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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류영렬회장님 작품과 환산정
1. 환산정은 전남 화순군 동면 서성리에 있으며 조선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류함(柳涵)선조가 통곡하며 은거생활을 위해 지은 정자로, 2010년 중건하면서 후손인 문화류씨서울권종친회 회장님의 상량문과 環山亭 原韻 (大明處士 百泉 柳涵) 그리고 環山亭重建有感 次韻(道山 柳暎烈), 義兵將 百泉 柳涵先生 倡義碑文을 소개합니다.
2. 환산정은 호수 위에 떠있는 작은 정원으로 벚꽃과 신록으로 아름다운 낙원, 가을과 겨울에는 아름다운 호수를 한번 들려 보면서 백천 선조의 자취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 : 도산과 환산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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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山亭重建上樑文
述夫 湖南勝地和順瑞巖山下有古亭者而大明處士諱柳涵考槃之所也環山圍水而淸風明月明鏡止水之秀麗處也穿林百泉潺湲會水成湖焉亭邊百丈孤松凌歲寒輪囷偃枝留夜月鶴唳瑟聲惹百韻而晩節黃菊含寒露月下凝霜三秋香陶愛屈好千句頌當時種菊連年看花也翁親栽松增歲壯翠矣提壺招飮詠之客春誦夏絃者對景探香來而應識故人之趣矣百泉府君我十三代祖丙子胡亂時倡義之士也以忠孝姿抱經濟志以仁義養性情寓風泉之思儒矣而賡酬雅韻與李芝峰鄭愚伏麗澤相資爲道義之交而曺九峯崔忍齋園林密邇是切偲之友丙丁虜亂者有史外亂中最痴大亂矣虜騎侵域數日漢城陷落天步艱難地維己盡迷路難向也急迫情況君父車駕播遷而臣子熊魚取舍社稷安危懸於頃刻之間焉公忠憤義激投筆退床與本縣諸賢及族孫白石楫協謨則募義兵招諸壯之士數百人而編伍練兵而泣血書心急到五百里淸州而不遠南漢山城嗟乎傳聞旣成講和條約哉歟此者屈辱之降書也恨嘆無地用武逐北不得時解師歸鄕將卒痛哭山川咸怨丈夫傷心其如何哉慟哭己盡身命衰弊此實蹟載湖南倡義錄及禮曹文記亭南十里許傳于彦洞祠則而此以鄕儒慕公之忠義學德崇仰之立祠羹墻之宇也而俎豆繼歲香芬載世也不啻同享配先考伯兄也而先考悅易齋德容以至孝命旌閭者也兄履義齋泓壬亂殉節宣武原從功臣錄鐵券者也季妹適海州崔氏夫君殉節仍殉從賜烈女旌門也而忠孝義烈四德兩代炫燿之門矣妥靈之所及幽宅指南十餘里外九水洞酉坐原焉嗚呼竊念此榭公歸環山結草構屋而歲久遺墟哉先祖之嘉遯逸處湮沒憂慮一八九六建陽丙申諸宗協謀而重建也自是星霜屢變亭頹地荒矣而經過三十七年之後一九三三年諸宗協謨再保修也星移物換己過七十七年柱礎傾毁楣椽腐朽蓋樑蠹壞景光頹落維持難望過者深憂裔孫震懼積矣事聞九重消息播郡接情郡守奉旨從公而仍以發殫心焉此心在崇義景德而政施文化遺跡保存之策耳憙!當地郡守特慮施德資財董督宗員鳩合名匠施工謀同一邑以至重建而棟樑益嚴垣墻整肅景光一新燕賀之喜衣冠咸頌此以吉辰何無稱頌耶玆陳善禱之短辭用贊偉抛之擧兒郞偉抛樑東.瑞巖物色三光同原韻珠聯含志趣心中日月九重紅兒郞偉抛樑西斥虜扶社朝野齊輒聞恥約千秋恨.罷師痛哭山川低兒郞偉抛樑南彦祠俎豆千載咸景仰文忠靑衿祭潛影孤亭碧水涵兒郞偉抛樑北扶桑日月肇無極回運皇宮建陽布光武鴻恩平一國兒郞偉抛樑上仰觀無際軌天象吾道總是原泗洙學來栗里先人唱兒郞偉抛樑下俯察春光和四野根深古柳又生枝探勝遊人頻繫馬伏願上樑之後遠外俗塵常有淸閑風聲益振絃誦咸興貞靈陟降衿紳遊學潛扶聖敎大振儒風.
