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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예 입양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지요. 사기라고 느끼기엔 사연이 너무 구체적이고 감정의 모든 요소를 다 다루어 ... 자식을 가진 아빠의 심정으로 가슴이 메어질거 같았는데 ...
답장이 없어 이런 저런 도움으로 견딜만 한가보다 했습니다. 한바트면 25먹은 속썩히는 아들놈 하나 둘 뻔 했군요. 오죽했으면 김일성 주석이 아오지 탄광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 80518 카페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앵벌이 하는 일은 없어야 겠지요. 빨간장미님께 부탁하시면 노동의 귀한 가치를 나누실수도 있구요.
귀한 글 감사합니다^^
---------- Forwarded message ----------
From: 노란장미
Date: Aug 20, 2006 11:36 PM
Subject: Re: 아빠를 살려주세요
To: baekeunji1@yahoo.co.kr
2006년 6월 23일 금요일 밤 11시경...
아빠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의집 논일 밭일을 하루종일 해주고 일당 2만원을 받아
집으로 귀가하시는길에 마을앞 인도가 없는 왕복 2차선 도로 횡단보도를 파란불에 건너시다가
파란불을 무시하고 역주행한 짐을 가득실은 대형트럭에 치어 크게 다치셨습니다. 뺑소니 사고를 당하신것입니다.
아빠를 덮친 대형트럭은 그대로 달아나 버렸고, 때마침 지나던 택시 운전자가
도로에서 저만치 튕겨나가 풀밭에 온몸이 피범벅이 된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계신 아빠를 발견해
급히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응급실에 도착한 아빠의 상태는 매우 위독하셨어요.
당시 저는 고향을 떠나와 도시에서 일을하며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아빠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신 그시각 저는 야간정규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고 있었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저의 담임 선생님이신 정애숙 선생님의 국어수업시간이라
재미있게 열심히 수업을 듣고있었어요. 한창 수업을 듣고있던 밤 11시 30분경...
교내방송으로 교장선생님이 정애숙 선생님을 교무실로 부르셨어요.
수업은 잠시 중단되었고 반친구들은 무슨이유일까 궁금해하며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반 정원이 40명인데 밤시간대라 조용히 떠드는대도 크게 들리고 있었어요.
5분후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이 들렸어요, 저를 포함한 40명의 반친구들
모두 일순간 쥐죽은듯 조용해졌어요..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그런데 들어오시지 않고,
교실 문앞에서 잠시 망설이시는듯 하시더니, 교실 앞문을 여시며 뜻밖에 "은지야" 저를 조용히 부르셨어요.
무거운 교실내의 분위기에서 생각지도못한 제 이름을 부르시자, 순간 마음속으로 떨리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불안감일까요... 무엇하나 잘못한 것이없는 내가 왜 떨고있는지 머리속이 복잡해졌어요.
저의 머리속에선 고향에 홀로 계시는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담임 선생님께서는 진학상담실로 저의 손을잡고 가셨어요, 저의 손을 잡으신 선생님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걸 느낄수 있었어요. 마침내 멀기만했던 진학상담실 문을열고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앉지 않으시고 서서 평소의 상냥한 목소리가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기 시작하셨어요.
"은지야, 경찰에서 우리학교 교장선생님께 연락이 왔는데 너의 아버지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셔서 지금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긴급이송 되셨는데, 생명이 매우 위독하신 상태라는구나"
"선생님, 지금 하신말씀... 거짓말이죠? 60평생을 남한테 거짓말 한번 안하고
착하게만 살아오신 우리아빠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셨을리가 없어요!"
"선생님,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네...! 네...!!"
머리를 망치로 내리친것같은 충격에 저는 상담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저의 담임 선생님이신 정애숙 선생님은 저희 학교에 몇안되는 여선생님이세요.
나이는 20대 중반이시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하셔서 따르는 학생들이 많고
평소 꼼꼼하고 상냥하신 담임 선생님의 성품을 잘알기에...
제 자신의 이성은 선생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것을 알았어요.
제 자신의 감정은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진실이라는것을 곧 받아들여야 했어요.
선생님은 저를 꼬옥 안아주시며 "아빠 무사하실거야, 착한분이시잖아"
위로해주시는 선생님 품에서 울며...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어요.
17살 여린 저의 마음의 중요한 부분을 언제나 차지하고있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저의 혈육.. 아빠...
6.25 한국전쟁으로 어린나이에 어머니, 아버지(저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두 잃으시고 전쟁고아가 되버리신 아빠...
전쟁으로 그많던 일가친적분들도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전쟁통에 목숨을 잃으셨고,
겨우 살아남은 아빠의 동생(삼촌) 한분과 누나(고모) 두분은 고향인 북에 남으셨어요.
지금까지도 아빠의 동생분과 누나 두분의 생사를 알길이 없어서
교통사고 당하시기 전까지 매일같이 그리워 하셨어요.
1945년 일본으로부터 광복되던 다음해에 태어난 아빠는 1946년생,
광복되기 3년전 태어난 엄마는 1942년생이세요. 아빠 말씀이 엄마는 갓난아기때
고아원에 버려져 고아원에서 10대 후반인 18세까지 자라셨다고해요.
