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 헤네그라프의 책 ‘예수님의 기도’란 책에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원고를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였죠. “우리 딸이 학교에서 선행 상 받기로 되어 있는 거 몰라요?” 깜짝 놀라서 그는 학교로 차를 몰고 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이들과 부모들이 강당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침에 딸이 오늘 오실거냐고 물었을 때 철썩같이 간다고 두 번이나 대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미안해하는 그를 딸이 먼저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와 아빠를 안아주었습니다. “미안하다. 상 받는 걸 못 봤어.” 그러자 딸은 “괜찮아요, 아빠”하고 딸은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시상식장면을 녹화로 보는데 선생님이 딸에게 말합니다. “크리스티나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며 기도합니다….” 그날 밤, 작은 딸이 말합니다.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예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아빠는 오늘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렸거든.” “알아요. 하지만 언니가 아빨 용서했잖아요.” “용서? 그게 무슨 뜻인데?” “누가 미안하다고 할 때 ‘괜찮아, 그리고 이제 다신 그런 생각하지 마’ 하는 거예요.” 용서는 우리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만든 것처럼 용서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서는 별로 중요한 가치가 아닙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크게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돈많이 버는 성공지상주의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까? 허물을 덮는 용서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으십니까? 용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용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묵상하면서 저는 가정을 지탱하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허물을 덮는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기둥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허물을 덮는 용서가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다른 가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택하신 두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은 허물을 덮는 용서를 통해서 주님이 오실 가정으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임받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 허물을 덮는 용서가 있는 가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는 허물(실수나 잘못등) 때문에 야단을 맞고, 책망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경쟁에서 밀려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가정에서도 이와 같은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배드민턴을 좋아하셨는데 이 운동을 계속해야할지 고민스럽다며 하시는 말씀이 가만히 보니까 이 운동이 남의 실수나 잘못을 유발하는 경기라는 거에요. 받을 수 없는 곳, 받기 어렵게 그래서 다른 이를 실패하게 만들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목회자로서 자신의 심성이 배드민턴의 영향을 받을까봐 염려하는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전8:13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도 먹을 수 있을만큼 자유함을 누리는 자신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있다면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깊이 생각할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깊이 생각할줄 알게 되면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은 아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아주 큰 산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그냥 가정이 생기는 줄로 압니다. 오해입니다. 결혼식은 한 가정을 세워나가는 여정의 출발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들이 세울 가정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 그림 가운데 반드시 허물을 덮는 용서의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고, 험담을 쏟아놓고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의 실수나 허물을 덮어주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더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마1:19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디카이오스란 헬라어는 두가지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공정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흠이 없는’이란 뜻입니다. 공정하다는 말이 그의 삶의 기반이 자기 생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정한 사람이 되려면 모두가 공감하는 원칙을 갖고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청년에게 정혼한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출22:16절에 보면 정혼이란 남폐금 즉 결혼지참금을 지불한 상태를 말합니다. 유대사회의 "납폐금"은 신랑이 신부를 사오는 돈으로 곧'결혼 지참금'을 말합니다. 성경 시대에 히브리 사회는 결혼도 일종의 계약이라는 형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여자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이제 결혼만 남겨둔 시점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소식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요셉의 꿈을 파괴했습니다.
그는 충격과 슬픔을 함께 느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여인에게서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깨질때 참 고통스럽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깨질때의 충격, 부모와 자녀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순간의 충격은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셉은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배신감에 a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 끝에 결심을 했습니다. 19절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마리아를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남 몰래 파혼하려고 마음 먹었다”배신감이 가득한 상태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준 마리아를 위해서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그는 그녀의 허물을 덮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분노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파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마리아에게 묻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이 그녀로 인한 것임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허물을 덮었습니다. 요셉의 이 행동이 예수님의 가정을 세우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일반가정과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허물이 나의 성공의 기회가 되는 세상을 거부하고, 우리 가정에서부터 허물을 덮고 실수를 인내함으로서 세상을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정을 세우는 첫 번째 기둥은 허물을 덮는 용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을 세우는 두 번째 견고한 기둥은 신뢰입니다.
