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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거의 모든 개봉관에서 막을 내린 이 영화를 지난 주말에야 겨우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간만에 만나는 저력과 뚝심의 영상이었습니다.
시가 죽고 시인이 죽고 시인마저 시를 자해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이 영화 한편을 보며
반성과 감동을 느낀다는 말은 착각이거나 사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이 영화 보면서 아직 감동할 수 있는 한자락의 여유가 남아 있기를 그리고 늘
함께 하기를 빌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의 글들은 따로 제 블로그에 모았고 그 중에서 일부만 발췌하여
이곳에 옮겼습니다... (http://blog.daum.net/elbeece)
* 노무현의 이창동은 '시(詩)'를 남겼고 이명박의 유인촌은 '시발'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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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 - 내가 온 몸으로 운 까닭
강철군화의 시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S#1 강철군화의 시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강철군화>는 고전의 반열에 든 소설 <늑대개>의 작가 잭 런던이 쓴 작품이다. 190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경제적 부를 독점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제 사회를 그린다. 문제는 그가 상상력을 통해 추출해낸 소수사회의 비전이 오늘날 융기하는 사회문제들의 형상과 동질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갈등을 묘사한 르포문학이자 파시즘을 예언한 작품 <강철군화>. 소수 자본가를 위해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도록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 <시>와 소설<강철군화> 사이엔 직접적 상관관계는 없다. 영화 속 파출부 생활을 하며 생활보호대상자로, 딸의 이혼 후 맡겨진 중학생 손자 동욱과 사는 양미자. 그녀를 둘러싼 사회의 풍경은 <강철군화> 속에 묘사된 그것과 닮았다.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여중생을 둘러싼 중산층과 교육 담당자들이 보이는 은폐 기도는 가진자의 범죄는 잊혀지고, 무산자의 범죄는 형벌 당하는 이중적 모순의 사회적 자화상일 뿐. 영화 <시>는 이런 시대의 외피 속에서, 여린 꽃잎같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S#2 꽃이 흐른다, 물 위의 잔영 위로
영화에는 물과 꽃의 중첩된 이미자가 자주 등장한다. 양미자는 밝고 화사한 꽃무늬가 찍힌 옷을 즐겨 입는다. 모자와 스톨까지 걸친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한송이 무르익은 꽃의 현현이다. 그녀는 우연히 문화센터에서 시 강의를 들으며 시작에 몰두한다. 강사로 출연한 김용탁(택)은 실제 시인이다. 연기인지, 실제 강의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자연스런 느낌을 발산하는 시인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의 말이다. "시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예쁘게 깍은 연필과 백지만 있으면 배가 불렀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렇다. 시는 새롭게 잉태할 수 있는 희망을 벼리는 가능성의 넒은 우주를 담는다.
▲ 영화 <시> 시상을 찾아 메모하는 그녀, 그녀가 입은 옷에 주목해보라
그녀는 시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려 노력한다. 내가 지금껏 먹었던 사과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속살을 쪼개고 맛보고, 껍질의 톳톳한 느낌을 이해해본다. 그럼에도 글은 쉽게 실타래 풀리듯 잉태되지 않는다.
이때 물 위로 여중생의 사체가 떠오른다. 아이의 이름은 박희진. 아네스란 세레명을 갖고 있다. 사건의 배후에는 손자 동욱이도 포함되어 있다. 학교 담당자들과 가해가의 아버지들은 돈으로 '화해'를 이루려 부단 애를 쓴다. 황미자가 시로 그리려 했던 아름다움의 세계에 침범한 이 담즙 같은 세상. 그녀는 진저리친다.
시 낭송 모임 후 회식자리에 들어온 김용택 시인과 황병승 시인(영화에 실제 시인으로 등장한다)은 시의 희망론과 무용론을 늘어놓는다. '시가 죽어간다'고. 시가 죽어간다기 보다, 글의 진정성과 휴머니티를 담아내야 할 그릇인 세상이 온통 균열의 틈새로 가득해서는 아닐까?
S#3 한 편의 단아한 시를 쓰기 위하여
영화 <시>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당당히 말하련다. 그 이상의 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조심스럽다. 문학적 상상력이 기반한 탄탄한 각본 위에, 덧입혀진 영상은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배열로 맥이 빠진다. 양미자가 손자를 위해 돈을 구하러 가는 모습,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며 물가에서 비오는 날, 모자를 날려버리고 빗물에 축축하게 젓은 백지 위로 시를 써내려 가는 모습, 이후 비에 젖은 채 피간병인인 회장과 육체관계를 맺는 그녀.