그후 성인이 된 엄마는 공장 여직공, 식모, 기타등등... 힘든일을하며
아빠를 중매로 만나기 전까지 여성으로서 할수있는 거의 모든 허드렛 일을 하셨다고해요.
엄마, 아빠는 중매로 결혼하신후 두분이 힘을합쳐 엄마의
어머니, 아버지(저에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찾으려고 몇년간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 제가 태어났고, 엄마는 1989년 저를 낳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실때까지,
끝내 어머니, 아버지(저에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을 찾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3년간의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1953년 12월 혹한의 겨울밤...
어린 소년(아빠)이 쓰러질듯 길을 걷고있어요, 걸레처럼 찢어진 누더기같은 옷을입고
맨발로 눈이쌓인 자갈 길을 걷고 있어요, 소년의 발은 퉁퉁부은채 동상에 걸린지 오래 되었고,
얼굴에 큰상처로 얼굴이 피투성이였고 보름동안 아무것도 먹지못한채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앙상한 뼈만남은 몸은 너무 갸냘픕니다. 소년은 계속 길을 재촉하다가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가 치던 그날밤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어요.
잠이들면 얼어죽는다는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수 없을것 같았어요.
졸리며 눈이 감겨질 즈음, 다행히 지나가던 약장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을수 있었어요. 며칠후 엄마, 아빠가 전쟁으로 돌아가신
소년은 7살의 나이에 고아원으로 옮겨집니다. 그후 3년간 고아원에서 약간 건강을 회복한
소년은 1956년 10살이 되던 그해 봄 어느 노부부가 고아원측에 양자로 입양하기로 하고
고아원측에 돈을주고 소년을 양자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거짓말 이었고,
노부부는 소년을 머슴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소년은 처음 도착한 대궐같은 집에사는 엄청난 부자인 노부부와 그집 딸과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시중을 들어야만 했어요, 도착한 첫날부터 어린 소년은 고된일을 해야 했어요.
어른도 힘들어하는 논일, 밭일, 노역, 각종 힘든일은 모두 소년의 몫이었죠..
1961년 10월 스산한 가을밤...
그렇게 각종노역에 시달리며 5년이란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느덧 15살이 되었어요,
아빠는 탈출을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겨 탈출에 성공했어요.
5년간의 머슴살이는 소년에게 지옥같은 나날들이었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라고 아빠는 제가 10살때 말씀해주셨어요.
위의 이야기는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평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며 지워버리고 싶은 세월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후 아빠는 아픔의 지역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기위해
남쪽지역으로 내려가 굶주림과 추위를 해결하기위해
남의집 논일, 밭일, 공사판, 제재소, 공장, 노역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찾아서 하셨어요.
온갖 궂은일과 힘든일을 위암이 걸리기 1년전인 작년까지 49년동안 단 한번의 그 흔한
불평 한마디 없이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만 하셨던 아빠...
8살무렵 어렸을때부터 아빠로부터 들었던 슬픈 아빠의 인생 이야기...
제 머리속에 주마등처럼 떠오를때마다, 제 두눈에선 눈물이 흘렀어요.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병원까지 담임 선생님의 차를 타고 갈수 있었어요.
담임 선생님의 차를타고 병원으로 가는동안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어요.
어두운 국도를 달리는 차안에서 마음속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수만번 기도 드렸어요.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아빠는 이미 수술실로 옮겨져 수술에 들어가신 상태셨어요.
저는 수술실 문앞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어요.
1시간후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위해 학교로 돌아가셔야 했고,
저는 수술실 밖 의자에 꼼짝않고 앉아 무릎꿇고 기도 드렸어요.
'하느님,
우리 아빠를 제발 지켜주세요.
아빠를 살릴수만 있다면, 대신 제 생명을 드리겠어요.'
아빠를 살릴수만 있다면, 어떤 시련이든 달게 받겠어요.'
'하느님,
부디... 보살펴 주세요.
아빠를 보살펴 주세요.
아빠의 환한웃음을 다시 볼수있게 해주세요.
제가 아빠를 평생 지켜드릴수있게 해주세요.
하느님, 제발...! 하느님...!!'
아빠가 살아주시기만을 마음속으로 기도 드렸어요.
저를 낳다가 돌아가신 엄마대신, 아빠는 분유 사먹일 돈조차 없이
너무 가난해서 남성 혼자몸으로 갓난아기였던 저를 등에업고 동네를 매일 돌아다니며
동네 아주머니들께 온갖 구박과 면박을 받으며, 젖동냥으로 저를 키우며 평생 고생만 하신
아빠를 살릴수만 있다면, 대신 제 생명을 아빠에게 드리겠다는 기도를 드렸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경찰이 왔어요.
"피해자 백정두씨의 따님, 백은지양 맞습니까?
"네... 제가 딸인 백은지에요, 아빠... 우리아빠 무사하신가요?
"교통사고입니다. 뺑소니 사고로 보입니다."
