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曰北扶餘解扶婁之庶孫優臺也. 娶卒本人延陀勃之女召西奴而生沸流(以溫水爲神故名沸流也)及溫祚而卒. 朱蒙自扶餘避難, 而至召西奴迎之爲夫, 傾財而助其業遂建高句麗國. 朱蒙愛沸流溫祚如己子, 及朱蒙之子類利自扶餘來代其父, 沸流謂弟溫祚曰 “我母助成大業而國歸類利吾等贅疣也, 不如奉母南行別立新國” 溫祚諾之乃與烏干馬黎等十臣率其黨類, 而渡浿(佟家江)帶(豆滿江)二水至彌鄒忽(三水), 而居之立東明廟(扶餘神也), 而國號曰百濟(濟者祭水也以濟爲號者居於水邊故也, 百者大也)
(비류왕)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서손 우대이다.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비류(이로써 온수를 신으로 삼았는데 비류는 온수의 옛 이름이다)와 온조를 낳고 죽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피난 와서 이르렀는데 소서노가 맞이하여 남편으로 삼았다.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드디어 고구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주몽이 비류와 온조를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주몽의 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와서 그 아버지 (주몽을) 대신하기에 이르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어머니는 나라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니 쓸모없는 사마귀살이 되었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과 같지 않다.” 온조가 승낙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그 무리들을 이끌고, 패(동가강),대(두만강) 두개의 강(삼수)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다. 미추홀에 살면서 동명묘(부여신)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백제(‘濟’는 제사를 지내는 물이라는 뜻이다. ‘濟’를 나라이름으로 부른 것은 물가에서 거주한 까닭이다. ‘百’자는 크다는 뜻이다)라 불렀다.
二年 甲辰 正月 與群神議曰 “靺鞨連我北境勇而多詐宜繕兵積穀而拒守之”(靺鞨者斗滿江北之東海族也) 三月 以族父乙音爲右輔委以兵馬之事
2년(B.C.17) 갑진 1월에 (왕이)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말하였다. "말갈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켜야 한다”(말갈은 두만강 북쪽의 동해족이다). 3월에 왕은 족부 을음을 우보로 삼고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三年 乙巳 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急擊大敗之其生還者十之一二.
3년(B.C.16) 을사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그 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四年 丙午 春夏旱 饑疫. 八月 遣使樂浪修好.(樂浪吊南亦與靺鞨相爭故百濟欲引之爲援也)
4년(B.C.15) 병오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낙랑은 동남쪽에 있는데 역시 말갈과 더불어 서로 다투는 까닭으로 백제가 원군으로 삼아 끌어들였다)
五年 丁未 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B.C.14) 정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고, 사냥하였는데 신록을 잡았다.
八年 庚戌 二月 末曷三千來 圍慰禮城(慰禮城者都城也. 三水也) 閉門經旬不出 待其盡而歸 簡銳卒 追及大斧峴(北靑 厚致岺也) 殺虜五百餘人. 七月 築馬首城(鏡城 翰城) 甁山柵(明川 永平山城) 與樂浪失和.(百濟自三水出 鏡城立城柵 以備靺鞨樂浪自 以爲其地而禁之 百濟不聽故請一戰以決勝敗)
8년(B.C.11) 경술 2월에 말갈 적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위례성은 도성을 말한다. 삼수에 있다) (성)문을 닫고 열흘동안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북청 후치령)까지 쫓아가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마수성(경성 한성)을 쌓고 병산책(명천 영평산성)을 세워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백제는 삼수로부터 출발하여 경성에 성책을 세웠는데 이로써 말갈과 낙랑을 스스로 대비하였다. 이로써 그 땅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백제가 듣지 아니하여 그런 까닭으로 (낙랑이) 일전을 청하여 승패를 결정하게 되었다)
十年 壬子 九月 王出獵獲神鹿 以送馬韓(與靺鞨樂浪失和故與馬韓修好).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似今富寧大川)而敗 績依靑木山(鏡城 白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乃退
10년(B.C.9) 임자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말갈, 낙랑과 우호를 잃고 마한과 우호를 닦은 까닭이다).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 가 (지금의 부녕대천과 같다) 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경성 백산)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곧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唆末曷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七月 設禿山拘川兩柵(厚致岺赴戰岺附近之地) 以塞樂浪來侵之路
11년(B.C.8) 계축 4월에 낙랑이 말갈을 부추겨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독산과 구천의 두 목책(후치령에서 나아가 전령부근의 땅)을 세워 이로써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召西奴薨六十一. 五月 王弟溫祚出遊漢山下(狼林山)謂其臣曰 “靺鞨樂浪連侵王都妖祥累見國母棄養此地膏腴可居 而兄王無遷都之意 吾等分衆居此地” 何如衆曰諾. 七月溫祚立柵於漢山下請分居王許之, 分慰禮城民戶與之. 八月溫祚遣使馬韓告移居而請借邊地.