기호학을 들먹이자면, 물가는 죽음과 망각의 공간이다. 자신의 내면속에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단아한 시 한편을 남기고 싶은 그녀. 비가 내린다. 정화의 의미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속건제일 뿐. 비에 젖은 채 자신이 간병하는 '회장과 관계를 맺는다. 마초이즘과 성폭력, 남성들의 거세된 욕망을 상징하는 그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손자를 포함한 5명의 아이들의 손에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고, 동일한 값을 치러 죄의 사함을 얻는다.
영화 속 그녀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치매 초기증상의 그녀는 지금껏 배워온 명사들을 하나씩 망각한다. 이어서 동사를 잊게되면 곧 죽음을 맞는다. 언어체계가 사멸하는 과정이 어찌 인간의 삶과 닮았음을, 그 유사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모든 언어를 잊어간다고, 그저 갓 태어났을 때, 엄마에게 사용하던 짦은 단어만이 떠올랐고 이 언어로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는 관습의 무게에 억눌린 사회의 사물, 언어의 외피를 뚦는 은빛탄환이다. 그리고 그 탄환을 빚는 힘은 인간의 영혼속에 잠재된, 아름다움을 찾는 욕구다. 이 느낌이 곧 시로 탄생한다. 잊지말자 순수해야 함을.
이제 그녀는 시를 쓸 수 있다. 정화된 몸으로, 상처가 더깨더깨 누적되어 혀의 무게를 누르는 시간을 넘어갈 시간이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어차피 영화 속에서도 짙은 암시만을 남긴 열린 결말만 선보인다. 시의 가능성이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어 해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일 거다. 각본상 수상작답게 영화 속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유해볼 만한 언어다. 이렇게 좋은 각본에 0점을 부여한 영진위는 화 있을진저.
동 시대에 이창동 감독과 같이 좋은 분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시의 무용론이 판치는 시대, 여전히 유효한 시의 힘을 보여준, 이창동 감독의 <시>, 놀랍고도 놀랍다. 이런 영화가 자꾸 상영관 숫자가 줄다니, 그들의 표현을 빌어 '유감일 뿐이다'
2010.5.27 김홍기(film2907)기자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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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풍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침입하고…
<시>에서 이창동은 패를 다 까고 판에 임하는 도박사와 같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감이 잡히는 상태에서 2시간여를 끌고 가는 뚝심이 경이적으로 느껴질 즈음, 바닥까지 내려간 이야기의 리듬이 서서히 고조되는데, 마지막 20여분 동안 치고 올라오는 고통 속의 마음 출렁임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이 영화의 관점에 따르면 그건 주인공 할머니 미자, 오로지 그녀만 보게 되는 아름다움 속의 고통, 혹은 고통 속의 아름다움이다.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심한데 푼수기 있고 백치적 천진함이 있는 이 할머니만 거기 도달한다.
이창동은 이미 <밀양>에서 더 심심하고 낮은 데로 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이라는 캐릭터는 알 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 서서 스스로의 무력함에 이를 악물며 버티는 겸허함을 보이는 신애와 달리 실실거리면서도 그 고통의 내재화를 무의식적으로 이뤄내는 인간 존재의 고양된 순간을 보여준다. 그걸 이뤄낸 것에 이창동 영화의 작은 전환점이 있다. <시>의 여주인공 캐릭터 미자는 종찬의 확대된 버전이다. 겉으로 심심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 어마어마한 윤리적 운동을 깔아놓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적인 이 영화는 우연히 문화회관에서 여는 시 강좌에 출석한 미자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한달여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시를 써본 적 없는 미자는 하필이면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을 겪는 인생 말년에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딸에게도, 주변 이웃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녀의 열망은 결국 관객만 아는 형태로 완성된다. 그런데 매우 비극적인 형태로 완성된다.
<시>에서 미자가 보여주는 푼수기와 허용은 관객인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 아니다. 그녀의 푼수기는 오히려 타자를 향한 접촉과 공감을 향해 열려 있는 긍정적 자질이다. 영화 초반에 병원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에서 나는 휴대폰 소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해 찾고 있다가 남의 것으로 판명되자 멋쩍게 웃으면서 옆사람을 그녀가 쳐다볼 때 옆사람은 그녀의 미소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미자가 진찰을 받고 병원 앞을 걸어 나올 때 화면에는 딸의 죽음에 오열하는 여중생 박희진 엄마의 모습이 나타난다. 카메라는 긴 동선으로 미자와 희진 엄마의 모습을 커트 없이 한 공간에서 이어준다. 연출로 맺어준 이 공간 속의 동시 출현의 느낌은 주변 일에 반응하는 미자 캐릭터의 마음과 조응하는 것이며 이는 그녀가 시를 쓰는 자질과도 통한다.