西紀 二千十年 庚寅 重陽節
傍十三代孫 成均館典儀 道山 柳暎烈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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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산정중건상량문 <역문>
호남의 승지 화순서암산아래 늙은 정자는 大明處士 柳涵이 考槃을 즐기던 곳이다. 산을 두르고 물이 에워싸 바람 맑고 달이 밝아 명경지수의 수려한 곳이다 숲속에서 솟아나오는 백 줄기 샘이 졸졸 흘러 모인 물이 호수를 이루었다. 정변에 백길 老松은 歲寒에도 꿋꿋하고 고된 풍상에 구불구불 누운 가지에는 밤마다 달이 머물고 학의 울음과 맑은 바람소리는 백장의 시흥을 꼬득인다. 늦가을 黃菊은 찬이슬 머금었고 달 아래 서리 엉기어도 삼추의 향이 그윽하니 도연명과 굴원이 즐기던 시구를 노래 부르게 한다. 당시 심은 국화는 연연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노인이 가꾼 소나무는 연륜을 더해도 더욱 푸르네.
술병을 들고 마실 자와 읊을 자를 부르니 고인의 원운 시를 읊조린다. 춘송과 하현을 즐기는 자 勝景을 대하고 향기를 탐하니 뻑뻑이 고인의 정취를 알겠다.
백천부군은 나의 十三代祖이신데 병자호란 시 창의를 한 선비이다. 忠孝의 자질로써 경제의 뜻을 보듬었으며 仁義로서 性情을 기르고 風雅에 붙여 泉思의 義를 간직한 儒學者이시다
丁丙虜亂은 유사이래 환란 중 가장 치욕적인 대란이었다. 오랑캐군사가 역역을 침범한지 수일에 한성이 함락되고 天步가 어려울새 地維도 쇠하였다. 길이 희미하여 향배를 하기 어려운 급박한 상황 속에 御駕가 蒙塵했고 신하는 진수의 음식을 전폐하고 나라를 걱정했다네. 社稷의 안위가 頃刻之間일세 공께서는 충분의격하여 붓을 던지고 책상을 물리치고 일어나 본 고을의 諸賢과 族孫 白石 楫과 더불어 義旅를 모아 사직을 도울것을 협모하고 장정을 모으니 그 수효가 수백인이라. 대오를 편성하고 병술을 연마하여 울며 혈서를 쓰고 급히 오백리길 청주에 다다르니 남한산성이 멀지않은 지점이다.
슬프다. 朝淸강화조약이 체결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 들었다. 이 조약은 굴욕적항복문서이다 애달프기 그지없도다. 무력을 써서 北虜를 몰아내려 했는데 때를 얻지 못했도다. 군사를 해체하고 귀향할제 장졸도통곡하고 산천도 함께 슬퍼했다. 이때 장부의 심회가 어떠했을까 울다 지쳐 身命도 쇠했다네. 이 실적이 호남 창의록과 예조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정자 남쪽 십리쯤에 언동사가 전하니 이는 鄕儒가 공의 文과 忠을 숭앙하여 사당을 세운 羹墻의 집이라 俎豆가 해를 잇고 香火가 대를 이었음인져 . 그뿐인가 선고와 백형을 함께 배향했으니 선고는 열역재 德容이신데 지극한 효성으로 旌閭를 명받은 분이요 형 이의재 泓은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으로 철권에 책록된 분이며 계매는 海州崔氏에 시집갔는데 부군이 순절함에 따라 순종하여 烈女 旌門을 받은 분이니
忠孝義烈의 四德이 兩代에 걸쳐 顯曜하였다. 사당과 유택은 남쪽 십여리 밖 구수동유좌에 있다.
