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때 여학교를 다니며 일본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라 하시며 한 할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성주가 성을 짓고 싶어 하였는데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던 것입니다.
이에 평민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모진 고통을 참아 낸 것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힘을 준 것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옆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주고 고통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진정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저도 대학 시험 볼 때 교문을 붙잡고 기도를 드리시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수학 시험을 망쳤어도 나머지 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대학에 한 번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사실 제가 떨어지라고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축구나 야구도 홈경기가 유리한 것은 응원해 주는 편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성적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분만하는데 남편도 따라 들어가게 한다고 합니다. 아내만 산고를 겪고 자식을 낳으면 되지만 남편도 그 고통에 동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아내의 고통이 물리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옆에 있음으로 인해 어차피 받아내야 할 고통을 더 힘 있게 참아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것은 어머니이지만, 사실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낳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낳는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실 때 이미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당해야 할 고통을 함께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 발타살이라는 신학자이자 추기경님은 “골고타 언덕에서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했는데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비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뜨겁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보는 견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딸로서, 신부로서, 또 어머니로서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구원자는 그리스도라는 명제에 어긋나기 때문에 또 여러 신학자는 이런 견해를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고통은 구원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남편이 산고를 겪는 아내 옆에 있다고 해서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없는 것처럼 성모님의 수난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단 일점일획도 더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이 당신 희생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조금이라도 더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충하는 무엇으로 보기 보다는 마치 옆에 선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힘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에 힘을 주는 동반자의 역할로써 보아야합니다.
그렇더라도 ‘공동 구속자’란 말이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공동’이라 함은 무엇을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만 라틴어 어원으로는 ‘공동(co-)’이란 뜻은, 영어로 with, 즉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집전할 때 공동 집전자가 성체를 축성하는 것이 집전 사제가 축성하는 것에 단 일점일획도 더해지지 못하지만 그 사제들을 ‘공동 집전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공로가 인류 구원을 위해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지만, 성모님은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두 분은 골고타에서 산고의 고통을 겪으시고 한 분은 그 고통으로 죽으시고 한 분은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으로 우리가 탄생하였으니, 마치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사무라이가 된 사람처럼 우리도 그분들의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분들이 원하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새로 태어난 교회의 상징인 요한에게 ‘어머니’로 내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의 어머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만이 아니라 성모님의 산고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들임을 잊지 말고 그 분들의 희생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첫댓글 예수님과 고통을 함께하신 성모님을 묵상하며-------좋은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