미자가 나가는 시 강좌에서 저명한 김용탁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한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거듭 변주되는 모티브인데, 미자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시상은 주변에 있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미자가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는 것은 훨씬 뒤에 아주 잔인한 순간에 일어난다. 처음에 미자는 부질없이 초등학생처럼 시인의 말에 문자 그대로 매달린다. 시인이 본다는 것의 예로 든 사과를 집 식탁에 놓고 앉아 미자는 그걸 뚫어지게 바라본다. 외손자 종욱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아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궁금해 방 안에 들어가 사과를 줄까 권유했다가 타박받은 뒤에 미자는 사과를 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깎아먹는 거야.” 사과는 정관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먹어버리는 대상이다. 아직 그녀는 미적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지 못했다.
약간 희극적으로 되풀이되는 후속 상황에서도 미자의 그런 방황은 계속된다. 동네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미자에게 지나가던 할머니가 뭘 보냐고 묻는다.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그때 종욱이 관련돼 있는 여중생 자살 사건의 어느 가해자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다. 아름다움을 보려 했으나 고통까지 보게 되는 상황은 이렇게 다소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축적된다. 미자가 시 한편을 쓰는 것은 영화의 목표이자 도달점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시 한편을 쓰기 위해 통과하는 과정은 시인의 말대로 시상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시상은 미자에게 뜻하지 않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때까지 미자는 예쁘게 세상을 탐색하는데 거기서 자꾸 원래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을 본다. 여중생 박희진 사건의 전말을 가해자의 학부모 모임에서 알고 난 뒤에 미자가 종욱의 학교에 갔을 때 미자는 노는 아이들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최초의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새들의 노랫소리 무엇을 노래하나.’ 그녀가 텅 빈 복도 끝에서 아이들의 성폭행 현장이었던 과학실습실을 들여다볼 때 그녀의 얼굴은 코가 약간 눌려 일그러져 보인다. 노는 아이들 소리, 새소리, 그건 미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미자는 대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고 싶지만 대상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상은 뭔가 그녀에게 잔인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
미자가 나가는 아마추어 동호인 시낭송회에서 누군가가 읊는 자작시는 좀 가관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 부은 손으로 하얀 살 씻어 내리시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홀로 잠깨어 우는 일이다….’ 어쩌고 하는 시는 자기 연민의 넋두리를 감추고 있다. 이는 미자가 영화 중반, 희진 엄마를 만나러 가는 시골길에서 잠시 얻었던 시적 희열 비슷한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자는 그때 풍경에 흡수되어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맛본 다음 그녀는 그럴듯한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이것 역시 그럴듯하지만 자기 연민의 발로다. 그 다음 상황에서 미자는 희진 엄마를 만나 실컷 삶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며 도취한다. 살구가 땅에 떨어진 걸 간절하다고 생각했으며 자기 몸을 땅에 던져서 막 깨지고 밟히게 해서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그녀는 자기가 방금 쓴 시를 스스로 해설하는 것이다. 평생 살았어도 살구에 대해 처음 그런 걸 알았다고 만족해하는 미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희진 엄마에게서 돌아서서 그 길을 나올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사실 희진 엄마에게 합의보자고 사정하려고 온 참이었다. 아름다움을 위장한 자기도취의 그물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녀에게 고통이다.
그 다음 열리는 시낭송회에서 동호회 회원들은 프로 시인들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그곳 회원이자 형사인 박상태는 이날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시를 낭송한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낭송이 끝나고 느물거리며 농지거리를 하는 박상태를 보며 미자는 아름다움을 찾는 건데 와이담이나 한다고 흉을 보지만 그날 밤 회식 자리가 끝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 운다. 박상태가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 써서?’라고 물으며 그녀 곁에 난감한 듯 서서 보다가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는 그녀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박상태의 이 연대의 행동은 비로소 자기도취에서 깨어난 끔찍한 상태의 미자가 그때까지 보고 싶었던 것만을 봤던 것과 대비된다.