슬프다 조용히 생각하니 이정자는 공이 환산으로 돌아와 풀을 엮어 정자를 꾸리었던 세월 오랜 옛터이다. 先祖가 아름답게 은둔했던 한일한 곳이 없어질까 우려하여 1896년 建陽丙申에 여러 一家가 協謀하여 重建한 것인데, 이로부터 37년이 지난 후 1933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물정이 바뀌어 77년이 지난 이제 柱礎가 기울고 헐었으며 도리와 석가래 가 썩고 이지러졌는가하면 지붕과 대들보가 좀이 먹어 파괴되어 경광이 퇴락하여 유지하기 난망이라. 지나는 자 근심이 깊고 예손들이 震懼가 싸였다. 사실이 궁궐에 들리고 소식이 군내에 퍼졌다. 군수가 정황을 접하고 교지를 받들고 공론을 좇아 이에 殫心을 발하니 崇德과 景德의 마음이라. 또한 이는 정부가 펴는 문화유적보존정책의 하나인 져.
기쁘다 군수께서 특별한 생각으로 덕을 베푸심에 재물을 자뢰해주고 일을 감독하였다 이에 종원들도 재원을 모아 협력하였다 名匠이 施工함에 온 군민이 힘을 함께하여 중건하게 되니 동량이 더욱 위엄있고 담장이 정숙하여 경관이 일신하니 제비가 기뻐 지저귀고 衣冠들이 頌辭를 읊는구나. 이 같은 좋은날에 어찌 칭송이 없으리요. 이에 기도하는 짧은 시를 지어 상량하는 큰일에 돕고자 한다.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서암산 물색에 삼광이 함께 머무니 공이 남긴 原韻 명구에 지취를 머금었다. 마음속 품은 일월은 궁궐 안에 붉고나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오랑캐 물리치고 사직을 바로 세우려 조야가 함께 했는데 문득 들린 부끄러운 조약 천추에 한 이로다. 군사 풀고 통곡할 제 산천도 숙연했네.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언동사 俎豆가 千載를 함께 하니 문과 충을 景仰하여 靑衿이 제사했네. 호수에 비친 외로운 정자 푸른 물에 젖는구려.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扶桑의 일월이 無極을 지어내니 운을 맞은 皇宮이 建陽을 선포했고 光武의 鴻恩이 일국을 평안하게 했네.
어영차 들보를 위쪽으로 던진다. 하늘을 쳐다보니 끝없는 허공에 천체는 궤를 따름인져 우리의 유도는 모두 洙泗에 근원 했음이니. 학문은 栗里에서 전래하여 선인들이 노래했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던진다. 굽어보니 춘광이 四野에 화창한데 뿌리깊은 늙은 버들 다시 가지를 치는데. 승광을 즐기는 놀이꾼들 자주 말을 매는구나.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후에 俗塵을 멀리하고 항상 淸閑을 있게하여 風聲을 더욱 떨치게하고 絃誦이 함께 일어나 精靈이 陟降하며 선비들 遊學하고 聖敎가 扶植하여 儒風이 크게 일게 하소서
西紀 二千十年 庚寅 重陽節
傍십삼대손 성균관전의 道山 柳暎烈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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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山亭
原 韻 <大明處士 百泉 柳涵>庭有孤松階有菊 [정유고송계유국]
學來栗里晋先生 [학래율리진선생]
乾坤磊落違初計 [건곤쇠락위초계]
山水幽閒托晩情 [산수유한탁만정]葉上春秋忘甲子 [엽상춘추망갑자]
心中日月保皇明 [심중일월보황명]
歲寒後操其誰識 [세한후조기수식]
時與山翁和不平 [시여산옹화불평] < 역 문 > 뜰에는 孤松이요 섬돌에는 菊花로다 栗里의 진선생 학풍을 쫓아 사네.건곤은 뇌락한데 초지를 어기고서산수의 한가한 곳 찾아 만정을 붙인다.세월속의 춘추는 갑자도 잊었거니심중의 일월은 임의 곁을 밝히노라 세한후의 지조를 그 뉘가 알아주랴때는 청산과 더불어 한을 삭힌다.
감상
뜰에는 솔을 심고 섬돌에 국화 가꿔/ 晉나라 栗里의 陶潛학행 쫓아 사리
건곤은 의연한데 초지를 어기고서 / 산수가 그윽한 곳 늦게 정을 붙이었네.
