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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명운 묘갈명(尹明運 墓碣銘) - 權尙夏.
[생졸년] 1642년(명종 2)~1718년(숙종 44) / 壽 76歲.
광흥수(廣興守) 윤공(尹公) 명운(明運) 묘갈명 병서
나와 동문수학한 벗 중에 윤공 여회(尹公汝會)가 있었다. 그가 평소에 거처하는 것을 보면 겸손하고 유순하며 무능한 듯하여 항상 남보다 한 걸음 뒤지고 남보다 한 머리를 낮추는 듯한 뜻과 기상이 있었으나 환란을 당하게 되면 그 의지는 철석(鐵石)과 같이 강하였다.
기사년 사화[己巳年士禍: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의 다른 이름입니다.] 가 일어나자, 외구(外舅)인 이공 경창(李公慶昌)이 공에게 이르기를 “목전의 화기(禍機)가 막 타오르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밟을 수 있겠는가.” 하자, 공이 웃으며 “의리상 면할 수 없으면 화는 족히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이공은 공의 뛰어난 지조에 감탄하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은 마땅히 옛날 분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요, 지금처럼 쇠퇴한 세상의 인물이 아니니, 이 어찌 우리 사문(師門)의 정직하신 규모를 체득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명운(明運)이요, 여회(汝會)는 자(字)이다.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신달(莘達)을 상조로 삼으며, 시중(侍中)인 윤관(尹瓘)은 덕망과 공업(功業)으로 큰 이름을 이루었다.
그후 9대 동안 대대로 대관(大官)이 있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파평군 곤(坡平君坤)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총재(冢宰)에 이르렀다. 고조의 휘는 인함(仁涵)인데, 호는 죽재(竹齋)이며 벼슬은 참판이었다. 증조의 휘는 홍립(弘立)인데, 전적(典籍)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조고의 휘는 유건(惟健)인데, 진사로 참판에 추증되었는바, 광해군의 혼탁한 조정을 만나자, 학문에 힘쓰고 벼슬하지 않았다.
선고의 휘는 비경(飛卿)인데, 벼슬이 참판이다. 이보다 먼저 윤선도(尹善道)가 사문(斯文)에 화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공은 이때 사간원에 간관으로 있었다. 공은 “윤선도가 남을 반역죄로 모함하였으니, 마땅히 반좌죄(反坐罪)를 적용해야 한다.” 하여 강력히 간쟁하니, 세상 사람들이 공의 직언(直言)을 칭찬하였다.
선비는 이씨(李氏)인데, 좌랑 이구연(李九淵)의 따님이며, 목은(牧隱)의 후손이다. 부인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경사(經史)를 대략 통달하였고, 고금의 득실을 변론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공은 숭정(崇禎) 임오년(壬午年, 1642, 인조 20)에 출생하여 무술년(戊戌年, 1718, 숙종 44) 모월 모일에 별세하니, 향년은 77세였다.
공은 백씨인 진보공(眞寶公) 명우(明遇)와 함께 우재(尤齋) 송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동문의 친구들이 모두 추존하고 허여하였다. 숙종대왕이 처음 즉위하자, 송 선생은 예론(禮論) 때문에 윤휴(尹鑴)의 도당에게 모함을 받아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문인인 송상민(宋尙敏)은《논례(論禮)》라는 책자를 올렸다가 여러 간흉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고 마침내 형장(刑杖)을 맞아 죽으니, 금오문(金吾門)에 3일 동안 시신을 버려두었다. 공은 실로 이 책자를 올리는 일에 참여하였는데, 송공(宋公)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는 윤공 이건(尹公以健)과 함께 시신을 산골짜기에 숨겨 놓았다가 염습하여 묻어 주니,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여겼다.
이때 윤증(尹拯)은 윤휴에게 유혹되어 사문(師門)을 원수처럼 보고 있었는데 그 문도들이 차츰 송 선생을 배반하게 되자, 마침내 기회를 틈타 일어나 선생을 모함하여 기탄이 없이 하였다. 공은 윤증과 가까운 집안이었으며 또 대대로 우호가 있었는데, 스승을 저버리고 나쁜 짓하는 것을 미워하여 옛 우호를 끊어 버렸으며, 한공 성보(韓公聖輔)와 함께 변론하는 상소문을 올려 통렬히 배척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세상일이 크게 변하여 성모(聖母)가 사제(私第)로 옮겨 갔으며, 율곡(栗谷)ㆍ우계(牛溪) 양현(兩賢)이 문묘에서 축출을 당하였다. 흉악한 무리들이 송 선생을 모함하여 죄망을 씌우기를 날로 더욱 급히 하자, 공은 탄식하기를 “지금이 어찌 벼슬할 때이겠는가.” 하고는 속히 글을 올리고 물러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곧바로 동문(同門)들과 함께 상소하여 스승의 모함을 변호하였다.