실은 미자에게 그런 일은 그때까지도 일어났고 그 뒤에도 계속 일어난다. 본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김용탁 시인의 강조는 미자가 보는 것과 미자가 보이는 것의 대비 속에 천천히 축적되어 마침내 ‘시’에서 ‘영화매체’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이는 <밀양>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미자는 자기가 병원에서 본 비극적인 사건, 희진의 죽음에 관해 주변에 말하지만 아무도 관심 기울이는 이가 없다. 미자는 혼자서 그걸 봤다고 생각하고 더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가 적극적으로 상황에 끼어들 때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바뀌고 그걸 황망스러워한다. 미자가 박희진의 추모 미사에 몰래 참석한 성당에서 희진의 친구로 보이는 한 여중생이 계속 미자를 쳐다본다. 미자는 불편해하며 희진의 사진 액자를 들고 도망치다가 길가에서 어느 남자와 부딪칠 뻔한다.
사건을 관찰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 연루되자마자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옮겨가고 그건 더욱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영화 중반, 사건의 내막을 안 뒤 돌보미로 일하는 강 노인 집에서 일을 마치고 그녀가 샤워기를 맞으며 울고 있을 때 강 노인은 목욕탕 바깥에서 그 소리를 몰래 엿듣고 있다. 다음날 아침 미자가 식탁에 놓은 희진의 액자를 배고프다고 식탁에 달려든 종욱이 본다. 미자는 종욱의 반응을 보고 있다. 종욱은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채근하며 그 응시의 강요를 물리치지만 무엇을 그가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밥을 먹고 난 뒤 아파트 앞 공터에서 종욱은 아이들이 훌라후프 추는 걸 가르친다. 여러 컷으로 나눠 찍힌 이 장면에서 종욱은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 있다. 생기있게 관계 속에 있는 종욱의 모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 모습을 미자가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 감각의 모호성을 느낀다.
본다는 것의 정체에 대해 우리를 관찰자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로 연루시켜버리는 것은 나중에 이르러서다. 영화 후반, 미자가 부동산 중개소에서 합의를 보러 온 희진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희진 엄마 집 근처에서 미자가 살구의 아름다움 운운하며 뻘짓을 한 다음이다. 희진 엄마는 미자를 보고 놀라 얼굴이 굳어진다. 미자는 치욕과 염치를 느낀다. 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보인다는 것에 대해. 유리창 너머 말없이 이쪽을 보고 있는 희진 엄마와 미자의 시선은 마주친다. 다시 한번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의 이 상관관계 속에서 어느 시인이 강조했던 본다는 것의 중요성은 영화매체의 표현 메커니즘으로 옮겨져 관객에게 질문하는 것이 된다.
미자는 봉준호의 <마더>에 나온 혜자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혜자가 자식의 범죄를 표면적으로 감싸고 밀봉한다면 미자는 그 반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비슷한 시선,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 <마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인, 혜자가 밤에 살인이 일어난 건물 옥상에 올라 무심하게 곳곳에 불이 켜져 있는 마을 전경을 보는 이미지와 맞먹을 만한 것이 <시>의 후반부에서 공감각적으로 확산되는 화면들에 있다. 사물이나 풍경은 이 영화에서 미학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초반에는. 미자가 시 강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통도 시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한 선생의 말을 따라 집 안 곳곳의 사물을 볼 때 마치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몇 대목처럼 인서트된 화면들이 보인다. 팬지가 있는 작은 화분, 설거지통에 있는 그릇들, 냉장고에 붙은 사진과 메모가 되어 있는 포스트잇 등은 오즈적인 정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결코 미학이 될 수 없다. 미자의 시선으로도 연출자의 의지로도 육화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다오면서 알츠하이머 확진 판정을 받은 미자가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 그녀는 풍경에서 자신의 심상을 본다.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고’라고 그녀는 공책에 적는다.