명협 잎은 긴 세월에 갑자도 모르건만 / 심중의 붉은일월 임을 위해 밝힌다.
세한후의 이내지조 그 뉘가 알아주랴 / 때와 청산과 더불어 깊은한을 삭히리
주)
1. 율리(栗里);땅이름. 晉나리의 도연명이 살던 곳. 강서성 구강시 남쪽에 있다.
2. 진선생(晉先生)-陶潛을 말함 ; 동진의 자연시인, 벼슬길에 올랐으나 뜻을 접고 80여 일 만에 귀고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벼슬을 떠나 전원에서 생활하였음.
3. 學來栗里晉先生 ; 중국 동진의 율리에 도연명 학행을 본받아 전원에서 산다는 뜻
4. 뇌락(磊落) ; 큰 모양.* 밝은 모양.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모양
*乾坤磊落違初計 ; 우주자연의 큰 이치는 변함 없는데 나는 초지를 어기고 초야에서 무쳐 지낸다는 뜻
5. 엽상(葉上) ; 잎파리위-입사귀 위 즉 명협蓂莢잎-예날 堯임금시대에 있던 서초 //달력이 없을 때 잎이 나고 잎이 지는 것을 보고 한 달이 바뀌는 것을 알았다 즉 세월
6. 보황명(保皇明) -임금이 밝고 평안하도록 마음속 忠誠心을 보내 보호함
7. 산옹(山翁) ;산을 높이는 존칭어. 한시에서는 廉과 字數를 맞추기 위하여 전래의 詩語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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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山亭重建有感
次韻 道山 柳暎烈
環亭重建景光肅 [환정중건경광숙]
回憶當年萬感生 [회억당년만감생]
逐虜斥和興義旅 [축로척화흥의려]
解師歸苑托悲情 [해사귀원탁비정]
爲王勁節英雄志 [위왕경절영운지]
扶社貞忠日月明 [부사정충일월명]
顯晦乾坤回運際 [현회건곤회운제]
靈識建陽息不平 [영식건양식불평]
<역문>
환산정을 중건하니 경광이 엄숙하네
당년을 회상하니 많은 감회 이는 구나
오랑캐 물리치려 의병을 일으켰다가
군사 풀고 귀향하여 슬픈 정을 붙이었네.
성왕을 위한 굳은 節義 영웅의 의지였소
사직을 붙들려든 貞忠은 밝기가 일월이라.
顯晦하는 건곤진리 다시 운이 돌아오니
尊靈께서 建陽을 아시고 한을 삭히시리.
傍十三代後孫 道山 暎烈
주)현회顯晦; 밝았다 어두웠다 함 // 영지靈識; 영혼이 잘 앎*익히 앎
건양 建陽 ; 조선(朝鮮) 개국(開國) 505년만에 처음 쓴 연호 * 고종(高宗) 33년부터 다음해 7월까지의 연호(年號)<서기(西紀) 1896년부터 1897년까지>* 청나라 속국을 폐함 선포.*2년 후 다시 1897년光武로 고쳐 7년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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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將 百泉 柳涵先生 倡義碑
義兵將 百泉 柳涵先生 倡義碑銘 倂序
湖南은 자고로 忠臣烈士와 名公碩學이 많이 배출된 義鄕이다.
和順에는 丙子胡亂시 社稷의 保全이 어려울적에 붓을 던지고 초야에서 奮然히 일어나 義旅를 모아 남한산성까지 진군했던 義兵將이 있으니 百泉 柳涵先生이다.
공의 諱는 涵이요, 字는 子淨이며 호는 百泉이다 성은 柳氏로 관은 文化이고 시조 고려개국공신 大丞公 휘 車達의 후손이며 派祖이신 檢漢城公 휘 元顯의 七世孫이다.
考는 德容이니 號는 悦易齋인데 孝로 旌閭를 받은 분이요 妣는 安東金氏로 縣監 洢의 따님이다.
