군후들이 모두 친히 회맹에 참석하였다. 초영왕이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신 땅에 당도하자, 제후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였다.
우윤 오거가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패권을 도모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제후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예(禮)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晉나라에 청하여 처음 제후들을 소집하셨는데, 宋나라 상수와 鄭나라 공손 교(僑)는 모두 현명한 대부들로서 예를 잘 아는 자들입니다. 왕께서는 신중하십시오.”
영왕이 말했다.
“옛적에 제후들을 소집했을 때의 예는 어떠하였소?”
“하(夏)나라 계왕(啟王)은 균대(鈞臺)에서 향연을 베풀었고,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경박(景毫)에서 명을 내렸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맹진(孟津)에서 맹세하였고, 성왕(成王)은 기산(岐山) 남쪽에서 사냥하였고, 강왕(康王)은 풍(酆) 땅의 별궁(別宮)에서 조례를 받았으며, 목왕(穆王)은 도산(塗山)에서 회맹했습니다. 제환공(齊桓公)은 소릉(召陵)에서 군대를 사열했고, 진문공(晉文公)은 천토(踐土)에서 회맹했습니다. 이 여섯 왕과 두 공(公)은 모두 예를 지켰는데, 왕께서는 그 가운데 하나의 예를 택하십시오.”
[계왕은 우왕(禹王)의 아들로서 하나라의 두 번째 왕이다. 제47회에, 제환공이 소릉 땅에서 8국의 군대를 사열하면서 위세를 과시하여 초나라를 압박하였다. 제82회에, 진문공이 주양왕(周襄王)을 모시고 천토에서 회맹하여 방백(方伯)의 칭호를 받았다.]
“과인은 패자가 되고자 하므로, 마땅히 제환공이 소릉에서 행했던 예를 따르고자 하는데, 그 예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소.”
“여섯 왕과 두 공의 예에 대해서는, 신도 그 이름만 들었을 뿐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합니다. 제환공이 楚나라를 정벌하러 왔을 때 군대를 소릉으로 퇴각시켰는데, 楚나라 대부 굴완(屈完)이 오자 환공이 8국의 군대를 사열하면서 그 강성함을 과시하고 난 후에 제후들로 하여금 굴완과 맹약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제후들이 처음 우리 楚나라에 복종하였으니, 왕께서도 군대의 강성한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저들이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회맹을 하고 만약 두 마음을 갖는 자가 있을 때 토벌한다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과인이 제후들의 군대를 이용하여, 환공이 楚나라를 정벌한 것을 본받고자 하는데, 어느 나라를 먼저 정벌하는 것이 좋겠소?”
“齊나라의 경봉(慶封)이 그 군주를 시해하고 吳나라로 도망쳤는데, 吳나라에서는 그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총애하였습니다. 경봉은 주방(朱方) 땅에 종족들을 모아 전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 있어, 齊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吳나라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왕께서 용병하여 경봉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吳나라를 정벌하면 일거양득(一舉兩得)이 될 것입니다.”
“좋소.”
영왕은 병거를 늘어놓고서 제후들을 위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 땅에서의 회맹이었다.
[제133회에, 노포계가 난씨·고씨·진씨·포씨와 결탁하여 경씨 집안을 몰살했는데, 경봉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吳王 이매는 경봉에게 봉록을 후하게 주어 예전보다 부유하게 해주고 주방 땅에 거처하게 하면서 초나라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서(徐)나라 군주는 吳나라 여인의 소생이었는데, 영왕은 그가 吳나라 편에 붙지 않을까 의심하여 구금하였다. 사흘 후 서자(徐子)가 吳나라 정벌의 향도가 되겠다고 자청하자, 영왕은 그를 석방하였다.
영왕은 대부 굴신(屈申)으로 하여금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吳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굴신은 주방을 포위하여 경봉을 사로잡고 그 종족을 몰살하였다. 굴신은 吳나라가 이미 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경봉을 바쳤다.
영왕이 경봉을 처형함으로써 제후들에게 과시하려 하자, 오거가 간하였다.
“신이 듣건대, ‘허물이 없는 자가 남을 처형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봉을 처형했다가, 도리어 제후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영왕은 오거의 간언을 듣지 않고, 경봉에게 부월(斧鉞)을 등에 지게 하고 포박하여 군영 앞으로 끌어내었다. 군리(軍吏)가 경봉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죄를 자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강요하였다.