13년(B.C.6) 을묘 2월에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5월에 왕의 동생 온조가 한산 아래쪽(낭림산)을 다녀오더니 신하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말갈과 낙랑이 계속 왕도(도읍)를 영토를 침략하므로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이 땅을 돕기를 버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우리를 돕기를 버리니) 기름진 땅으로 옮겨 살아야 한다. 형 왕(비류)은 천도할 뜻이 없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이 땅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나누겠다.” 이리하여 군신들이 승낙하였다.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나누어살기를 청하여 왕(비류)이 허락하여, 위례성의 백성들을 나누었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리고 경계의 땅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
十四年 丙辰 正月 溫祚定新都於漢山下(似今寧遠德川地方, 時馬韓衰弱使溫祚居其邊地以御靺鞨樂浪者也). 二月溫祚巡撫其新部落以勸農事. 七月築城於漢水西北, 分新都民往守之(漢水者大同江之出狼林山者也, 此時築城似今廣城岺妙香山也)
14년(B.C.5) 병진 1월에 온조가 새로운 도읍을 한산 아래에 정하였다.(지금의 영원·덕천 지방이다. 이때 마한이 쇠약해져서 온조로 하여금 그 경계에 거주하면서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여 주기를 바랬다.) 2월에 온조가 새로운 부락을 순행하며 농사를 짓기를 권장하였다. 7월에 한수 서북에 성을 쌓고, 새로운 도읍의 백성들을 나누어 가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한수라 함은 대동강이 출발하는 낭림산을 일컫는다. 이 때 지은 성은 지금의 광성령 묘향산이다.)
十五年 丁巳 正月 溫祚作宮室不儉不侈, 請王宴樂, 王見新都鼎足而彌鄒忽凋殘而有慚, 邑而歸.
15년(B.C.4) 정사 1월에 온조가 궁실을 지었는데 누추하지 않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왕(비류)에게 청하여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하였다. 왕(비류)이 새로운 도읍이 뛰어남을 보고, 미추홀이 시들어 무너지고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도읍(미추홀)로 돌아갔다.
十七年 己未 春樂浪來侵焚慰禮城(彌鄒忽也). 王戰敗憂懣以薨. 王弟溫祚統其衆而繼立爲王以新都爲慰禮城.
17년(B.C.2) 기미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 질렀다(미추홀이다). 왕(비류)이 전쟁에서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 죽었다. 왕의 동생 온조가 그(비류의) 무리를 거느리고 계승하여 새로운 도읍 위례성에서 왕이 되었다.
《해설》 얼핏 보면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고구려사초(또는 사략)에는 비류가 후에 고구려의 태보가 되었다가 A.D.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백제왕기에는 고구려에 들어가지 않고 미추홀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실제로는 비류가 고구려에서 죽은 것이 사실이더라도 백제의 입장에서는 미추홀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비류는 백제의 시조와 다름없기 때문에 만약에 그런 사실이 있어 사실대로 적는다면 백제가 고구려의 종속국이 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한 정벌 시에 고구려사초에서는 고구려가 3년 동안 군사적으로 백제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런데 백제왕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마한은 말갈, 낙랑, 가야에게 영토를 침식당하는 등 쇠퇴의 길에 있었지만 백제에게 멸망당할 정도의 작은 나라는 아니었다.
마한을 합병전과 합병 후의 백제의 군사수를 비교해 보아도 백제 자체의 국력으로 마한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유고를 해석하는 일은 이런 사실들을 찾아 역사를 바르게 세우는데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비슷하더라도 참고할 내용이 있다.
溫祚王
온조왕
沸流王母弟也. 溫祚之意與沸流相同, 孝友善御衆有雄略.
비류왕의 동모제이다. ‘온조’와 ‘비류’는 같은 뜻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선(도덕에 합당한 것)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웅대한 계략이 있었다.
元年 己未 四月 立國母廟.
원년(B.C.2) 기미 4월 국모(소서노) 사당을 지었다.