公은 一五七六年宣祖 丙子 正月三日 출생하니 天性이 嚴重하고 動靜은 節度있으며 喜怒를 나타내지 않았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평소 壬亂時 伯兄柳泓이 殉節함을 슬퍼하고 형의 충절을 흠모 공의 長劍을 어루만지며 武藝를 닦았다. 科擧工夫를 힘쓰지 않고 性理學에 專心하여 芝峯李晬光과 愚伏鄭經世와 荷谷許葑으로 더불어 도의로 交友하여 理氣問答과 四書說이 전한다.
丙子胡亂(一六三六年十二月~一六三七年一月)은, 청나라오랑캐군사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이 발발한지 수일만에 한성이 함락되고 天步가 어려울 때 地維도 쇠하였다. 국방이 혼란하고 국정이 혼미한 상황 속에 御駕는 南漢山城으로 蒙塵했고 社稷의 안위가 頃刻之間일 때 공께서는 忠憤義激하여 族從孫 諮議 楫과 叅奉 曺守誠과 監役 曺熀과 處士 崔鳴海 등 本 고을의 諸賢들과 더불어 倡義를 도모하여 義兵廳을 설립하고 여러 고을에 檄文을 돌리니 一旬間에 義兵이 數千人이요, 糧穀이 數百石에 이르렀다. 급모한 義旅들로 대오 편성한 의병은 義兵都大將에 曺守誠을 推戴하고 百泉 柳涵등 십 여 명을 副將에 任命. 陣容을 편성하고 築壇持鉞의 예를 갖추어 北向四拜하고⌜皇天이 위에 있어 日月이 밝게 비추고, 神明이 조감하도다. 무릇 우리 同盟 勤王軍은 死力을 다해 싸우되 赴湯蹈火할지라도 唯攻無退라, 만일 越盟하는 者가 있으면 하늘이 罰 할 것이요 백성이 斬할 것이다⌟ 會盟錄에 血書할새 山川이 肅然하고 軍威가 衝天이요. 出征에 旌旗蔽空에 鼓角動地로다.
戰勢가 급박함에 대오를 이끌고 급히 오백리길 清州에 다다르니 義兵將 李興浡이 賊情을 探知하다가 包圍되어 危境에 처했을 때 公이 兵士들과 奮力하여 賊魁九級을 목 베고 兵器를 뺏으니 적이 退却하였다. 諸將卒이 기뻐 서로 축하하니 公曰 出師 二十餘日에 賊首九獲이 國益에 무슨 도움이되리요 하고 재차 兵卒을 독려 進軍중 남한산성 오십 리쯤 이르렀을 때 媾和의 소식을 접했다.
아! 슬프다. 北虜馬蹄가 海東에 蠢動하고 十萬胡旗가 漢陽의 天日을 가리도다. 임란종료 사십년에 병자호란 웬 말인가. 朝淸강화조약은 굴욕적 항복문서이다. 哀惜하도다 三拜九叩頭의 항복례여! 청사에 얼룩진 오욕의 흔적 三田渡汗碑를 어떻게 雪恨하리요
무력으로써 북쪽오랑캐를 몰아내고 사직을 보위하려 창의했는데 아! 애달프다. 때를 얻지 못했도다. 군사를 해체하고 귀향할 때 장졸도 통곡하고 산천도 함께 슬퍼했다. 이때 장부의 心懷가 어떠했을까 울다 지쳐 신명(身命)도 쇠했다네. 이때 실정이 호남 창의록 과 예조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화순동면 瑞城里 瑞巖山下 늙은 亭子 環山亭은 선생께서 만년의 憂國의 恨을 삭이던 考槃의 정각이다. 때로 逍遥하고 吟咏으로 自娛하며 風泉의 思를 부치니 글에
⌜뜰아래 松菊 가꾸며 陶潛의 學行을 배우도다. 初計를 이루지 못하고 산수 간에 늦은 정을 부쳐 세월은 잊고 살지만 心中日月은 主上의 곁에 있어 皇明을 保하도다. 歲寒후의 지조를 그 누가 알아주리. 늙은이는 세월과 산천을 더불어 한을 삭인다.⌟ 늙은 정각 한 귀퉁이에 공의 原韻 한수가 전하여 嚴霜烈日의 大節貞心과 推誠壯氣는 만고에 龜鑑이요 句句의 懷恨은 천년의 한으로 오늘도 後學의 心琴을 울린다.
