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관음, 중생의 세계로 나아가시다
지난 번 말씀은 어떻게 보면, '삼천포로 빠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화도량발원문" 자체는 우리의 산책에서도 여러번 만난 풍경입니다. 나름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진도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십원육향'의 십원에 대해서 두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려면 끝이 없습니다만, 그쯤해서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은 육향(六向)으로 넘어갑니다.
육향은 여섯번의 향(向)이 나온다고 해서, 육향이라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공부한 바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여섯번이나 "향해간다" 혹은 "향한다" 라고 할 때,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도산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화탕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지옥을 향해서 가는 자
아귀를 향해서 가는 자
아수라를 향해서 가는 자
축생을 향해서 가는 자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은 "원본 천수경"에서 이 십원육향 전체를 말씀하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에, 이렇게 중생들이 고통받고 있는 악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분 역시 관세음보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중생을 향해서 나아가십니다. 중생들이 사는 고통세계로 들어가십니다. 내려가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셔서 걸어가십니다.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나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성불을 미루시고 중생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은 오직 지장보살님만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보살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살님들 사이에 아무런 계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계실 수도 있는 분이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으로서는 "감사합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만약 관세음보살님께서 악도를 향해서 나아가시고, 그 악도에 도착하시게 되면 그 악도는 과연 악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덧 악도는 악도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도산지옥은 칼들이 뭉턱뭉턱 잘리게 되고,
화탕지옥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은 저절로 다 말라버리고
아귀는 저절로 배가 부르게 되고
아수라는 싸움을 중단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축생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가 되고 맙니다.
거기에 관세음보살님의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가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이산연선사발원문"에서는 또한 "내 이름을 듣는 자는 삼악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자는 해탈을 얻어지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물론 "천수경"에서는 네가지 악도만을 말하였습니다만, 그 취지는 같다 하겠습니다.
3.8 영화 "화차"와 관세음의 힘
어제 "화차"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시리라 봅니다. 안 보신 분들은 한번 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봅니다. 생각할 소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화차는 불차입니다. 달리는 기차에 불이 났습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차할 수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중간에 정착하는 역 이름이 지옥역, 아귀역, 축생역, 수라역입니다. 이들 네 역을 뱅글뱅글 순환하는 순환선입니다. 중간에
선다 하더라도 어차피 악도인데, 설 수도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그런 불차를 타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무서운 것은 한 사람을 이미 죽이고 난 뒤인데도, 다시 자신의 상황이 몰리게 되었을 때는 새삼 또 살인을 예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선영을 죽인 뒤, 그 유기된 시체가 강에서 떠올라서 신원파악이 된 바로 그날, 강선영의 이름으로 살아온 여자는 또 새로운 살인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임정혜가 그 대상입니다.
처음에 강선영을 죽였을 때는 막상 혼비백산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두번째입니다. 담담하게 준비하지요. 이것이 무섭습니다. 익숙해졌다, 한번 해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성, 이 말을 우리 불교에서는 업(業)이라 말합니다. 업, 그것은 그렇게 중독성이 있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차경선은 처음부터 살인자는 아니었습니다. 성당에 나가면서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사채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채를 못 갚게 되자,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 대신 사채업자에게 쫒기고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때는 이미 차경선도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채업자들 때문에 그 행복한 가정이 깨어지게 되고, 사채업자에게 끌려가서 몸을 망치게 되고,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들게 됩니다.
한 여인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그 배경에는 "사채"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 --- 그리고 원작이 된 소설 "화차" --- 가 말하는 것은, 업에는 사회적인 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업만이 업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업이 있고, 한 개인이 그 사회적 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차경선과 같은 환경에 놓여있는 모든 사람이 살인을 하고, 그 피해자의 이름으로 피해자가 되어서 세상을 속이고 살아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마음을 아파하지만 동시에 개인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개인의 선택이 물어질 때, 그 개인이 극한상황에서 다시 일어나올 수 있게 하는 데 어떤 힘이 필요하겠지요. 정부의 힘, 사회단체의 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경선이 성당의 성가대 활동을 했기에, 종교의 힘 역시 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신앙의 힘이라는 것은 정녕 그러한 순간에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차경선이 "천수경"을 알았다고 한다면,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을 생각할 때, 그녀는 이미 지옥에, 이미 아귀에, 이미 축생에, 이미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네가지 악도는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살아있더라도 우리가 마음 속에서 악을 생각하고, 악을 행하게 된다면 이미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수경"에서 관세음보살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바로 그러한 때에 있을 때, 만약 여러분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어서)
내가 지옥을 향해서 가게 된다면 지옥은 스스로 다 고갈되어서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부터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까지의 육향 부분에서입니다. 차경선이 믿었던 가톨릭 교회의 하느님도, 우리 불교의 관세음보살님도 스스로 요청하지 않는데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아, 자비라고 한다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완벽한 타력은 없습니다. 일본의 신란스님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하지 않더라도 극락에는 갈 수 있지만,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극락에 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마치 비유하면, 지금도 허공에는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전파가 흐르지만 안테나라든가 TV라든가, 라디오라든가, 이쪽에서 그 전파를 받아들이는 장치가 없다면 전파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는, 역시 "개인"의 자각이 중요하고,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개인의 자각을 통한 개인의 구원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타력이라도 개인의 자각과 노력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완벽한 타력"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