초조함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몇가지 답을 들을수 있었어요, 뺑소니 사고라는것, 뺑소니범을 못잡았다는것...
유일한 목격자인 지나가던 택시운전자가 뺑소니차량이 짐을 가득실은
대형트럭이라는것을 어두운 밤이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봤다는것...
뺑소니범을 잡으려면 빠르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몇년까지 각오해야 잡을수 있다는 말을 들을수 있었어요.
경찰은 1차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아빠가 수술들어가신지 2시간째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술실 밖 의자에 꼼짝않고 앉아 무릎꿇고 기도 드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그날 저녁 9시가 넘어, 기나긴 수술이 끝났습니다. 총 20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을 집도하신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탈진된 모습으로 나오셨어요.
"선생님, 우리아빠 괜찮으신거죠? 수술 잘 된거죠? 우리 아빠 살아나실수 있는거죠?"
"1차수술은 잘 끝났지만 반혼수상태란다.. 이어지는 수술을 받는데는 지장이 없으시겠지만...
앞으로 몇주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회복여부를 판단할수 있겠구나..."
수술실에서 대수술을 마치고 실려나오는 아빠의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얼굴은 온통 핏빛이었고, 얼굴과 양팔을 제외한 머리와 몸, 다리, 발까지 깁스와 붕대로 온몸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다리에 힘이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넓은 복도 한가운데서, 담당의사 선생님, 병원관계자, 수련의, 환자, 보호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지켜봤지만,
순간 다리에 힘이풀리며 복받치는 슬픔으로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탈진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1시간후 겨우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교복상의와 교복치마를 입은 그대로 응급실 간이침대에 눕혀져 있었어요.
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빠가 옮겨진 응급실로 향했어요.
아빠는 응급실로 옮겨진후 의식이 없어 인공호흡기와 머리에 호스연결해서 피를 빼내는 장치를 부착당하신채,
타박상으로 온통 멍이 들어있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아빠곁에서 아빠의 갸냘픈 손을잡고 저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기만했어요.
아빠는 뺑소니 사고로, 두개골(머리) 함몰과 두개골 골절, 그로인한 뇌출혈, 얼굴 광대뼈 일부골절,
얼굴 타박상, 하악골(턱) 골절, 치아 5개 부러짐, 척추(허리) 골절, 양쪽 무릎이 골절되는 큰 중상을 당하셨어요.
2006년 6월 23일 금요일 밤 11시경...
뼁소니 사고당시 뺑소니로 경찰에 접수되어,
경찰에서 뺑소니 사고여부 조사로 어제까지 조사를 했으며, 최종적으로 뺑소니로 판명되었어요.
아빠가 1차수술을 받으시고 약간 안정되시던 3일후인 26일 뺑소니 사고시
국가보장사업 및 무보험자 상해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찰서에 교통사고 사실확인원등
관련서류를 준비해서 어제 국가에 보험청구를 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보험지불불가 판정이 나왔어요.
보험에 가입되있지 않아서 보상금지급이 불가하다고 나온것 같아요.
저희 두식구는 몇년간 국민연금도 납입하지 못했어요. 2년전 국가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국민연금을 매월 납부 못한다고 납부유예 신청서를 제출하고, 국민연금 납부를 하지 못했어요.
제 어린 생각으로는 아마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못했던것이 이런결과를 낸것같아요.
저희같은 어려운 형편에 보험, 국민연금은 저희 두식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백은지라고 합니다.
1989년생 올해 17세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1년전까지 올해 60세이신 아빠와 저 이렇게 단둘이 살고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1년전부터 저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됐고,
아빠는 고향시골집에서 남의집 논일 밭일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가셨어요.
7일전 뺑소니 사고만 아니었다면 가난한 생활이지만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마음만은 편안했던 1년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빠성함은 '백'자, '정'자, '두'자 이십니다.
아빠는 위암 1기로 1년째 투병중이셨어요..
단순한 위궤양으로 알았던것이 큰병원에서 검사결과 위암으로 판명되었어요.
1년전 병원에서는 수술치료를 권했지만 아빠는 남은인생을 순리대로 보내고 싶다며
수술을 거부하셨어요, 하지만 사실은 돈이 없었서 그러셨다는걸 알기에 딸인 저는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나 하늘의 보살핌으로 그후 6개월동안 악화되지 않으셨어요.
병원에서 검사해본결과 1기 상태에서 암덩어리가 약간 줄어들었다고해요.
병원측에선 이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라며 암덩어리가 여기서 더 줄어들지만 않는다면,
수술필요성은 없다고 진단을 내리셨어요. 그러나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6개월전인 작년 12월 이야기입니다.
오늘아침 담당의사 선생님께 뺑소니 사고당시 아빠가 위암 1기 상태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진작하지 않았느냐면서 일단 몸속에 크던 작던
암덩어리가 있다는게 문제라고 하셨어요, 암덩어리는 인체의 면역력이 약해지면
더욱 활발히 활동하는데 지금 환자의 상태는 체력이 많이 약해져 면역력이 현저히 약해져있어
암덩어리가 급속도로 성장할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수술직후 혼수상태에서 반정도 의식을 회복한
수술을 받으실수있는 반혼수 상태가 되셨지만 안심할수 있는 단계는 절대 아니라고 하셨어요.
