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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지켜준 한 문장
학년 초, 직원회의가 열렸다. 각 부서 선생님이 전달 사항을 전한다. 장학계 선생님이 삼성 꿈 장학을 홍보하신다. “매년 우리 학교의 상당수 학생이 삼성 꿈 장학금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찾아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학교 메신저를 참고하십시오.”라며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장학계 선생님의 광고는 몇 년 전 꿈장학 멘토가 되어 어려운 학생을 도왔던 흐뭇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년이 임박하니, 삼성꿈장학은 세칭 나 같은 원로교사에겐 무관하다고 단정했다.
조회를 마치고 컴퓨터를 켜고 교내 통신망을 살폈다. 학교 행사 및 전달 사항을 읽어가다 장학계 선생님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나의 업무 분야가 아니었지만 글을 읽었다.
“새 학년 시작하여 바쁘시지요. 삼성꿈장학에 관심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 학생이 모두 풍요롭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관심과 사랑을 학생들에게 기울인다면 숨어 있는 어려운 학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일부러 숨기지 않았고 누구도 숨지 않았건만 마치 없는 존재처럼 눈에 띄지 않는 불우한 학생이 도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저 학적부에 평범한 숫자로 존재하는 학생들. 슬픔을 간직한 채 의자도 걸상도 없는 곳으로 피신하여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학생들, 우리는 수 없이 학생을 사랑하라는 말을 듣지만, 이렇게 불우한 학생들을 지나치기가 일쑤입니다. 첨부된 재단 공문을 참조하시어 추천해 주십시오. 특별한 요건 없어도, 진정성 있는 멘토링 계획을 보내면 선정됩니다.
간단한 시 한 편 소개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었느냐.’ 오늘 ‘뜨거운 삶’이 무엇이며, ‘한 번이라도’라는 시구가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한 명의 학생이라도 도우려는 장학계 선생님의 뜨거운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말로만 학생을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따뜻한 교사가 되라는 요지였다. 퇴직 핑계를 대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새로운 소명이 내 자신을 가득 채웠다.
몇 년 만에 삼성꿈장학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간 학생 추천에 관한 변동 상황과 일정 등 주요 사항을 체크하고 숙지했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해 수업 시간에 만났던 학생들, 선생님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던 아이들, 그리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생 상담실을 자주 들락거리던 아이들 등등….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학생부터 여러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학금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삼성꿈장학이 꿈으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의외로 냉랭했고, 생활보장대상자로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또는 이미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꿈장학 추천을 약속받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과 끊임없이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어야 어떤 기회가 올 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도록 평소에 학생들과 유대감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학교 내 나의 사무실인 어학 준비실은 네 명의 영어 선생님이 있다. 나와 캐나다 출신 원어민 교사 그리고 두 분의 젊은 영어과 여 선생님이다. 본동 건물과 떨어진 특별 교실동에 위치하기 때문에 한적하고 학생들의 출입이 그리 빈번하지 않았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들어오니, 한 학생이 편치 못한 얼굴로 서성대고 있었다. 나는 학생의 이름표를 보고 대뜸 “ㅇㅇ아 왜 왔어?” 하고 물었다. 학생은 갑자기 낯선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니 눈을 휘둥글리며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어떻게 왔어?” 하며 다정하게 불렀다. ㅇㅇ은 “아닙니다. 저 담당 영어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며 겸연쩍게 대답했다. 그때 학생이 기다리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쉬고 있는데, 여 선생님이 말을 건다. 오전 시간에 만난 학생의 가정 형편을 이야기하며 꿈장학 추천을 부탁했다. 나는 “학생을 잘 알고 계시는 선생님이 하시죠.”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여 선생님은 “이미 저는 저의 학급 어려운 학생의 추천서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여 선생님이 부탁한 상황의 전후를 충분히 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학생도 잘 모르고, 정년이 코앞이니 열정이 없다며 불가하다고 답했다. 오전 시간 내내 가슴을 울컥하게 했던 장학계 선생님의 간절한 호소는 이미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가다 복도에서 ㅇㅇ을 만났다. 어제보다 더 힘없는 모습이었다. 그냥 지나쳤다. 점심시간에 식당에 갔다. 학생도 교사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도중 건너 건너편에서 ㅇㅇ을 발견했다. 내 자리와 약간 떨어졌지만, ㅇㅇ의 행동과 표정을 잘 살필 수 있는 각도였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돌을 씹는 듯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도 계속 ㅇㅇ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끔 한숨을 쉬며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고 있는 그 모습, 쇠도 녹일 나이에 밥알이 그렇게 질기고 힘든지 버둥거리는 표정이 안타까웠다.