정자 남쪽 십리쯤에 彦洞祠가 전하니 이는 鄕儒가 公의 文과 忠을 崇仰하여 사당을 세운 羹墻의 집이라 俎豆가 해를 잇고 香火가 대를 이었음인 져.
그뿐인가 또 아름다운일은 선고 悅易齋 德容은 지효로 孝子旌閭를 命받은 분이요 형 履義齋 泓은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殉節하여 宣武原從功臣으로 鐵券에 策錄된 분이며 백천공은 병란에 창의하고 季妹는 海州崔瑞生의 부인으로 順從하여 烈女旌門을 받은 분이니 忠孝義烈의 四德이 一門에 炫燿함이라.
一六六一年 辛丑正月18日 86세의 遐壽를 누리고 卒하니 배위는 昌寧曺氏로 五男三女를 養育하였다.
善行을 상줌은 천만인에 勸善하는 것이요 국가의 혁혁한 공로가 있는 자를 鼎鐘에 새김은 후세에 龜鑑을 삼고자 함이라. 국가안위가 風前燈火일 제 百泉公의 倡義는 護國盡命이어늘 丹心貞忠을 伐石刻銘하여 永世顯彰하여야 할 일인데 이제까지 일이 늦었음은 後學의 悚懼之事라.[의병장백천류함선생창의비] 건립추진위를 발기하니 一郡靑衿이 欣然同參하였다.
오호라! 왜란과 호란의 큰 外侵을 거듭 당하니 국운의 불행만을 탓 할 손가.
自强不息과 有備無患이 진정 한 나라의 독립과 平和를 보장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切感하고 위대한 護國精神을 千秋에 기리고 자 빗돌을 높이세우고 銘을붙인다
銘曰
壬亂七年兮 殲倭逐瀛 國運回泰兮 戰禍未平
僅過四十兮 蔽空狄旌 虜蹄蠢動兮 數日逼京
主上蒙塵兮 南漢孤城 社稷安危兮 風前燈明
義激投筆兮 烈日忠貞 嗚呼違計兮 歸園晩情
齊發倡義兮 扶社一聲 義旅編成兮 築壇會盟
自强不息兮 富國强兵 有備無患兮 永保國榮
西紀 二千十一(辛卯)年 十一月 日
成均館典學 傍孫 暎烈 敬撰
全州人 李圭珩 謹書
文化柳氏檢漢城公派和順宗親會 後援
百泉柳涵先生倡義碑建立推進委員會 謹竪
와비
義兵將百泉柳涵先生倡義碑建立記
백천공 류함은 병자호란시 호남에서 창의한 선비로 의병도대장 曺守誠 막하 副將을 역임하였다. 동면 瑞巖山下 늙은 정자 環山亭은 선생께서 만년의 憂國의 恨을 삭이던 古槃의 곳이다. 정자 남쪽 십리쯤에 彦洞祠가 전하니 이는 鄕儒가 공의 文과 忠을 숭앙하여 사당을 세운 羹墻의 집이라. 俎豆가 해를 잇고 香火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작년가을 화순군의 지원으로 퇴락한 환산정을 중수하고 낙성할 때 군내유림 다수가 모여 경축하고 아름다운 자취를 살피며 공이 남긴 原韻을 음영할 제 선생의 고고한 학행과 나라를 구하고자 倡義한 憂國 之情에 感慕하고 외외한 嚴霜烈日의 護國精神은 우리호남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千秋에 기리어야할 일이라는데 뜻을 같이하고 재물을 모아 빗돌을 높이 세우니 瑞巖山 日月이 더욱 밝게 비추도다.
西紀 二千十一年 十一月 日
百泉柳涵先生倡義碑建立推進委員會
<번역문>
의병장 백천 류함선생 창의비
의병장 백천 류함선생 창의비명 병서
호남은 자고로 충신열사와 명공석학이 많이 배출된 의향이다.화순에는 병자호란시 사직의 보전이 어려울적에 붓을 던지고 초야에서 분연히 일어나 의려를 모아 남한산성까지 진군했던 의병장이 있으니 백천 류함선생이다.