상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여 송 선생이 끝내 사약을 받자, 공은 마침내 여러 문생들과 함께 대궐에 엎드려 울부짖었으니, 이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었다. 공은 마침내 흰 띠에 가마(加麻)하여 선생의 복(服)을 입었다.
이조(吏曹)에서는 주상의 명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써 올렸는데, 상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이전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록 하나하나 추론(追論)할 수는 없으나, 윤 아무개로 말하면 벼슬하지 않은 그 다음날에 곧바로 이기주(李箕疇)의 상소에 참여하였으니, 벼슬하지 않으려는 드러난 뜻을 알 수 있다.
조정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죄를 크게 단죄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잡아다 문초하게 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의 외숙인 윤가(尹哥)는 장사꾼 출신이었는데, 공과 함께 한 관서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공이 벼슬하지 않은 것은 또한 그와 동료로 있는 것을 더럽게 여겨서였는데, 저들은 이 때문에 노여움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마침내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니, 친구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이 논죄되어 귀양 가게 되자, 적신(賊臣) 민암(閔黯)이 당시 판의금부사로 있었는데, 공을 위협하기를 “성상의 노여움이 심하시니, 경기 지방에 유배할 수 없다.” 하였다. 이공 대 숙고(李公垈叔固)가 이미 먼저 벼슬을 버리고 해미(海美)의 시골집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공에게 편지를 보내오기를 “나에게 와서 머무르는 것이 붕우간의 의리이다.” 하였는데, 공이 마침내 해미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이공에게 의탁하여 숙식을 하였으며, 이공과 서로 대하여 세상일을 개탄하고 오직 술잔에 뜻을 붙여 시름을 달래었다.
사화(士禍)가 있은 뒤로 선비들과 친구들이 많이 남쪽 지방으로 낙향하였는데, 호해(湖海, 호수와 바다)의 사이는 다만 남쪽과 북쪽으로 한 물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공은 서너 명의 뜻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흥이 나 술을 찾으며 서로 부르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단구(丹丘)에 올라 혹은 며칠 동안 한가로이 거닐며 이대로 종신(終身)할 듯이 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4월에 상은 지난날의 행위를 후회하고는 축출하였던 중전(中殿, 인현왕후)을 복위하고, 송 선생의 관작을 다시 회복하였다. 이달에 경연관의 말에 따라 맨 먼저 공을 서용하여 선릉 참봉(宣陵參奉)으로 임명하였다.
공은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 특별 추천에 올라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었는데, 모두 세 번 그만두고 네 번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봉사와 직장으로 있다가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에 비로소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이후로 의금부 도사와 신녕 현감(新寧縣監),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와 강화 경력(江華經歷),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와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광흥창 수(廣興倉守)와 사재 첨정(司宰僉正)을 역임하였다. 신녕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새로 큰 흉년과 염병을 겪어 고을이 마치 병란(兵亂)을 치룬 것처럼 쓸쓸하였다.
공이 부임하여 “마치 사람이 큰 병을 앓고 난 뒤와 같으니, 오직 편안히 길러야 소생할 수 있다.” 하고, 고을을 다스림에 간략하고 안정하여 소요함이 없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공은 또 “백성은 진실로 적자(赤子)와 같으며, 아전들도 또한 사람이다. 오직 위엄과 현명함으로 아전들을 대하여 백성을 해치지 않게 할 뿐이니, 아전을 학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공은 또 “세상에 정당한 부세를 감면하여 명예를 요구하는 것도 진실로 불가하거니와 백성의 원성을 심히 사고 있는 것을 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신녕현(新寧縣)은 큰 흉년을 만난 뒤로 환자곡(還上穀)을 갚지 못한 것이 꽤 많았는데, 공은 차마 가까운 이웃과 친족들에게 추징할 수가 없어 자기의 봉급을 내어서 수백 석을 대신 보충하고, 환자의 문서을 갖다가 불태웠다. 세시(歲時)에는 쌀과 고기를 장만하여 경내의 노인들에게 하사하였으며, 봄의 화창한 날씨에는 잔치를 베풀어 예우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혼인할 수 없는 자들을 방문하고 혼수를 도와주어 때를 놓치지 않고 혼인하게 하였으며, 배우는 선비들과 무사들을 각기 학업에 열중하게 하고, 월말(月末)이면 시험을 보여 등급을 매기고 우수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 권면하게 하였다.
고을의 동쪽 몇 구역이 가물고 황폐하여 경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은 여기에 방죽을 쌓아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먹게 하였으며, 고을의 경비를 옛 준례에는 관리들이 무역하는 값에 덧붙여 먹었으므로,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공은 “관청으로서 아전들에게 강제로 징수한다면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착취하지 않고는 장차 어디에서 만들어 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다하여 주선하고 헤아려 청(廳)을 만들어 비용을 쓰게 하고, 강제로 무역하는 규정을 폐지하였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게 되자, 백성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길을 다투어 멀리 전송하며 말하기를 “훌륭한 태수가 떠나간다.” 하고는 모두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고는 마침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공의 생신날 아침에 안주와 술을 올렸다. 마침 조정에서 이를 금지하자, 그들은 다시 큰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을 추모하였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였으며, 규모가 간략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고 신중하였다. 사람을 대해서는 말이 적었고, 일을 대해서는 계교(計較)함이 적었으며, 거짓으로 자랑하는 부랑(浮浪)한 풍속과 성내고 사나운 모양이 전혀 없었다.