위암이 악화되면 생명이 위험하니 최악의 경우도 대비하라고 하시더군요.
엄마는 17년전 저를 낳으시다 돌아가셨어요.
당시 엄마, 아빠는 40대 초반에 중매로 만나 결혼하셨고 결혼 3년만에
늦둥이 아닌 늦둥이인 저를 가지셔서 두분다 하늘이 날아갈듯이 기뻐하셨다고해요.
하지만 불행히도 엄마의 출산연령이 47세로 높아 노산의 위험이 컸다고해요.
너무 가난했던 저희집은 병원갈 돈이 없어서 집에서 저를 낳으셨다고해요.
아빠 말씀으로는 이웃집 산파 할머니께서 엄마 나이가 너무 많아 엄마를 살릴건지
아기(저)를 살릴건지 아빠한테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다고해요.
하지만 아빠는 엄마, 아기 모두 소중하다면서 누구도 포기할수 없다고 하셨다고해요.
결국 엄마는 아기를 낳는것을 선택하셨어요..
엄마는 저를 낳는걸 선택할 경우 엄마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걸 아시면서도
엄마는 결국 저를 선택하셨고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셨어요..
선천적으로 자궁이 약했던 엄마는 노산이라는 악조건까지 겹쳐
23시간이 넘는 극심한 산고끝에 다음날 새벽 3시에 저를 낳으셨지만 끝내... 숨을 거두시고 말았어요.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8살 되던해 아빠가 이 모든 사실을 말씀해 주셨어요.
저는 엄마의 생명과 맞바꿔 태어난 그런 아이었어요..
엄마는 갓 태어난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안아보지도 못하고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신채 숨을 거두셨어요.
저는 엄마 얼굴을 모르고 자랐어요, 남들은 다있는 그 흔한 흑백사진 한장 남기지 않으시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아빠는 너를 못보고 가서 엄마가 천국에서
슬퍼하실거라고 저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저는 공북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16년동안 그곳에서 자랐어요.
제가 태어난 곳의 행정상 위치는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공북리 1구 290번지입니다.
공북에서 16살인 중학교 3학년까지 마친후 지금은 가까운
도시로 상경해 혼자 일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지역에서 '부녀가정' 으로 선정되어 지역 면장님의 도움으로
학비면제와 무상으로 기숙사가 있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닐수 있었어요.
저희고등학교 기숙사는 남녀 기숙사 건물이 양쪽으로 나눠져 있어요.
그래서 저희 여학생 기숙사는 여학생들이 쓰고 있어요.
여학생 기숙사는 보통 한방에 6명이 모여서 자는데, 작은 침대 6개가 층층으로 쌓여있어요.
제가 아빠교통사고 나기전 기숙사에서 쓰던 방도 5명의 반친구들과 같이 쓰고있었어요.
공간은 좁지도 넓지도 않고 적당하구요, 저를 포함한 여학생 6명이 한방을 씁니다.
남학생들은 바로옆 건물에 남학생 기숙사가 있어요..
남학생 기숙사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건물구조와 방배정 인원은
여학생 기숙사와 똑같다고 선생님들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학교측에 부탁드려서 낮에는 인근 공장에서 일할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수업을 듣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교장선생님의 배려와 도움이 컸어요.
저희 두식구는 기초생활 수급자입니다.
다른말로 차상위 계층이라고도 부르시더군요.
이웃 어른들께서는 그냥 저희를 영세민이라고 부르셨어요.
저희 두식구가 가진거라곤 좁디좁은 집터와 다 쓰러져가는 옛날집이 전부였지만,
저희 두식구는 행복했어요.. 지금의 교통사고만 아니면 행복했어요.
교통사고 나기전 아빠는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어요.
아빠는 어렸을때부터 작은땅에 농사를 지어보는것이 소원이셨어요.
작은 몇평의 논에 직접 당신의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쌀을 수확해 햅쌀로 밥을지어
딸인 저에게 먹여보는게 소원이라고 제가 어렸을때부터 가끔 말씀하시곤 하셨었어요.
1980년부터 아빠 엄마는 이곳 공북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셨어요.
그후 1989년 엄마가 저를 낳다가 돌아가시자, 아빠는 건강이 많이 안좋아지셨어요.
1980년부터 2001년까지 21년간 아빠는 제재소에서 퇴근하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12시간동안 남의집 논일 밭일을 해주고 하루 2만원의 일당을 받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죽도록 일만 하셨어요. 그후 아침 7시에 다시 직장인 제재소에 출근하시는 생활을 반복하셨어요,
2006년 올해는 위암과 허리, 어깨의 통증등 건강악화로 남의집
논일 밭일을 두번 나가셨어요. 그 두번째 일을 하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2006년 6월 23일 밤 11시경 뺑소니 사고를 당하시고 말았어요.
2003년 제가 14살 무렵 어느 무더운 여름날...