학교 식당을 나와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청했다. 눈이 가물가물하면서도 이틀간 뜻하지 않게 세 번씩이나 만난 한 학생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어제의 모습, 복도에서 마주쳤던 모습, 그리고 식당에서의 모습. 그 모습들이 반복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자.’라는 메시지가 가슴을 꽉 채웠다.
더는 망설이지 않고 여 선생님에게 물었다. “어제 선생님께 찾아왔던 학생 삼성꿈장학 추천하실 선생님 찾았어요?”, “네. 답답해 죽겠습니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이미 다른 학생을 추천하고 있어서.” 그 말을 듣자마자 “제가 한번 추천해 볼까요?” 물었다. 여 선생님은 “추천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라며 얼굴이 환해졌다. 여 선생님은 ㅇㅇ을 불렀다. 그리고 나와 ㅇㅇ을 번갈아 쳐다보시며 좋은 멘토와 멘티가 될 것 같다며 기뻐했다.
걱정으로 가득 찬 ㅇㅇ의 얼굴이 참 애잔하게 보였다. 그래도 추천 교사를 찾아서 그런지 밝게 미소를 지었다. 푸른 희망에 도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감사의 눈빛도 어렸다. 학생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추천서 접수 마감 날까지 거의 매일 만나 학생의 가정환경, 학생의 현재의 마음, 그리고 미래의 꿈 등을 경청하고 메모했다. 학급 담임을 맡았을 때 학년 초 학생 상담이 기초 상담이라면, ㅇㅇ과의 거의 2주간 연속 상담은 소위 심층 상담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급한 대로 추천서를 쓰기 위해 담임 선생님과 친우를 만나 ㅇㅇ이가 꿈장학 도움을 받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를 조사했다. 상상 이상으로 탐문 결과는 확실했다. 당장 경제적인 지원이 없으면 ㅇㅇ은 학업을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추천서를 쓰면서 마음이 아파 많이 울었다. ㅇㅇ이 처한 상황을 들으면 들을수록 도울 수 있다면 삼성꿈장학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돕지 않고 관심을 저버린다면 학업 중단은 물론이고 생각하지도 못할 불행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뿐이었다.
언젠가 읽었던 김선영 소설 ‘내일은 내일에게’의 주인공 여고생 연두가 생각났다. 연두는 친엄마·아빠 다 돌아가시고, 새엄마와 이복동생과 함께 산다. 만만찮은 삶의 현실에 연두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연두에게 조그마한 빛이 스며든다. ‘커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연두는 자신의 말을 ‘소중히 담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크게 감동한다. 마음을 다해 커피를 내리는 카페 아저씨를 보고 연두는 의문을 가진다. ‘마음을 담는다. 마음이 무엇일까?’ 그리고 우연히 아저씨의 편지를 읽는다. 프랑스로 공부하러 오라는 초청을 거절하는 아저씨의 편지 끝부분에 연두 이름이 등장한다. “연두에게 우리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연두는 놀란다. ‘내 미래를 기대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무엇이라고.’