여기까지 바깥에 존재했던 풍경은 서서히 주인공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미자가 여중생이 빠져 죽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어느 한적한 시골 강 콘크리트 다리 위에 섰을 때 미자의 뒷모습이 프레임된다. 그녀가 먼 풍경에 망연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모자가 강에 떨어진다. 검푸른 강물이 보인다. 풍경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고 미자가 다리 밑 부근에서 시를 쓰려는데 비가 내린다. 미자는 한줄도 쓰지 못하고 미자의 공책은 빗물에 적는다. 시를 쓰려는데 풍경이 개입하고 난폭하게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 설명되지 않지만 미자는 뭔가를 느꼈을 것이고 강 노인을 찾아가 어떤 모종의 참혹한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른다. 그건 소녀의 죽음에 남아 있는 자로서 치르는 대속의식일 수도 있지만 이 참혹한 의식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작 소녀의 죽음은 어떤가.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망각되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되는 것이라고 해서 참혹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영화의 거의 종반부에 미자는 종욱과 배드민턴을 친다. 그들이 치는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미자가 그걸 건져내려고 할 때 카메라는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거의 유일한, 심판의 느낌을 주는 부감숏 속에서 종욱이 다가오고 형사들이 프레임인해 종욱을 부르고 종욱이 그들과 얘기를 한다. 미자가 간신히 라켓으로 가지를 쳐서 셔틀콕을 떨어뜨려 줍고 돌아서자 종욱 대신 박상태가 라켓을 들고 서 있다. 심판의 느낌은 다시 일상적 풍경에 녹아든다. 이 전이는 굉장하다. 마지막 장면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예비하는 것이면서 심판, 단죄, 망각 이런 것들을 일상적 풍경에 겹쳐놓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가 낭송되는 장면이 있다. 미자가 결국 쓴 시, ‘아네스의 노래’라고 명명된 시가 선생인 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죽은 여중생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화면에 들릴 때 시각적으로 보이는 숏들은 부재를 형상하는 풍경들이다. 미자의 텅 빈 집 내부, 아이들이 훌라후프를 하며 노는 아파트 앞 작은 공터(종욱은 이제 거기 없다.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다)), 미자에게 뭘 보냐고 묻던 할머니가 미자가 보던 나무를 보고 있는 모습 등이 비친다. 몇개의 이미지가 더 이어진 뒤에 지방 소도시의 일상적 풍경들이 다시 화면에 들어온다. 부재의 풍경은 다시 일상적인 것에 묻힌다. 그때 미자가 갔던 콘크리트 다리에 소녀가 프레임된다. 이것은 앞서 중반에 보인 할머니, 미자의 숏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유비관계를 이룬다. 일체를 향한 유비다. 강제적인 영화적 제스처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섭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희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우리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가. 더 심상치 않은 것은 강가를 비추는 마지막 이미지다. 강물이 흘러내린다. 멀리서 보면 잔잔한 듯했던 물결은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다. 이때 풍경은 앞서 말한 대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 같다. 강물이 흐른다. 원래 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가온다. 거센 물살이.
(글) 김영진 - 씨네21
첫댓글 ((아예~ 못보고 있었던 영화였기에.. 제대로 공부(?)를 하려고 작정을 하고,))
(필기할 노트까지 준비~!)
"Before the rain"..을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죽~ 글을 따라 읽어내려가며.. 젖어들며.. 끄적거리며.. 그러다보니~
어느새.. 거의 노트 2장에 가까운 분량이 채워졌더라만..
그중, 내게 깊이 파고들었던 부분들은..
물과 꽃의 중첩..?
물가는 죽음과 망각의 공간..?
아름다움 속의 고통, 혹은 고통속의 아름다움..?
보는 일(본다는 것)과 보이는 일(보인다는 것)의 상관관계..?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고'(..심판, 단죄, 망각)
강가를 비추는 마지막 이미지..
멀리서보면 잔잔한 물결인 듯 흘러내리던 강물이..
사실은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는~
풍경은.. 이제,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 같다고~.
원래 있던 흐르는 강물이..
이번에는 거센 물살로 다가온다고..??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았던 음악의 맨 끝부분의 거센 빗소리와..
이 글의 마지막부분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내 몸 전체엔.. 알지못할 전율감마저.. 엄습해왔다.
언젠가.. 이 영화를..
제대로 다시한번 음미하며 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오기를 바래보며~
오늘과 같은 이런 좋은 시간을 만들어준.. '네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영화 마지막 부분의 과거 장면들... 영화를 구성하며 절실하게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가 가득한 화면들이 연속되는 순간 사실 싯귀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시간여의 이야기를 엄청난 에너지로 함축시키는 그 장면들 자체가 바로 시가 아닐까 하는 충격이었으니까... 정말 좋은 작품...
아까~ 내내.. 궁금했던 "아네스의 노래"란 '시를 드디어 보게 되었네~! 살짝~ 아까와 다르게.. 다시~ 편집해 놓은게 보기에도 훨~ 좋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