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108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어느 이등항해사의 독백’]
어느 이등항해사의 독백
*남태평양 참치조업 중 풍랑에 스러져 간 선원들의 명복을 빌며
보세요, 거친 삼각파도 포효 속에서
바다가 토해낸 성난 거품들이
왜 그렇게 미쳐갔는지 알 수 없더라도,
나는 이제야 또렷이 진열陳列할 수 있소.
광풍노도 비켜갈 절해고도로
모두가 원죄를 쓸어내리며 스며들어가면,
살아남은 아픔보다 거죽뿐인 살 껍질이 서러워 울고,
문득 조우하는 갈매기의 비명, 투박한 해목海木들의
구렁 구렁한 수런거림에 속절없이 질긴 바다의
속성을 껴안아 버리오.
검은 수평선 너머 찢어진 파아란 하늘 한 조각
요원의 빛살로 이슬 되어 만신창이 눈두덩에 흐를 때,
비통한 추억의 향기는 황야에 떠도는 내 분신,
한 마리 고독한 늑대로서 섬 위를 날고 있소.
내가 바다에 뿌려둔 항법航法의 비밀들을
들추기도 전에, 아 아 검은 빛 주황색 섬광이
메마른 내 등짝을 후려치오.
나는 이제 깨어 있을 것이다
깊은 해명海鳴에 용골을 걸칠 것이다, 절규하면
원래는 내 가슴보다 작았던 난파선의 마스트는
비로소 긴 항해의 괘적, 질긴 고락을 토하며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끼오.
성난 하늘이 우주라면 난 싫소
미친 바다가 한줌 인생이라면, 난파선 이물에
춥게 고여만 있게 해주오.
나는 잠잠해지는 파도 위에서 편안히 잠들고 싶소.
비록 등짝에 새겨지는 어안魚眼 문신이 두렵더라도
머언 바다 동천東天, 회명晦明이 미치도록 아스름하오.
그 빛에서 오래된 내 설움을 익살스럽게 들추며
이 바다에 꺼이꺼이 잠기려하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어느 이등항해사의 독백>은 거친 남태평양에서 목숨을 잃은 선원들을 추모하며, 비극적 자연과 삶의 비통함을 항해사의 눈으로 조명한 선상 서사시이자 해양 엘레지(부조시)입니다.
1. 비극적 공간의 구축과 실존적 고독
시적 공간인 남태평양은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폭력적 주체로 묘사됩니다. '성난 거품', '광풍노도', '비명'과 같은 직관적인 시어로 폭풍우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며, 그 속에서 살아남은 항해사는 '살아남은 아픔'과 '거죽뿐인 살 껍질'이라는 표현을 통해 처절한 실존적 고독을 드러냅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동료를 잃은 죄책감과 생의 허무함이 더 크게 작용합니다.
2. 이미지의 대비: 상처와 빛
시 전반에는 암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와 아련한 희망의 빛이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상처와 상징 : '메마른 등짝을 후려치는 주황색 섬광', '만신창이 눈두덩', '어안(魚眼) 문신'은 바다라는 비정한 공간이 항해사의 신체와 영혼에 남긴 영구적인 흉터입니다.
⚫빛과 치유 : '검은 수평선 너머 찢어진 파아란 하늘 한 조각', '요원의 빛살'은 상처투성이인 항해사에게 비치는 절망 속의 미세한 위안이자 추모의 빛입니다.
3. 난파선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자아 인식
'원래는 내 가슴보다 작았던 난파선의 마스트'가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낀다'는 묘사는 항해사와 배가 운명을 함께하는 한 몸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진 난파선의 용골에 스스로를 걸치며 항해사는 미쳐버린 바다와 성난 하늘에 거부권을 행사합니다("성난 하늘이 우주라면 난 싫소"). 이는 비정한 운명에 대한 절망적 항거입니다.
4. 초월과 승화 : 비극적 수용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항해사는 죽음 혹은 바다라는 운명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비록 등짝에 새겨지는 어안 문신이 두렵더라도", "오래된 내 설움을 익살스럽게 들추며 이 바다에 꺼이꺼이 잠기려하오"라는 고백은 거친 바다에서 스러져간 동료들의 곁으로 들어가겠다는 영혼의 동화(同化)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극적 승화를 보여줍니다.
이 시는 실제 해양 현장의 거친 질감을 생생한 시어로 담아내는 동시에,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스러져간 인간의 넋을 달래는 깊은 페이소스(Pathos)를 지닌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