그렇다. 나에게는 연두가 ㅇㅇ이다. ㅇㅇ도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어깨에 힘이 축 처져 걷지 않을 것이고, 의기소침하여 밥을 돌처럼 씹지 않을 것이다. 그를 도울 누군가가 필요하고 삼성꿈장학이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가 씩씩하게 “나는 살아 있으니까. 나는 살고 싶으니까.”라고 외치면서 하루를 힘차고 즐겁게 보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나는 학생 지도에 있어 정서적 지지의 중요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평생을 바쳤던 이 학교에 마지막 열정으로 뜨거움을 전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마침내 추천서를 완성했다. 결과를 기다렸다. 대단히 초조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노력의 좌절은 며칠이면 잊겠지만, 한 학생이 겪어야 할 좌절과 절망은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었다. 정말 애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발표 날짜가 다가올수록 더욱 불안했다. 결국 삼성꿈장학생으로 선정되었음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기쁘고 벅찼는지 모른다. 이제 삼성꿈재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멘토가 되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장학금이 입금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멘토링을 위해 ㅇㅇ을 자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멘토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장학금을 전달하는 선에서 내 역할을 다 했다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궁극적으로 멘토와 멘티의 소통 부재를 느껴졌다. ㅇㅇ은 내가 조금 낯설었는지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 추천서를 쓰기 위해 진술한 그 이상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장학금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자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오로지 장학금만을 탐했는지 의심했고, 인격의 됨됨이까지 의심하게 했다. 언제나 어렵다는 것만이 전부였을 뿐, 정작 자신의 내적 문제에 대해서는 불분명했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심적 상태, 성취동기, 학교생활의 적응 여부, 학습 능력 등을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다. 즉 어렵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이지 못했다. 멘토와 멘티의 진정한 소통 부재로 인해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 않고 서서히 줄어들었다.
소통이 잘 이루어지도록 여러 방법을 탐색하고 시도했다. 개인적인 생활보다는 일반적인 진로를 상담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학업·학교생활 적응 여부도 질문했다. 진로 탐색 및 개발 지원으로 미래 비전 있는 유망 학과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미래의 관심 있는 대학을 찾고 진학하고 싶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어오라고 했다.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진학 관련 행사에 함께 참여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께 성격유형 검사와 진학 탐색 검사 결과를 요청하여 학습 상담과 진로 상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멘트다운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오랜 교직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만들었던 ‘한 문장의 힘’이라는 자기 계발 지침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고 무력해지고 괴로울 때 암송할 수 있는 한 문장이 있다면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취지다. 자신만의 좋은 문장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넉넉하고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한 문장을 만들어 삶의 지표로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은 조용히 ㅇㅇ을 불러 “너 김형석 교수 알지?”하고 물었다. ㅇㅇ은 알고 있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김 교수는 병약하게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형석이가 듣는 앞에서 네가 스무 살까지 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100세가 된 지금도 잊지 못할 한 문장을 만들었다. 당시 열네 살이었다.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일을 하겠다.’ 이 한 문장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 문장에 힘입어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다며, ‘한 문장의 힘’을 설명했다.
나의 일화도 소개했다. 학창 시절에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읽고 한 문장을 만들어 마음에 새겼다고 말했다. 소설은 각기 주인공이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며 사랑을 이루는 해피엔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소설을 읽고 오만과 편견의 근원이 무엇이며 극복하는 방법을 곰곰이 성찰했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하자.’라는 한 문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한 문장은 항시 나를 균형 있고 조화로운 인물이 되도록 노력하게 했다며 ‘한 문장의 힘’을 극구 찬양했다.
한 문장은 사람에게 안전지대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사고와 행동의 영역을 설정해 삶의 기쁨을 던진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한 문장을 가지기를 원한다. 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인간은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한 문장에 집착하는 걸까? 갑갑한 인생을 설명해줄 수 있는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이것이 한 문장을 마음에 기억하고 새기는 이유라며 직접 한 문장을 만들기를 권했다.