“각국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제나라 경봉은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군주를 능멸하였으며 대부들에게 맹세를 강요하였소! 여러분은 경봉과 같은 자가 되지 마시오!”
그러자 경봉이 큰소리로 외쳤다.
“각국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초공왕의 서자 공자 위는 형의 아들 웅균을 시해하고 왕이 되어 제후들에게 맹약을 강요하고 있소! 그와 같은 자가 되지 마시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왕은 부끄러워하며 빨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호증(胡曾)선생이 시를 읊었다.
亂賊還將亂賊誅 역적이 도리어 역적을 처형하였으니
雖然勢屈肯心輸 비록 기세가 꺾여 죽기는 했지만 승복했겠는가?
楚虔空自誇天討 초왕 웅건은 하늘을 대신하여 처형한다고 과시했지만
不及莊王戮夏舒 하징서를 죽였던 장왕의 업적에 미칠 수 있겠는가?
[제105회에, 하징서는 자신의 모친 하희(夏姬)와 놀아난 진영공(陳靈公)을 시해하였고, 초장왕은 陳나라를 정벌하고 하징서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영왕은 신 땅에서 楚나라로 돌아온 후, 굴신이 吳나라로 깊이 쳐들어가지 않고 주방에서 회군한 것이 혹 두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여, 굴신을 처형하고 그 아들 굴생(屈生)을 대부로 임명하였다.
원파가 晉나라에 가서 희씨(姬氏)를 모시고 왔고, 영공은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그해 겨울, 吳王 이매(夷昧)가 군대를 거느리고 楚나라를 침공하여, 극(棘)·역(櫟)·마(麻) 땅을 약탈함으로써 주방의 침략에 보복하였다. 초영왕은 크게 노하여, 다시 제후들의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하였다. 월군(越君) 윤상(允常)은 吳나라의 침략을 받고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 상수과(常壽過)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楚軍을 돕게 하였다.
[제132회에, 월나라가 윤상 때에 이르러 강성해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楚나라 장수 원계강이 선봉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吳나라로 쳐들어갔는데, 작안(鵲岸) 땅에서 吳軍에게 패하였다.
초영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나예(羅汭) 땅에 당도했는데, 吳王 이매가 종제(宗弟) 궐요(蹶繇)를 보내 楚軍을 호궤하였다. 영왕은 노하여 궐요를 붙잡아, 그를 죽이고 그 피를 북에 바르려고 하면서, 먼저 사자를 보내 물었다.
“너는 여기로 올 때 길흉을 쳐 보았느냐?”
궐요가 대답했다.
“점을 쳐 봤더니, 아주 길하다고 나왔습니다.”
사자가 말했다.
“우리 왕께서 너의 피를 북에 바르려고 하시는데, 무엇이 길하단 말이냐?”
“吳나라에서는 점을 치는 목적은, 사직의 일 때문이지 개인의 길흉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과군께서 저를 보내 楚軍을 호궤하게 한 것은, 楚王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 방어의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楚王이 吳나라 사신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 주신다면 폐읍은 경계가 느슨해지겠지만, 만약 사신의 피를 북에 바른다면 폐읍은 楚王이 진노했음을 알고 방비를 철저히 하여 楚軍을 막을 것입니다. 그러니 크게 길하지 않겠습니까!”
영왕이 말했다.
“그는 현명한 선비로다!”
영왕은 궐요를 석방하여 귀국시켜 주었다.
楚軍이 吳나라 경계에 당도했는데, 吳나라의 수비가 견고하여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영왕은 탄식하며 말했다.
“지난번에 굴신을 잘못 죽였구나!”
영왕은 회군하였다.
영왕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물력(物力)과 제도로써 제후들에게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화궁(章華宮)이라는 큰 궁전을 지었다. 가로세로 길이가 40리이고, 중간에 고대(高臺)를 쌓아 사방을 관망할 수 있게 하였는데, 고대의 높이가 30길이었다. 이름을 장화대(章華臺)라고 했는데, 삼휴대(三休臺)라고도 했다. 고대가 워낙 높아서 끝까지 올라가려면 중간에 세 번은 쉬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화대를 중심으로 궁실과 정자가 늘어서 있었는데, 모두 아주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장화궁 주위에는 백성들의 거주지가 있었는데,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도 모두 불러들여 죄를 사면해 주고 장화궁 건축에 동원하였다. 장화궁이 완성되자, 영왕은 사방의 제후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