한 때 이런 유머가 유행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탕 속에 들어가면서“아, 시원하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이 뜨거운 탕에 들어갔다 뛰어 나오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못믿겠다는 하소연이 섞인 유머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이겠습니까?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 아내를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밥을 먹고, 버스나 전철을 타는 것은 운전사를 신뢰하기 때문이고, 사무실에서 지붕이 무너지지 않은 것을 신뢰하기에 의자에 앉아 사무를 보고, 해킹 당하지 않을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터넷 거래를 합니다.
신뢰는 인간 사회를 지탱시키는 근간입니다. 신뢰하기 때문에 은행에 돈을 맡기고, 신뢰하기 때문에 의사에게 몸을 맡기며, 신뢰하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먹습니다. 그래서 신뢰도가 높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고, 행복한 사회입니다. 신뢰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불행한 사회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한국은 프라이스 워터 하우스 쿠퍼스(PwC)라는 국제적인 회사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배구조와 회계투명성(2001년)은 조사국 35개국 중 최하위입니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조사에서도 한국의 부패수준(CPI)은 92개국 중 42위, 뇌물공여(BPI)는 19개국 중 18위입니다.
한국 10대 청소년의 가족 신뢰도 조사에 의하면 50%만 부모를 신뢰하는데 수치는 미국(72%)보다도 낮고 세계 평균(69%)보다도 낮습니다.
이런 세상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요? 아닙니다. 신뢰를 회복해야죠. 그리스도인의 가정안에서 우리가 자제해야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순간적인 감정의 충동이 지배하는 가정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감정이 표출되기 전에 한번은 더 깊이 생각하는 멈춤이 필요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는 대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20절의 생각한다는 말은 영감을 받다는 뜻입니다. 영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이 사건을 물었고,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과연 응답이 있었습니다. 20-21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요셉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뢰는 늘 의심의 구름에 쌓여 있습니다. 믿는 것보다 의심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르고,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신뢰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세상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신뢰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식구들이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성령의 잉태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의 지식이나 경험, 이성적인 판단 모두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칼럼리스트 사오유에가 쓴 <일생동안 꼭 피해야 할 17가지 생각의 함정>이란 책에 “7년 전 약속”이란 이야기입니다. 톰이란 사람이 이사하면서 새 침대를 구입하기로 합니다. 그는 ‘블루 포레스트’라는 가구점에서 침대를 주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몇일후 침대가 톰의 집에 도착했지만 집주인은 침대를 주문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침대는 다시 가구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즈음 톰은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침대를 찾으러 오지 않았죠, 가구점 사장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톰을 아는 분이 있으면 침대를 가져가라고 전해주세요.” 2년이 지난후 가구점은 더 이상 침대를 만들지 않았고, 가구점 직원들은 의논 끝에 침대를 계속 보관하기로 결정합니다. 침대가 차지한 면적 때문에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했습니다. 그 사이 가구점 사장도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인수인계할 때마다 전임 사장은 후임 사장에게 침대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후임 사장은 침대에 붙여 둔 메모지의 글씨가 흐려지면 “구매자: 톰”이란 새 메모를 붙입니다.
7년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톰은 의식을 회복했고, 그에 대한 기사가 TV와 잡지에 보도되었습니다. 가구점 사장이 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알고 보니 톰이 7년 전 침대 주문서에 1구역을 7구역으로 잘못 적었습니다. 가구점은 톰에게 회복 기념으로 침대를 선물했습니다.
신뢰란 오랜 시간의 인내와 변함없는 약속에 대한 태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영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불신의 사회입니다. 아무도 서로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부터 신뢰를 가르치고, 실천하며, 신뢰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서 마리아를 신뢰했습니다. 그의 신뢰 덕분에 예수님의 가정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가정안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견고한 가정을 세워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