ㅇㅇ은 이야기를 듣고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며칠 후 ㅇㅇ이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이런 문장을 만들었어요. ‘오늘을 살자.’라는 모토를 가지고 살겠습니다.” 하며 웃었다. 왜 이 문장을 만들었는지 물었다. 그는 답했다. “창피할 정도로 부끄러운 지난날을 잊을 것이며, 미래의 불안도 덜어버리고 오로지 고등학생으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ㅇㅇ은 활기차고 생기가 넘쳤다. 더불어 조금씩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멘토와 멘티가 서로 마음이 오가고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꿈장학이 학생을 격려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면, 그 결과로 꿈을 찾도록 삶의 한 문장을 만들도록 격려했는데, 이 삶의 한 문장은 멘티에게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힘을 갖게 했다.
나는 더더욱 한 문장의 힘을 강조했다. 사람이 지니는 한 문장은 인생을 끌고 가는 전사의 역할을 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내 삶의 전체를 던질 수 있는 꿈을 갖게 한다며, 한 문장을 가진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며 삶을 치열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뭐가 돼도 괜찮아!’라는 식이 절대 아님을 설명했다.
서로 마음이 통하자, ㅇㅇ에게 주말을 이용하여 자원봉사활동을 제안했다. 장학금으로 도움을 받은 만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역설했다. 안성맞춤으로 학교에는 봉사 동아리 활동 프로젝트가 있었다. 학생이 선택만 하면 봉사활동을 어느 때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ㅇㅇ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봉사활동을 신청하라고 일렀다. ㅇㅇ은 의젓하게 “선생님이 저 때문에 매주 주말을 포기하시면 제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철든 ㅇㅇ이가 내 살붙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선생님은 나이가 들어 주말에 할 일이 없어 항상 심심해!”라고 응수했다.
몇 달 동안, 우리가 사는 지역에 위치한 ‘성신원’이라는 보육원을 매주 토요일 오전마다 찾았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ㅇㅇ은 자신보다 어려운 애들이 숱하게 많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다정하게 웃어주는 부모님이 계시니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라는 사실은 ‘오늘을 산다’는 한 문장을 분명히 확인시켜 실천이라고 기뻐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대학 입시철이 가까워진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 지원을 위한 입시지도다. 물론 담임 선생님이 잘 지도해주시겠지만, 꿈장학 멘토인 나 역시 담임 선생님이 다룰 수 없는 영역을 찾아 ㅇㅇ을 도와야한다고 생각했다.ㅇㅇ에게는 부모, 선생님, 그리고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정신적 연대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내는 단 한 명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고등학교 마지막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오늘을 산다.’라는 한 문장의 힘을 지켜낼 것 같았다.
ㅇㅇ은 공과 대학을 진학하여 엔지니어가 되어 사회에 일익을 담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신의 가정을 돕고자 한다. 나는 교직 생활에서 다년간 고3 진학지도를 했기 때문에 ㅇㅇ의 성적으로 진학할 수 있는 대학과 학과를 쉽게 어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수시 전형으로 진학하기도 그렇고, 일반 전형은 수능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걱정스러웠다.
더불어 ㅇㅇ은 가정 형편상 등록금과 학비를 지원받을 대학을 진학해야 하기에 더욱더 좌절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더 힘내라고 격려하고 부족한 과목에 대해 더 분발할 수 있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진로 계획은 전체 고등학교 종합 성적이 나올 때 더욱 세심히 들어다 보도록 하자고 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럽게도 ㅇㅇ은 아침 8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10시에 끝나는 고3 일정을 담담히 채워 나갔다. 담임 선생님에게 물었더니 성적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지만, 흐트러짐 없이 초지일관 학습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그 흔한 조퇴도 한번 없다며 기특하다고 대단히 칭찬했다. 멘토인 나에게도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ㅇㅇ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가 성적은 우수하지 않지만, 일생에 한 번인 고 3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보낼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의 뒤에는 삼성꿈장학이 있고, 그 꿈장학과 함께 자신을 담는 멘토 선생님이 계시는 것을 자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지침이 되는 한 문장이 자신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마음의 강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꿈장학 지원서를 써 주기로 하고, 지원신청서를 준비하며 멘토링 계획서와 일지를 정성껏 써 내려가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장학계 선생님의 말씀이 어쩌면 삼성꿈장학 멘토가 되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대학 입시도 몇 달 남지 않았다. ㅇㅇ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그리고 ‘삼성 꿈이 준 한 문장’을 평생 간직하며 이웃에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진정 바란다.
