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호 농다리와 하늘다리
2024.06.16
생거진천의 유래
진천은 예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토지가 비록하고 풍수해가 없어 농사가 잘되는 고장인 연유로 인심이 후덕하여 생거진천이요 용인은 산자수명하여 산세가 후순하여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다하여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불리었다. 또한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니 진천과 용인에 사는 동명이인(同名異人) “추천석”에 관한 것이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마음씨가 착하고 농사만 짓는 사람인ㄷ 저승사자가의 실수로 용인의 추천석이 아닌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와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미 장사를 지낸 이후이기 때문에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의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 살았다고 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천 농다리(鎭川 籠橋)
이 다리는 굼티마을(구곡리)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였으며 “농다리”리고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다리(石橋)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초 임 장군이 세웠으며, 붉은 돌로써 음양을 배치하여 28수에 따라 28칸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총 길이는 약95m 정도이며, 사력암질의 돌을 물고기 비늘 모양처럼 쌍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긴 상판석을 얹은 형태이다. 견고하여 장마에도 유살되지 않는데, 이러한 형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진천 농다리는 국토해양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농다리를 지나는 하천과 더불어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되어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정받은 명소이다.
용고개 성황당(城隍堂)
지금은 저수지에 수목되어 자취를 감췄지만 옛날 화산리에는 큰 부자마을이 있었다. 마을을 지나가던 스님이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집에 들어가 시주를 청하였지만 고절당한 것도 모자라 내쫓겼다, 다른 집들도 연달아 찾아다녔지만 스님은 계속해거 매몰차게 겨절당했다. 이윽고 스님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혼잣말로 “앞산을 깍아 조상들 묘자리로 쓰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라고 읖조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옮긴 스님은 마지막으로 한집에 들어가 시주를 청하였고, 마침 그 집 주인은 이틀간 정성껏 스님을 모시고 베풀었다. 스님은 집 주인을 불러 한 달 내로 이 마을을 떠나라고 한다. 그러나 집 주인은 무슨 일인지 물으며 함께 커 온 마을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하였다. 스님의 혼잣말을 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바로 앞산을 깎기 시작해자 마을에 물이 마르고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베풀지는 않고 욕심에 눈이 먼 마을사람들이 스님의 의도대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일대 지형의 허리를 잘라내어 화를 입은 것이다. 스님은 정성껏 모셨던 머지막 집 주인은 이 모습을 두고 볼 수없어 애타게 스님을 수소문하여 찾아낸 뒤 마을을 회복시킬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이를 안타깝고 기특하게 생각한 스님은 지금의 성황당 위치를 알려주며 이곳에 돌탑을 쌓고 칠일간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사람들의 건강이 회복되고, 마을의 액운도 사라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 곧바로 음식을 차리고 돌탑을 쌓아 일주일간 정성껏 기도를 드리자 마을은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로도 이 사암의 자손들은 대대로 성황당에 기원을 드렸고 하늘은 감동을 받아 성황당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재물과 명예를 선물했다. 어진자 한 사람이 마을을 살린 이후 지금까지도 초평에는 성홛당이 유지되어 오고 있으며, 사람들이 묘자리를 내기 위해 산을 깍은 자리는 용고개라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