二年 庚申 十月 末曷掩至 王帥兵戰於七重河(狄踰岺北禿魯江上流也) 虜獲酋長素牟 以送馬韓 而坑其餘衆.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咸興草黃岺也) 至臼谷 遇大雪乃還
2년(B.C.1) 경신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이 장수가 되어(친히) 칠중하(적로산 북쪽 독로강 상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함흥 초황령)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四年 壬戌 二月 設大壇 祠天地 異鳥五來翔
4년(A.D.2) 임술 2월에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맴돌았다.
六年 甲子 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末曷賊 一戰破之 獲其生口 分賜將士.
6년(A.D.4) 갑자 8월에 석두성과 고목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살아있는 채로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8년(A.D.6) 병인 7월에 웅천책(지금의 삼등이다, 이로써 웅성강을 웅천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川’의 아홉(숫자의 끝)은 웅천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한강과 임진강 역시 웅진이라고 일컬음이 확실하다.)을 세우자 마한 왕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더니,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사죄하였다.
九年 丁卯 二月 王宮井水暴溢 馬生牛 二身一首 日者曰 "井溢者 大王勃興之兆也 馬生牛者 大王幷呑隣國之兆也. 二身者辰馬也(此時新羅來 與百濟相隣 而以爲辰馬者 以樂浪爲辰韓者也)" 王聞之大喜
9년(A.D.7) 정묘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몸이 둘에 머리 하나였다. 일관(그때그때 점치는 사람의 관직)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말이 소를 낳은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두개의 몸이란 진마를 말합니다.(이때 신라가 와서 백제와 더불어 서로 이웃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마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낙랑을 진한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해설≫ 이때의 백제는 남마한 정복 이전이므로 어떻게 신라와 접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十年 戊辰 七月 馬韓漸弱 上下離心 王知其不久 謂群臣曰 “儻爲他所幷 唇亡(원문은 본자)齒寒 不如先人取之 無至後悔” 乃命將士備之 十月 王陽言出獵 而潛師 襲馬韓倂 其國邑 唯圓山(似今北漢山)錦峴(似今開城) 二城固守 不下
10년(A.D.8) 무진 7월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나뉘어 왕이 마한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고 군신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갑자기 다른 곳으로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니 먼저 마한을 손에 넣으면 후회에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장졸들에게 명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 10월 왕이 사냥을 나간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몰래 출병하여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지금의 북한산)과 금현(지금의 개성) 두개의 성만은 굳게 지키어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十一年 四月 二城下 移其民 於漢山之北 馬韓遂亡(按此所謂馬韓者馬韓之南部也 其北部則尙不滅 故後見馬韓也) 七月 築大豆山城(似今成川也 大豆者大神也 所以置國之大社者也 時百濟自寧遠至成川江東 而移都于今平壤 此皆漢水流域也. 平壤馬韓之都也)
11년(A.D.9) 4월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이것은 이른바 마한이 누르고 있을 때(강성할 때)의 마한의 남부지역이다. 그 북부지역은 즉 오히려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마한이 나타나는 것이다)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지금의 성천이다. 대두라고 하는 것은 큰 신이라는 뜻이다.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관청을 세운 곳이다. 이때 백제는 영원으로부터 성천강의 동쪽에 이르렀고, 도읍을 지금의 평양으로 옮겼다. 이것 모두 한수의 유역이다. 평양은 마한의 도읍이다.)
十二年 庚午 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兵事
12년(A.D.10) 경오 2월 맏아들 다루를 세워 태자로 삼아 병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해설≫ 백제왕 중 다루왕과 기루왕의 기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중간에 있던 왕들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왕의 재위기간이 40-50년으로 긴데도 불구하고 맏아들이 왕위를 승계했다면 억지스러움이 있다고 보여 지고,
백제서기를 참조하여 온조의 둘째아들 마루를 출생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다루왕은 91세까지 살아야 한다. 다만 이 해에는 24세가 되므로 이 기사는 적절하다고 보여 진다.
十五年 癸酉 正月 分國內爲南北二部
15년(A.D.13)년 계유 1월 나라 안을 나누어 남북의 2부로 나누었다.
十七年 乙亥 春夏旱 民饑 王巡撫之 七月 加置東西二部
17년(A.D.15)년 을해 봄과 가을에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왕이 돌며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7월 동서 2부를 더 설치했다.
十八年 丙子 十月 馬韓舊將周勒(백제본기 勤) 叛據牛谷城(似今孟山) 王躬率五千兵 討之 勒(백제본기 勤)敗自經 王殺其妻子
18년(A.D.16)년 병자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륵(근)이 우곡(지금의 맹산)성에 근거하여 반한을 일으키자 왕이 친히 병사 5천명을 거느리고 주근을 토벌하였다. 주륵이 패하여 목매어 죽자 왕이 그 처자를 죽였다.