나의 충동, 나의 글
70대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를 보면서 실컷 웃었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과 솔직한 태도가 매력이 넘친다. 툭툭 던지는 말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남에게 장단 맞추고 살지 말어. 너 하고 싶은 대로 북 치고 장구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이 와서 춤추는 거야.”라는 말이 어찌나 속히 시원하던지 몇 번 돌려 보았다.
나는 왜 이 소절에서 위로를 받고, 한숨을 돌리며, 새로움을 가다듬게 되는지 묻곤 한다. 나는 종종 나의 글이 좋은 글인지, 그저 그런 글인지를 세상에 물어보고 싶어 한다. 어제 누구에겐가 물었던 것을 오늘 또 다른 누구에겐가 똑같이 묻는다. 나는 나의 글을 여러 잡지에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글이 다른 글들과 비교하여 은연중에 우위에 있기를 바라고 소망한다. 이런 와중에도 잡지사의 편집부가 나의 글을 거절하는 것을 보게 될까봐 불안해하며 자신을 가누지 못한다.
이렇게 지내온 일이 내 글쓰기의 하루하루다. 오늘은 할머니의 말마따나 다른 이에게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조언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에게 허락해주고 싶다. 나는 언제나 타인을 향해 서서 답을 구하는데, 그 누구도 나에게 필요한 도움이나 진실한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이제 타인을 향해 물음을 던지지 않겠다. 타인으로부터 답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
물음이 있고 답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로 던져지고 나에게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 안으로 깊숙이 내려가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글쓰기의 필요성’이 생겨나는지를 찾아보아야 한다.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끝까지 써내려갈 수 있는 집념이 가지를 뻗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나의 글을 쓸 수 없게 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래도 끝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내가 맞이하는 가장 고요하고 한적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묻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라는 답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진다면, 나 자신이 단순하지만 힘 있게 이루어진 “나는 써야만 한다.”라는 말을 묵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젠 나의 삶을 저항할 수 없는 요구에 따라 세워 나가겠다. 가장 하찮아 보이는 나의 삶이 가장 고갈된 시간 안에서까지 깊은 충동의 표시와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글쓰기가 나의 삶의 깊은 충동, 그러니까 갈망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인기 작가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오로지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를 바탕으로 나의 능력만큼 노력하면서 쓰고, 또 쓰면서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계속 쓰고 기다리다 보면 행운은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다가와서 손을 내밀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글쟁이의 길이고 인생이다. ‘확 살아. 휙 간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다시 가슴을 떨리게 하고 컴퓨터 자판을 터치하게 한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이 말해주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얻고 싶다면 묵묵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날개는 누가 달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살을 뚫고 나오는 것이다. 열심히 살지도 않고 큰 성취를 바라는 것이나 열심히 글도 쓰지 않으면서 좋은 글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멋있어지길 바라는 것은 삶을 도둑질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러시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뉴욕으로 이민하여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의 주인공으로 유명하고, 1970년대 한국 TV에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 ‘야망의 계절’ 원작자인 미국 작가 어윈 쇼(1914~1984)는 작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작가의 소양 중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 거의 재능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는 세상이 준 형벌이건 스스로 가한 형벌이건, 그 형벌을 꿋꿋이 견디는 능력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실패가 성공보다 더 지속적으로 찾아온다. 삶에는 어려움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가끔은 화창한 날도 있지만, 대개는 밖에 비가 내린다. 하지만 바로 그 형극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고 새로움으로 무장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형벌을 받아들이고 밀어제치며 나아갈 힘과 야망을 가질 수 없다. 결국 그런 작가는 글을 쓰는 체 하다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세상일에 빠지고 만다. 다시 신발 끈을 묶고 누구도 걷지 않은 작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충동, 나의 글’이다.
