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아버지의 전쟁
부모님 결혼하시던 때 아버지는 20세, 어머니는 17세의
홍조의 동안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소녀이셨다.
신혼의 꿈같은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징집명령이 떨어진 아버지께서
신병훈련소가 있는 제주도로 떠나기 위해 트럭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동네의 모든 청년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오던 터에
살아오리라는 생각이 불가능하던 그 때의 상황에서는
아내에게 사랑다운 사랑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이 차라리
죽음보다도 더한 절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고 하셨다.
가장 일선에서 적을 맞이하면서 백두산 근처까지 밀고 갔지만
중국 인민군의 전쟁 참가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그 소대원 중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은 병사가 아버지를 포함해서 두 명뿐...
처절한 살육,
떨어진 포격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옆에 있던 전우들,
목숨걸고 후퇴하다가 만난 절벽에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뛰어내릴 때 남은 상처는 아직도 훈장처럼 남아있고...
아버지는 아직도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다.
그 전쟁 중에서도 사흘이 멀다하고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셨는데
어머니도 매일 일기장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빼곡이 적어 놓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일기장을 내가 장성한 후에는 태워 버리셨다.
전쟁의 상처는 당신들께서 안고 가야할 짐이라고 하시면서
어두운 과거의 유산을 남겨놓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도 그 상흔은 참으로 깊어서
내가 어릴 때에 전쟁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아무리 아버지를 졸라도
한 번도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전투사는 지금까지가 전부이다.
얼마 전 손자와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전쟁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손주들한테는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냐고 어머니가 부추기시자
바짝 붙어 이야기 나오기를 기다리는 또랑또랑한 눈망울의 손주들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으면서 슬픈 표정으로 그냥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지금까지 아무도 아버지의 가슴에 남은 전쟁의 상처는 치유할 수 없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던 간에 세기마다 한 번은 전쟁을 겪었다.
작년부터 일본이라는 나라도 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다.
최근에 우리 세대도 전쟁을 겪고 있다.
다만 총칼없는 전쟁일 뿐이다.
IMF 금융위기 초기에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을 잃고 지낼 곳이 없어
해안 모래사장에서 잠자리를 마련하는 한 식구의 처절함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빚으로 쫓기다 보니 집에도 행방을 알리지 못한 채
공원과 지하도를 점령할 수밖에 없는 가장들.
그런 격랑의 와중에도 무슨 게이트가 그리도 많아
"탁치면 억"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우스운 건달들이 배를 산으로 몰고 있고,
세금도 제대로 납부한 적이 없고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들락거리면서도
뻔뻔하게 선량한 국민의 대표가 되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상한 나라...
세계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한국은
어쩌면 양심과 비양심의 경계가 모호해진 전쟁중인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고등교육의 결과로 자기 합리화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들 세대의 현주소가 아닌지...
우리 모두 조상들과 친구들이 피를 바쳐 겨우 지켜낸
소중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을.
먼 훗날
지금 우리세대가 겪어가는 전쟁이야기는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써내려 갈까...
2002. 6. 1. 율빈
초등학교 4년 운동회. 지금은 폐교가 된 잃어버린 추억...
이제는 저 당시의 아버지보다 7살이 더 많아져 버린 나
첫댓글 이력서에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고등교육'만 필요했고 '인성교육'은 코풀때 필요한 휴지 한 장만도 못하다는 사고가 세뇌된 까닭에 '양심과 비양심의 경계가 모호해진 전쟁중인 사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충일 아침에 잠언같은 말씀 듣고 갑니다.
미농지 구겨진 자국같은 갈매기 소복하게 콧잔등에 얹혀 있는데... "내청춘 돌리도!" 외쳐보면 갈매기 몇마리쯤은 날려 보낼수 있으려나요..? 아버님들의 청춘이 다 받쳐진 이 전쟁, 율빈님 같은 분들이 종식을..ㅎㅎ 행복한 6월 되세요.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우리들의 이야기군요. 아버지세대는 그렇게 가시고 막 우리가 그 과정을 밟고 있나 봅니다. 자식세대쯤 해서는 슬픈 이야기가 더 없어야 할텐데...
율빈님,.아버님마음이 그대로 보일 듯 합니다..그렇지만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지요..바래진 사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사람마다 쌓인 추억들,..그 이상으로 더 많이 잊(잃)어버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새삼느낍니다...-.-+
요즘 잦은 출장에 꼬리글 하나 제대로 받아드리지 못함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기만을 빕니다. 언젠가는 마음 놓고 한 잔 걸치고서 뜨락에 편안히 누워 피로를 풀 날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