3년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새벽이었어요. 아빠는 거의 매일
남의집 논일, 밭일을 해주고 허리와 어깨가 아프지 않은날이 없었고
하루 12시간이상(14시간 이상일경우도 허다했으나 추가수당은 없었음)
논일, 밭일을 해주면서 일당 2만원을 받을수밖에 없었어요.
다른지역에서 아빠보다 젊은 남자 일꾼들(대부분 40대)이 많이와서 일당을 적게줄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다른지역에서 온 일꾼들은 하루 10시간 일하고, 일당 6만원을 받아가고 있어요, 이것이 현실이에요.
(2006년인 지금은 다른지역 일꾼들의 일당은 1만원 올라 일당 7만원입니다)
결국 나이가 문제였어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어요.
일당을 더올려 줄수 없다고 마을 유지분께서 딱잘라 말씀하시더군요...
그로인해 몸이 남아나질 않아, 아빠의 허리와 어깨 통증은 날로 심해져만 갔어요.
붙이는 파스를 매일밤 붙이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모습을 매일밤 몰래 지켜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렸어요. 아빠는 언제나 아픈 모습을 딸인 제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셨고,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아픈걸 내색하지않고 어김없이 남의집 논일 밭일을 나가시는 아빠를 꼬옥 안고,
"아빠, 괜찮아?" 하면 "응, 괜찮아." 환하게 웃으시며 매번 이렇게 대답해주셨어요.
오히려 저를 꼬옥 안아주시며 저를 안심시켜 주셨어요.
저는 아빠를 꼬옥 안고 눈물이 흘러내리는걸 간신히 참았어요.
아빠가 저의 눈물을 보시면 슬퍼하시니까요..
2001년 5월 16일...
저희 지역 목사동 면사무소에서 감사하게도
기초생활 수급자로 저희 두식구을 선정해 주셔서 그때부터
올해 2006년 6월까지 국가로부터 저희 두식구는 기초생활 수급비 월 2만원을 지원받고있어요.
하지만 당시 아빠가 제재소에서 해고 당하신 직후여서,
저희 두식구의 월수입은 국가에서 나오기 시작한 기초생활 수급비 2만원이 전부였습니다.
아빠가 이웃에서 조금씩의 돈을 빌려서
하루 1끼의 밥은 묵은김치 반찬 1가지와 함께 먹을수 있었어요.
묵은김치는 이웃 할머니께 제가 부탁해서 조금 얻어올수 있었어요.
쌀을 사먹을 돈이 없었으니까요.. 처음엔 이웃에서 쌀을 얻을수 있었지만,
그것도 몇개월이 지나자 어려웠어요..
아빠는 올해 2006년인 올해초까지 6년간 하루 1끼(밥+묵은김치)의 식사를 하셨고
저는 작년 2005년까지 5년간 하루 1끼(밥+묵은김치)의 식사를 했어요.
저는 올해초부터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해 타지에서 생활하며 밤에 학교수업듣고
낮에 공장에서 일하는 생활을 하고있었어요. 때문에 학교 기숙사 급식실에서
무상으로 하루 3끼를 해결하고 있어요. 학교급식이라 많은양을 주지는 않지만,
고향에서 지난 5년간 하루 1끼에 그것도 밥과 묵은김치만 먹던것에 비하면
이곳 급식실에서 하루 3끼 해결하는 식사는 '산해진미' 입니다.
2006년 5월 27일...
우리 목사동면 지역에서는 2인가정기준(부녀 모자가정 포함) 최대 지원해줄수있는 돈이
월 2만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나올 지원비도 월 2만원에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을거라고
면사무소 해당 담당 직원분께서 말씀해주시더군요..
낮에 일하는 공장에서 월급 15만원을 고정급으로 받고있어요.
올해초부터 이 돈중 거의 모든 돈을 아빠한테 매달 보내드리고 있어요.
2만원을 뺀 13만원씩 1월부터 5월까지 꼬박꼬박 아빠에게 보내드렸어요.
아빠는 제게 미안해 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더 보내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못난 딸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학교에서 마련해준 여성 훈련생 자격으로
취업했기 때문에 월급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이 제가 가진 유일한 불만이에요.
저는 야간고등학교에서 졸업과 동시에 공장에 정식직원으로 자동취업되게 됩니다.
정식직원으로 취업하면 월급 110만원, 고용보험등.. 4대 보험적용,
명절 보너스 지급등 많은 혜택이 따라오지만, 올해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제가 정식직원으로 자동취업되려면 앞으로 2년이란 저에겐 긴 시간을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기다려야해요.
그래서 지금 병원에서 아빠를 간병하면서 너무 초조한 마음이에요..
잠시 옛날 이야기를 할게요...
2001년 초등학교 5학년 12살의 어린나이던 저는 그때부터 닥치는대로 일을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에 학교수업은 꼭 받으며 저녁에 식당설겆이, 음식배달, 새벽에 신문배달등...