공의 휘는 함이요. 자는 자정이며 호는 백천이다 성은 류씨로 관은 문화이고 시조 고려개국공신 대승공 휘 차달의 후손이며 파조이신 검한성공 휘 원현의 칠세손이다.
고는 덕용이니 호는 열역재인데 효로 정려를 받은 분이요 비는 안동김씨로 현감 이의 따님이다.
공은 1576년 선조병자 正月三日 출생하니 천성이 엄중하고 동정은 절도 있으며 희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평소 임란시 백형류홍이 순절함을 슬퍼하고 형의 충절을 흠모 공의 장검을 어루만지며 무예를 닦았다. 과거공부를 힘쓰지 않고 성리학에 전심하여 지봉 이수광 과 우복 정경세와 하곡 허봉으로 더불어 도의로 교우하여 이기문답과 사서설이 전한다.
병자호란(1636년12월~1637년1월)은, 청나라오랑캐군사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이 발발한지 수일만에 한성이 함락되고 천보가 어려울 때 지유도 쇠하였다. 국방이 혼란하고 국정이 혼미한 상황 속에 어가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했고 사직의 안위가 경각지간일 때 공께서는 충분의격하여 족종손 자의 즙과 참봉 조수성과 감역 조엽과 처사 최명해 등 본 고을의 제현들과 더불어 창의를 도모하여 의병청을 설립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니 일순간에 의병이 수천인이요, 량곡이 수백석에 이르렀다. 급모한 의려들로 대오 편성한 의병은 의병도대장에 조수성을 추대하고 백천 류함등 십 여 명을 부장에 임명. 진용을 편성하고 축단지월의 예를 갖추어 북향사배하고⌜황천이 위에 있어 일월이 밝게 비추고, 신명이 조감하도다. 무릇 우리 동맹 근왕군은 사력을 다해 싸우되 부탕도화할지라도 유공무퇴라, 만일 월맹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벌 할 것이요 백성이 참할 것이다⌟ 회맹록에 혈서할새 산천이 숙연하고 군위가 충천이요. 출정에 정기폐공에 고각동지로다.
전세가 급박함에 대오를 이끌고 급히 오백리길 청주에 다다르니 의병장 이흥발이 적정을 탐지하다가 포위되어 위경에 처했을 때 공이 병사들과 분력하여 적괴구급을 목 베고 병기를 뺏으니 적이 퇴각하였다. 제장졸이 기뻐 서로 축하하니 공왈 출사 이십여일에 적수구획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되리요 하고 재차 병졸을 독려 진군중 남한산성 오십 리쯤 이르렀을 때 구화의 소식을 접했다.
아! 슬프다. 북노마제가 해동에 준동하고 십만호기가 한양의 천일을 가리도다. 임란종료 사십년에 병자호란 웬 말인가. 조청강화조약은 굴욕적 항복문서이다. 애석하도다 삼배구고두의 항복례여! 청사에 얼룩진 오욕의 흔적 삼전도한비를 어떻게 설한하리요
무력으로써 북쪽오랑캐를 몰아내고 사직을 보위하려 창의했는데 아! 애달프다. 때를 얻지 못했도다. 군사를 해체하고 귀향할 때 장졸도 통곡하고 산천도 함께 슬퍼했다. 이때 장부의 심회가 어떠했을까 울다 지쳐 신명(身命)도 쇠했다네. 이때 실정이 호남 창의록과 예조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화순동면 서성리 서암산하 늙은 정자 환산정은 선생께서 만년의 우국의 한을 삭이던 고반의 정각이다. 때로 소요하고 음영으로 자오하며 풍천의 사를 부치니 글에
⌜뜰아래 송국 가꾸며 도잠의 학행을 배우도다. 초계를 이루지 못하고 산수 간에 늦은 정을 부쳐 세월은 잊고 살지만 심중일월은 주상의 곁에 있어 황명을 보하도다. 세한후의 지조를 그 누가 알아주리. 늙은이는 세월과 산천을 더불어 한을 삭인다.⌟늙은 정각 한 귀퉁이에 공의 원운 한수가 전하여 엄상열일의 대절정심과 추성장기는 만고에 귀감이요 구구의 회한은 천년의 한으로 오늘도 후학의 심금을 울린다.