어찌할 수 없는 영역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명절 후 마지막 연례행사인 아내의 불호령도 큰 대가 없이 그럭저럭 잘 치렀다. 다행히도 올해는 아내의 목소리가 높지도 않고 길지도 않아 한층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떠난 아들딸의 뒷모습이 자꾸 그려져 썩 편치는 않다. 자식도 내 품에 있을 때 자식이지, 머리가 크고 굵어지면 먼저 저 자신만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 섭섭함이 가득하다.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가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다. 아들 부부와 대학생 손자들과 식사를 하고 나면 계산은 반드시 여든 살 아버지가 하신다고 한다. 심지어 생신이나 어버이날도 예외가 아니다. 자녀들이 주위 시선이 따갑다고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리니 아버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아직 자식들 밥 사 줄 능력 있다. 나중에 더 나이 들면 그때 사 주라.” “바쁜 세상에 시간 내주어서 고맙고 밥 한 그릇 뚝딱 비울만큼 건강해서 좋다.” 이번에는 자녀들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답하자 그 말을 듣는 게 ‘삶의 낙’이라고 한다.
돈을 내는 것이 노인의 ‘낙’이라고 하니 왠지 상큼하지 않다. 처음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 ‘부모의 낙이다.’라고 이해했다. 곱씹으니 이번에는 다르게 여겨진다. 무엇이든지 자식의 삶에 부모가 한 부분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다 성장해도 언제나 함께하기를 원하는데 현실은 허락하지 않음이 다반사다.
이번 명절을 보내면서 자녀들과 대화 속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내가 관여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이순을 갓 지난 이 나이에도 이러한데 앞으로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거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대부분일 것 같다. 위에 언급한 어르신이 식사비라도 내면서 자식과 합류하고 싶은 심정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자신의 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키우고 돌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강진 백련사 근처 도예촌, 어느 도예가 부부 집을 방문했다. 대화 중 도자기 굽는 공정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정성스럽게 도자기 틀 위에 소재 흙을 실어 돌려가며 다듬어내고, 그 위로 유약을 바르고 굽는 일련의 과정을 차분하게 설명하자,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묻는다. 이렇게 만든 작품의 가격대가 어떻게 되는지요?
가격을 알려주는 건 예술가에겐 어쩌면 민망한 일인지, 그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답한다. 어떤 도자기는 5만 원짜리로 나오고, 어떤 것은 200만 원짜리 나오는 등 똑같은 재료와 그림을 그려 구웠는데 40배의 가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작품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때 도예가가 답한다. 흙을 고르고, 곱게 빚어내고, 그림 치고, 유약 발라 굽기 전까지 도공들은 매번 최선을 다해 정성을 다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은 그저 그런 도자기로, 어떤 것은 빛깔조차 신비로운 것으로 나온다고 했다.
도공은 도자기를 빚는 과정에서는 똑같이 정성을 다하지만, 자기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이라 했다. 가마 속 불에 운명처럼 맡길 수밖에 없고, 그 불은 인력의 통제 밖이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땔감을 쓰고, 풀무질을 정성스럽게 해도 가마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고르기와 세기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예술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과, 어찌할 수 없는 가마 속 불의 세계가 명확히 분리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 하나하나를 만드는 모든 이력에는 어떤 신비한 영역에 대한 외경심의 흔적이 새겨지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기술로 가마의 불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하니, 신묘한 영역은 인간의 통제 밖이다.
사람 빚는다는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다. 성정과 지식과 건강한 몸을 기르는 데까지는 부모 영역이겠지만, 자녀가 앞으로 인생살이에서 어떤 불꽃을 만나 어떻게 구워지고 그슬리며 다듬어져 멋진 작품으로 빚어질지는 부모인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여 빚어나가되 겸손한 마음으로 가마의 불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자식 사랑이다. 자꾸 불까지도 통제하며,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원하는 빛깔을 덧대어 자식 하나 보란 듯이 성공시키려고 온갖 노력 다하는 과잉 의욕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유약을 바른 후 세상이라는 가마에 내보낸다. 그 후 아이들이 불길 견디며 잘 빚어지기를 기원한다. 그것이 부모나 도예가가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영역의 신비함을 외경심으로 인정하고 수긍해야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충분히 성장하여 자립한 자식의 일에 관여하려고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도예공의 마음보다는 언제나 식사비를 내는 할아버지의 마음일까.