닥치는대로 돈이 될만한 일은 찾아서 했습니다. 한 1년쯤 일만 할 생각으로 학교를
1년간 쉬려고 했는데, 아빠의 강한 반대와 당시 제 사정을 잘 아셨던 담임 선생님인
김복희 선생님의 만류로 초등학교를 제대로 마칠수 있었어요..
그렇게하지 않으면 아빠가 저를 안보시겠다고 하시더군요...
공부는 배울때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빠는 저를위해 모든것을 바치셨어요.
그래서 저는 낮에 수업을 받고, 저녁과 새벽에 일을 하겠다고 했어요.
결국 그해 5학년은 담임선생님과 학교측의 배려로, 저녁과 새벽에 일하며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고, 졸업장을 받을수 있었어요.
중학교 3년도 그렇게 일하며 공부를 마쳐 무사히 졸업장을 받았고,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야간고등학교 다니고 있어요.
그렇게 제가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벌었지만 매달 들어가는 아빠 위암치료비
약값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어요. 저희 가정형편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은채 악화될대로 악화되고 말았던 상황이었어요.
하나뿐인 딸인 저를 항상 귀여해주시고,
술에 취하셨어도 저를 안아주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이 떠올라요.
제가 8살무렵 어렸을때 "우리가 영세민이라는게 싫어 아빠..."
이런 철없는 말들을 자주하고 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후회되요.
아빠가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생각해보면 아빠에게 미안해요.
아빠에게 안겨서 이런 말을 자주 했던 기억도 나요.
"아빠 이 다음에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내가 돈 많이많이 벌어서
아빠 이렇게 힘든일 안해도 되게하고 맛있는것도 많이많이 사줄게"
라고 제가 말하면 아빠는 일이 고되시면서도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딸 효녀네"
라고 말씀해 주셨던 어렸을때 기억이 문득 떠오를때면 구석진곳에가서 혼자 한없이 울고는 했어요.
아빠는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영세한 제재소(나무자르고 옮기는 공장)에서
가장힘든 통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는 일을 하셨어요, 한달 월급은 50만원이었어요.
먹고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월급을 받으시면서도 아빠는 군소리없이 성실히
열심히 제재소를 다니셨어요. 제재소(나무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저녁 7시가 되면
8살 무렵의 어린 저는 아빠가 오신다는 기쁨에 마을어귀까지 나가 기다리곤 했어요.
혹시 야근(야간일)으로 아빠가 늦어질때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 쭈그리고 앉아 아빠를 기다리곤 했어요.
2001년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제가 태어날때부터 가난했던 저희집 가정형편은 그무렵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어요.
아빠는 5년전 2001년, 다니던 제재소(나무공장)에서 갑자기 해고 당하고 말았어요.
해고이유는 '나이가 많다' 라는 단지 그 단 하나의 이유였어요..
그당시 아빠는 55세의 나이였고, 당시엔 또래분들보다 비교적 건강하신편이었어요.
아빠는 19년간 휴일(일요일, 설날 추석등 명절)도 반납한채 월급 50만원이라는 저임금을 받으시면서
19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재소측으로부터 '나이가 많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55세이시던 2001년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해고 당하셨습니다.
아빠는 제재소측에 항의 했으나, 일터 복귀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제재소측으로부터 사업장 점거와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되어, 결국 아빠는
제재소측에 월급에 3배에 이르는 150만원을 피해 보상금으로 물어줘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2일후 저는 단단히 마음먹고 제재소 사장님을 찾아갔어요.
"지난 19년간 저희집 어려운 가정형편을 와보셔서 아시고,
제재소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19년간 쉬지않고 제재소를 위해 일했고,
딸과 보내야할 명절도 반납하고 휴일도 없이 딸을 위해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19년간 쉬지않고 일했는데, 다 쓰러져가는 옛날집외에 논 밭 땅한덩이 없는
어려운 형편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사장님께서 우리 아빠에게 이러시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너무 억울한 마음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당시 12살의 일개 어린소녀에 불과했던 저는 마음속으로는 떨었지만 용기를 냈어요.
그러나 결국 끝내 사장님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어요. 결국 150만원을 한번에
내는것이 아닌 150만원을 2년간 매월 6만 2천 500원씩 나눠 내는것으로 만족할수밖에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되려고 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일주일후 아빠가 제가 사장님께
찾아간걸 어떻게 아셨는지 아무말씀없이 저를 안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두같이 울며, 아빠를 더욱 꼬옥 안았어요, 그날은 '눈물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아빠는 벽돌공장인부, 공사판등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백이면 백 거절당하셨고, 결국 이렇다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아빠는 술에 잔뜩취해 들어오시는 날이 많아졌어요.
어린 저는 아빠의 그런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봤서 당황했지만 이해할수 있었어요.
12살의 어린나이였지만 아빠의 심정을 반정도는 알수 있었으니까요.
2006년 6월 30일 금요일 새벽 3시...
아빠가 수술을 받은지 오늘로 7일이 지났습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채 아직도 깨어나질 못하고 계세요..
담당의사 선생님 말씀이 늦어도 이번주 일요일(7월 2일)까지 반드시 2차 수술을 받아야만 소생하실수 있다고해요.