二十年 戊寅 七月 築湯井城(今平山) 分大豆城民守之 八月 修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今延安)
20년(A.D.18) 무인 7월 탕정성(지금의 평산)을 쌓고 대두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8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지금의 연안)을 쌓았다.
二十一年 己卯 三月 雹 四月 旱 漢水東北部饑 亡入高句麗者 一千餘戶 浿帶之間空 無居人
21년(A.D.19) 을묘 3월 우박이 내렸다. 4월 가물어 한수의 동북쪽 부락의 (백성들이) 굶주렸다. 달아나 고구려로 들어간 자가 1천여 집이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해설≫ 백제 건국기사에 나오는 백제의 영토는 실제의 백제의 영토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사초(또는 사략) 및 백제왕기에 의하면 모두 주몽왕이 사망 전에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있는데 온조와 비류가 차지한 땅은 고구려가 실제 지배한 땅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영토는 추모왕 당시의 유리(북부), 비류(동남), 온조(서남)의 위치로 각자가 자기 능력으로 옛 조선의 영토를 다물 한 후의 서로가 지켜야 할 영토적 개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때 대수와 대방의 한자 ‘帶’가 같음으로 인하여 같은 지역의 영토를 말하지 않나 추측하기도 하는데 아직 여기에 대한 연구는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二十二年 庚辰 二月 王東巡至走壤(今安邊谷山之界) 北至浿河 五旬而還 三月 發使勸農事 命除不急之役 十月 築大壇祀天地
22년(A.D.20) 경진 2월 왕이 동쪽을 순행하여 주양(지금의 안변과 곡산의 경계)에 이르고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는데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 아랫사람을 보내어 농사짓기를 권하였고, 급하지 않은 일로 사람을 부리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10월 큰 단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지냈다.
二十四年 壬午 (백제본기에는 9월) 靺鞨來 攻述川城(今朱乙溫川) 十一月 靺鞨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擊退之
24년(A.D.22) 임오 (9월) 말갈이 와서 술천성(지금의 주을온천)을 공격하였다. 11월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명을 죽이거나 노략질하였다. 왕이 굳센 기병 200명을 보내어 부딪쳐 싸워 말갈을 퇴각시켰다.
二十五年 癸未 正月 右補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補 解婁扶餘人(卒本) 年過七十 而有脅力神識.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 年十五以上 修營慰禮城.
25년(A.D.23) 계미 1월 우보 을음이 죽어 북부 해루에게 우보의 벼슬을 내렸다. 해루는 부여(졸본)인으로 나이가 70이 넘었지만 위협하는 힘이 있고, 신비스러운 지식이 있었다. 2월 한수의 동북 부락사람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과 위례성 관청을 고쳤다.
≪해설≫ 여기의 기사는 A.D.19년의 기사와 같이 참고하여야 할 내용이 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답답하다. 고구려로 도망쳐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해 놓고 여기에다는 그 사람들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한수의 동북과 패대의 사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는 않을까?
二十七年 乙酉 八月 田牙山(咸從)之原 五日. 九月 鴻雁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雁者 民之象也 將有遠人 來投者乎” 十月 南沃沮(鴨綠江西 今大孤山之地 時爲北部馬韓) 仇顔(백제본기 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平壤 斧山院也) 納款 命置漢山之西.
27년(A.D.25) 을유 8월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자(그날그날의 점을 치는 관직)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장차 멀리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10월에 남옥저(압록강의 서쪽 지금의 대고산의 땅, 이때 북부 마한으로 간주된다) 구안(파)해 등 20여 가가 부양에 이르러 귀순해오니 명하여 한산의 서쪽에 살도록 하였다.
≪해설≫ 여기의 기사도 매우 중요하다. 納款을 (①온 마음을 다하여 좇음 ②서로 사귀어 정의(情誼)를 통함)로 해석하여 투항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도 있지만 구안(파)해의 신분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또 20여가를 20여 호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20여개의 씨족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남옥저(북마한)의 땅까지도 백제의 영토로 귀속되었다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한 구지왕의 기사에 이르기 까지 백제가 요동반도에 진출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 데에도 백제는 공손씨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 기사를 다르게 해석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二十九年 丁亥 十月 地震傾倒人家
29년(A.D.27) 정해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집이 기울거나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