식사비를 내는 일이 ‘삶의 낙’이라고 하시는 어르신이나 도자기를 굽는 도예가나 똑같이 자식의 삶에 부모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부모는 서운해 하고 분노하며 밤잠을 설친다. 도자기를 굽는 일과 마찬가지로 자식을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일 하나도 명쾌한 것도 없고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빨리 인정하고 끊임없이 좋은 도자기를 위한 도공의 마음이 되자.
아이가 행복입니다
1970년 우리나라 연간 출생아 수는 약 100만 명이었다. 거의 50년이 지난 2018년에는 40만 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여자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보여주는 합계출산율도 1.05명으로 사상 최저치로 낮다. 이것은 여자 1명이 평생 1명을 낳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구절벽’에 진입하는 속도가 가팔라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을 세우고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달라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 영어 교사 연수로 하와이대학을 방문했다. 처음 해외여행이었고 미국령 태평양의 이국적인 섬이 나의 마음을 온통 흔들었다. 내 나이 또래의 여선생님들과 오전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하와이 곳곳을 관광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우리 연수생들에게 이상한 진풍경이 있었다. 오전 수업 중 짧은 휴식 시간에 몇 개의 공중전화부스는 한국의 여선생님들의 긴 행렬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걱정되어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폰을 소지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일부 선생님은 아예 수업이 10분 이상 늦게 들어왔다. 그 당시 예비군 훈련 중 정관수술을 받으면 훈련을 면제받고 일찍 귀가하는 시절이었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2010년 호주 연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하와이 연수와 전혀 달랐다. 모두 개인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어 공중전화부스에 기다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함께 온 대부분 여선생님은 이미 결혼 적령기가 넘었지만, 미혼이었고 결혼했더라도 아직 애들이 없어 아이 걱정이 없었다.
하루는 수업 시간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를 하나 또는 두 개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사는 주문했다. 나에게 어떤 숫자가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강사는 조금 기다리더니 자신의 가장 중요한 숫자는 “1978과 1980”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의아했다. 이어 그녀는 슬라이더로 두 건장한 청년을 보여 주었다. 이 두 청년을 낳았든 해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귀중한 숫자라고 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어느 신문에 잊지 못할 출산부터 다양한 육아 경험을 소개하는 쪽이 있다. 아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온 가족의 삶을 바꿔놓는다고 강조하며, 엄마·아빠들은 한결같이 “직접 낳아 키우기 전까진 모르던 기쁨”이라고 했다. 마음에 찡한 말이 절절했다.