이후 3차, 4차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당의사 선생님께서는 일단 가장 큰 고비는 넘겼으니 안심하라고 하셨지만...
이대로 의식이 회복되지 못하면 평생을 식물인간으로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식음을 전폐한채 의식이 없는 아빠곁을 지키드리고 있었어요.
26일 월요일인 오늘도 아빠의 의식이 없으셔서, 아직 응급실에 있습니다.
응급실에서의 72시간째인 오늘까지 반혼수 상태에 계세요.
담당의사 선생님 말씀이 두개골 함몰과 골절이 심하게 있었고 뇌 여러군데 멍이 있었다고해요.
뇌가 많이 부어서 두개골을 따로 떼어놓은 상태입니다.
늦어도 이번주 일요일까지 2차 수술시 두개골을 다시 접합하는 수술을 해야해요.
아빠 몸에 피가 잘 돌지 않아 온몸에 붓기도 심해서 저는 병상침대 곁에서
하루종일 24시간 아빠에게 따뜻한 타올로 몸전체를 덮어서 찜질해 드리고 타올로
덮은 팔은 약하게 주물러 드리고 얼굴은 따뜻한 타올로 양쪽 볼을 찜질해 드리고 있어요.
2006년 6월 30일 금요일 아침 7시...
아빠는 사고당한지 7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스스로 숨을 쉬지못해
인공호흡기와 머리에 호스연결해서 피를 빼내는 장치를 부착하신채 숨쉬고 계세요.
수술후부터 지금까지 혈압, 맥박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어요.
7일째가 되자 불덩이 같았던 온몸에 열은 많이 내려 정상체온으로 돌아오셨어요.
수술직후인 첫날 아빠의 체온은 40도까지 올라갔었어요.
수술후 둘째날인 5일전은 38도...
수술후 셋째날인 4일전은 37도...
수술후 넷째날인 사흘전은 37도...
수술후 다섯째날인 그제는 37도...
수술후 여섯째날인 어제는 37도...
수술후 일곱째날인 오늘은 36.5도... 로 체온계로 재보니 정상체온인 36.5도로 내려왔어요.
맥박은 70에서 180까지 뜁니다. 아빠 손과 발을 만져보니
손발이 차가워졌다 따뜻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피검사에서 소금기가 정상 140정도 인데,
현재 150정도로 정상수치로의 뇌의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어요.
두개골 절제수술을 받아 뇌가 부어 피가 잠시 통하지 않고 출혈이 있어서 뇌세포 일부가 죽었다고해요.
하지만 언어와 행동영역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아니기에 걱정마라고 하시면서
다만 완치후라도 약간의 행동장애는 있을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뇌를 다쳤지만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어요.
뇌압이 수술 직후엔 높았지만, 7일이 지난 오늘 뇌압이 많이 낮아져 거의 정상 뇌압으로 돌아왔습니다.
의식회복도 반혼수상태로 회복됐기 때문에 2차수술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죽은 뇌세포 일부가 잠자는 기능을 담당하는 뇌세포라서 무수면(잠을 못자는) 상태가
지속되는게 걱정이지만, 두개골 접합 2차 수술을 받으면 자연히 해결됩니다.
오늘로 7일째... 저는 병상침대곁에서 하루종일 24시간 아빠를 지켜드리고 있어요.
오늘 새벽 담당의사 선생님께 아빠의 뇌손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명을 들을수 있었어요.
대뇌타박상, 미만성뇌손상, 외상성 경막하 출혈, 경막하 수활액낭종이었습니다.
7일전 전신마취후 수술을 받았으나, 보철 제거수술은 아직 받지 못했어요.
얼굴 광대뼈도 일부 골절이 있어 7일전 같이 수술을 받았습니다.
치아도 5개가 부러지셔서 의치수술도 하셔야 하구요.
지난 23일 1차 수술후 7일간 약물치료를 하루 3번씩 받고있어요.
아빠가 향후 완전히 회복하신후 정신과 적으로 기질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고해요. 예를들어 시간(날짜포함)개념과 과거 기억을
지금 일처럼 이야기하고 방금전 한 일도 기억을 해내지 못하는등 기억을 정리하지 못하는등...
정신과 병동에서 입원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르니 미리 대비하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면담시 말씀하셨어요.
오늘 저에게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엄청난 걱정이 하나 생겨버리고 말았어요.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수술비, 병원비, 입원비, 약물치료비, 약값 거기에
오늘 아침 병원에서 7일전 1차 수술한것에 대한 1차 수술비 1250만원이 보호자인 제앞으로 청구됐어요.
어느정도 생각은 하고있었지만 순수 수술비만 1250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가 수술비로 나올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해봤어요.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응급실에 아빠 팔을 주물러 드린 다음 손을 잡고 곁을 지켜드리고 있었어요
그때 병원창구에서 병원방송으로 보호자인 저를 불렀어요.. 병원창구에 도착해서
병원창구 담당하시는 여성직원분으로부터 수술비 계산서를 받아들었어요.
잠시후 병원사무국장님이 오셔서 사무국장님으로부터 병원측 입장을 들을수 있었어요.