정자 남쪽 십리쯤에 언동사가 전하니 이는 향유가 공의 문과 충을 숭앙하여 사당을 세운 갱장의 집이라 조두가 해를 잇고 향화가 대를 이었음인 져.
그뿐인가 또 아름다운일은 선고 열역재 덕용은 지효로 효자정려를 명받은 분이요 형 이의재 홍은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으로 철권에 책록된 분이며 백천공은 병란에 창의하고 계매는 해주최서생의 부인으로 순종하여 열여정문을 받은 분이니 충효의열의 사덕이 일문에 현요함이라.
1661년신축정월18일 86세의 하수를 누리고 졸하니 배위는 창녕조씨로 5남3녀를 양육하였다.
선행을 상줌은 천만인에 권선하는 것이요 국가의 혁혁한 공로가 있는 자를 정종에 새김은 후세에 귀감을 삼고자 함이라. 국가안위가 풍전등화일 제 백천공의 창의는 호국진명이어늘 단심정충을 벌석각명하여 영세현창하여야 할 일인데 이제까지 일이 늦었음은 후학의 송구지사라.[의병장백천류함선생창의비] 건립추진위을 발기하니 일군청금이 흔연동참하였다.
오호라! 왜란과 호란의 큰 외침을 거듭 당하니 국운의 불행만을 탓 할 손가.
자강불식과 유비무환이 진정 한 나라의 독립과 평화를 보장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절감하고 위대한 호국정신을 천추에 기리고 자 빗돌을 높이세우고 명을 붙인다.
명왈
임란칠년혜 섬왜축영 국운회태혜 전화미평
(임란칠년 전쟁에 왜적을 섬멸 동해밖으로 물리쳤고 / 국운이 회태했으나 전화는 평정하지 못했는데)
근과사십혜 폐공적정 노제준동혜 수일핍경
(겨우 사십년을 지나 되놈깃발이 창공을 덮었네 / 노제 준동하여 수일에 서울에 닥쳐왔다)
주상몽진혜 남한고성 사직안위혜 풍전등명
(주상은 남한산성에 몽진하고 사직의 안위는 풍전등화 같네.)
의격투필혜 열일충정 오호위계혜 귀원만정
(충분의격하여 붓을 던지니 정충은 열일이었다네 / 슬프다.초지를 어기고 귀원하여 만정을 삭히셨다.)
제발창의혜 부사일성 의여편성혜 축단회맹
(일제히 일어난 창의는 호국의 일성이라 / 의여를 편성하고 단을 쌓고 회맹했다.)
자강불식혜 부국강병 유비무환혜 영보국영
(자강을 쉬지 않아야 부국강병 이루나니 / 유비무환만이 기리 국영을 보전한다네.)
서기 2011년 11월 일
성균관전학 방손 영렬 경찬
전주인 이규형 근서
문화류씨검한성공파화순종친회 후원
백천류함선생창의비건립추진위원회 근수
와비
의병장백천류선생창의비건립기
백천공 류함은 병자호란시 호남에서 창의한 선비로 의병도대장 조수성 막하 부장을 역임하였다. 동면 서암산하 늙은 정자 환산정은 선생께서 만년의 우국의 한을 삭이던 고반의 곳이다. 정자 남쪽 십리쯤에 언동사가 전하니 이는 향유(鄕儒)가 공의 문과 충을 숭앙하여 사당을 세운 갱장(羹墻)의 집이라. 조두(俎豆)가 해를 잇고 향화(香火)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작년가을 화순군의 지원으로 퇴락한 환산정을 중수하고 낙성할 때 군내유림 다수가 모여 경축하고 아름다운 자취를 살피며 공이 남긴 원운(原韻)을 음영할 제 선생의 고고한 학행과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한 우국 지정에 감모하고 외외한 엄상열일의 호국정신은 우리호남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천추에 기리어야할 일이라는데 뜻을 같이하고 재물을 모아 빗돌을 높이 세우니 서암산 일월이 더욱 밝게 비추도다.
서기 2011년 11월 일
백천류함선생창의비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