“소담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아빠는 아빠 인생의 전성기가 20대였다고 생각했어. 소담이가 태어난 뒤로는 ‘지금, 이 순간’이 아빠 인생의 황금기야.” “팔·다리·허리가 쑤셔도 손주가 안아달라고 달라붙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대한민국 5000만 명 중에 누가 나한테 이렇게 달려들겠어요?” “2012년 가을에 태어난 우리 딸이 벌써 일곱 살. 제 품을 떠나 스스로 자랄 때가 되니 이상하게도 고생했던 기억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딸의 어린 시절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첫딸에게 동생 만들어주고 싶어 둘째를 가졌는데 네쌍둥이를 자연 임신했어요. 한 주마다 한 명씩 더 발견했는데, 처음 쌍둥이라고 할 때는 기쁘고, 세쌍둥이라고 하니까 두렵고, 네쌍둥이라니까 차라리 마음이 안정되며 ‘이러다 다섯 쌍둥이까지 가는 거 아니냐?’고 웃었습니다.” “한 명이 울면 아이 넷이 전부 울고, 기저귀 두 상자를 사흘이면 다 써요. 그래도 낳아보지 않으면 그 기쁨을 몰라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힘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주는 기쁨이 몇 배로 크기 때문에 네 아이 낳은 걸 후회한 적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쑥쑥 큽니다. 결국 모든 선택은 아이가 스스로 하더라고요.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너무 겁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딸이 컸을 때 ‘널 키우면서 너무 재밌었다’고 말해주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육아휴직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아이는 낳으면 절로 크는 줄 알았겠지요. 아기가 저를 보고 '아푸아'라고 처음 불러주던 날이 기억납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첫 순간을 참 많이 선물 받았습니다.” “출산이 늦은 게 아닐까 고민하는 30~40대 여성들에게 '아이는 행복'이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함박웃음 짓는 딸을 볼 때 저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 제 나이만 쉰 전이라면 셋째도 낳고 싶어요. 살다 보니 다른 어떤 재미보다 아이 낳아 잘 크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결혼 12년 만에 아기가 찾아왔어요. 병원에서 처음 아기 심장 소리를 들었던 순간.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2초였어요.”
최근에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직장 동료가 수염을 깎지 않아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가득했다.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하여 “왜 수염을 길러?”하고 물었다. 재미있는 답이 나와 낄낄 웃었다. 대답인즉 해외에서 유학하고 있는 외동딸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오는데 딸이 아빠 수염을 좋아해 만질 수 있도록 수염을 기른다고 하였다. 오로지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뿐이었다.
몇 달 전 서울에 올라가 장성한 아들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짧은 편지를 보냈다. ‘서울에서 너희들과 헤어지고 엄마와 내가 기차에 앉았을 때 허전했다. 이번에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소개받고 나니, 마음이 텅 비고 무엇을 빼앗긴 기분이다. 그래도 너희들 키울 때가 훨씬 좋았던 시절인 것 같다. 현관문에 들어서니 아들딸 다 떠나고 집이 빈 둥지처럼 느껴진다. 엄마도 별말이 없는 것 보니 떠나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이 서운하고 힘들었던 모양이더라. 나보고 “먼저 집에 들어가세요. 나는 혼자 어디 가서 마음 놓고 울다 갈게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행복했던 세월이 다 끝난 것 같다. 너희들 키울 때가 제일 즐겁고 감사한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읽으니 나의 마음은 더 슬프고 아리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사랑이 넘치는 고생을 많이 했으니. 어쩌면 그 고생 다시 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다. 서로 소중히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다. 아빠같이 늦게 깨닫지 말고 현재의 삶에서 새기며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라. 잠이 오지 않아 몇 자 적었다.’
요즈음 숱한 세월이 흘러 비로소 ‘아이들이 행복이었다.’라는 그 어마어마한 진리가 마음에 크게 느껴진다. ‘애들아! 항상 어디선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주라.’ 너의 기쁨이 부모의 기쁨이고, 너의 슬픔이 부모의 슬픔이란다.
(마음이 머무는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화전을 준비하기 위해 「시와 산문」 동인들과 함께 여수에 위치한 도공의 집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목에 평범한 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의 호수를 따라 죽 둘러 있는 시의 표지판이 눈길을 끌었다. 그 중에서 황지우 시인의 시 표지판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라는 마지막 구절을 읊조릴 때, 누구나 한 번은 경험했을 기다림의 절실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시에 나타난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라고 여겼지만, 그게 전부 아닌 것 같다.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 너’이지만 ‘너’에 대한 기다림을 설렘과 행복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찌 보면 ‘너’를 만날 미래보다 현재의 기다림을 흡족해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미리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고, 발자국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에도 놀랄 만큼 ‘너’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또한 그것이 ‘너’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애리다, 라는 표현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시는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너’를 기다리는 행위는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다. 하지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은 한없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여 ‘나’를 절망의 현재로부터 희망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 소망에 대한 기다림은 반드시 성취될 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초조와 절망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확인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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