"우리병원 입장은 늦어도 이번주 일요일인 7월 2일까지 수술비가 병원창구에 수납되어야만하고
수납되지 않았을때는 늦어도 이번주 일요일까지로 예정되있는 백정두(아빠)씨의
떼어놓은 두개골을 다시 접합하는 2차 수술을 못해줄뿐더러 반혼수상태인
백정두씨를 강제퇴원 시킬수밖에 없다" 라는 입장이었어요. 강제퇴원 시킨후 곧바로
아빠와 저에게 법적으로 1차 수술비 1250만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법원에 넣는다고해요.
최소한의 치료조차 받지못한채 강제퇴원 당하게 생기고 말았어요..
응급환자에게 이래도 되는건가요? 아빠 돌아가시면 책임은 어떻게 질거죠? 제가 따지니까..
지금 경우엔 백정두씨 사망시 책임은 딸인 저한테 돌아간다고 하시면서 알아서 하라고
"계속 이러면 백정두씨를 오늘그냥 강제퇴원 시킬수밖에 없다." 그러시면서 오히려 제게 엄포를 놓았어요..
결국 병원창구에서 힘없이 돌아설수밖에 없었어요..
아빠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누워계시는 응급실로 힘없이 돌아오다가
병원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쏟고 말았어요.
저는 울다지쳐 정신을 잃었고 30분후 간신히 깨어날수 있었어요.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올랐고, 눈물과 긴 머리카락이 엉켜 말라붙어 얼굴은 엉망이었어요.
'보호자인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빠를 살릴수 없어 힘내자'
저는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고, 다짐이 약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어요.
10분간 기도를 드리고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어깨뒤로 넘겨 바르게 정리한후
마음을 비우고 다시 천천히 수술비 계산서 내역을 살펴봤어요.
병원비, 입원비, 약물치료비, 약값을 제외한 순수 수술비만 1250만원이 나왔어요.
떼어놓은 두개골을 다시 머리에 접합하는 2차 수술을 아빠가 받으려면
1차 수술비 1250만원을 7월 2일 일요일까지 병원창구에 수납하고 늦어도 이번주 일요일까지
2차 수술을 받아야만 현재의 반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완전한 의식을 회복하실수 있어요.
이젠 오늘... 거리로 내몰릴 상황이에요.
아빠에게 빛이 되주시면 안되나요?
조금 아주 조금의 짐을 나눠서 짊어져 주시면 안되나요?ㅠㅠ
1원의 소중함을 알아요, 작게 도와주세요, 아빠의 수술비에 보태서 쓰고 보름후 꼭! 갚을게요.ㅠㅠ
세상이 냉정하다는걸 알기에...
도움의 손길만 기다리는 저 자신이 창피해요.
하지만 지금 부탁에 '후회같은건 하지않기'로 저 자신과 약속했어요.
오직 아빠만 수술 받으실수 있으면 되니까요.
아빠만 깨어나실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아빠만 깨어나실수 있다면 제 생명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요.
아빠성함의 농협계좌번호입니다.
농협중앙회 074-02-326172 백정두
제가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저는 지금 재학중인 야간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돈 이란것을 이 악물고 악착같이 벌겠어요.
여학생의 몸으로 어린나이로 할수있는일에 제약이 많다는걸 알아요.
하지만 하겠어요, 무엇이든 하겠어요, 작년에 매달 아빠의 병원비, 약값
약물치료에 돈이 많이 들어가면서, 고향마을의 이웃분들과 제 친구들에게
작년에 크게 빚을져서 이젠 얼굴보기도 미안해져 버리고 말았어요.
지금까지도 빚을 갚지못해 빚을 갚으려면 제가 열심히 일해야해요.
사진한장 남아있지않아 저는 얼굴도 모르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신 엄마에 이어
엄마대신 자매대신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던 세상에 남은 저에게 유일한 가족인
아빠마저 이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시면 우리 착한 아빠가 너무 억울하고 안스러워요.ㅠㅠ
끝까지 아빠에게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그때는... 저의 몸을 팔겠어요.
제가 유명한 탤런트 김태희 언니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예쁜건 아니지만
어렸을때부터 남자아이들로부터 귀엽다는 얘기는 조금 들었어요.
죽으면 썩어 없어질 한낱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저의 몸을 팔아서라도
아빠만 살릴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아빠만 살릴수 있다면 무슨짓이든 하겠어요.
저의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아빠외에 다른것은 아무것도 생각할수가 없어요.
제가 비록 지금당장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아무 힘없는 고작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저의 생명과 맞바꿔 아빠만 살릴수 있다면, 저는 미련없이 저의 생명을 아빠에게 드리겠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니까요.
첫댓글 어머나 세상에 아주 나쁜 사람이군요
아주 나쁜놈입니다. 이런 놈은 혼을 내줘야 합니다.
미친넘 소설가로 출세나 하지 사기나 치고 다녀. 김태희 같은 몸을 팔겠다고. 애라 똥물에 튀겨직일 넘아. 니 엄마가 불쌍타. 전두환이 같은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