조행은 그렇게 각고(刻苦: 고생을 참아내다)하지 않았으나 편안히 있을 때에도 태만한 용모를 베풀지 않았으며, 농담이 막역(莫逆)한 친구 간에도 미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여러 번 끼니거리가 떨어졌으나 구걸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벼슬길이 심히 고단하였으나 마음에 원망하는 뜻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거나 관청에 있을 때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혹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오래 있으면 성심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공의 이웃 고을에 벼슬살이로 나가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경계하기를 “너는 매사를 윤 아무개에게 찾아가 상의하면 자연히 과실이 적을 것이다.” 하였으니, 공이 평소 남에게 심복을 받았음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공은 계씨(季氏)와 종손인 조카와 평생토록 함께 살았는데,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배고픔, 근심과 기쁨에 조금도 피차의 간격이 없이 하여 서로 흡족해하는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도 더욱 돈독하니, 사람들은 아무도 흠잡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화순한 덕이 온 집안에 감돌아 부인들까지도 동서간에 서로 사랑하고 사모하기를 동기간과 같이 하였으며, 노비들까지도 서로 화하고 즐거워하기를 친척과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온 집안에 남을 욕하거나 헐뜯는 기풍과 다투는 말이 일체 없었다. 이는 공이 자신이 직접 행하고 이것을 미루어 집에 행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늙었는데도 벼슬을 그만두지 못하고 아직도 낮은 관료로 얽매여 있는 것은 다만 집이 가난하여 몇 말의 쌀을 얻기 위함이다.
백수(白首: 흰머리)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는가.” 하였는데, 아들 봉구(鳳九)가 부모 봉양을 위하여 한 고을을 얻게 되자, 공은 얼굴빛에 희색이 가득하며 말씀하기를 “나는 이제 벼슬을 그만둘 수 있다.” 하고, 사직하고 물러와 며칠 동안 한가히 계시다가 별세하였으니, 공의 평소에 가진 뜻을 알 수 있다.
초취(初娶)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며 지평 이시함(李時馠)의 따님인데, 1남 봉휘(鳳輝)를 낳았으니, 진사로 직장(直長)이다. 계취(繼娶)는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左尹) 최원(崔遠)의 증손이며 학생 최이헌(崔爾巘)의 따님으로, 2남을 낳았는데 봉위(鳳威)와 봉기(鳳蘷)이다.
삼취(三娶)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공정대왕(恭靖大王)의 후손이며, 그의 부친은 바로 이공 경창(李公慶昌)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현감 봉구(鳳九)와 진사 봉오(鳳五)이며, 사위는 신경(申暻)이다. 봉휘는 서자가 둘인데, 심해(心海)와 심호(心浩)이며, 봉위는 3남을 두었는데, 진사 심웅(心雄)과 심준(心準)이며, 하나는 어리다.
봉기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심영(心泳)이며 두 딸은 어리다. 봉구는 1남을 두었고, 봉오는 1남 2녀를 두었으며, 신경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심웅의 2남도 또한 어리다. 봉기는 공을 잃은 뒤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공보다 8개월 뒤에 별세하였다.
공의 장지(葬地)는 교하(交河)의 동쪽 지석촌(支石村) 정좌(丁坐)의 산에 있으며, 두 숙인(淑人)은 파주의 천현(泉峴) 명학산(鳴鶴山) 동쪽 유좌(酉坐)의 산에 안장하였다. 아아, 의리(義利)와 화복(禍福)의 즈음은 비록 세상에 지조를 아끼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 손 앞에
이르게 되면 두려워하고 벌벌 떨어 어찌할 줄을 몰라 거의 스스로 서지 못하였다.
아, 훌륭한 우리 여회(汝會)는 죽고 사는 것이 순식간에 달려 있었는데도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꿋꿋한 풀이라고 하겠다. 공은 세상이 좋아진 뒤에도 옛날과 똑같이 겸손하여 낮은 관료로 일생을 마쳤으며, 담박하게 사는 것을 편안히 여겼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그 중간에 벼슬길에 나아가고 벼슬을 그만둔 것은 실로 노선생(老先生)과 굴신(屈伸)을 함께하였으니, 이 또한 평생의 행적을 결정할 수 있다. 후세에 당고전(黨錮傳)을 짓는 자들은 반드시 공을 그 안에 넣을 것이다. 내면 수행(修行)의 순수하고 독실함과 벼슬할 때의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말하면 이는 대대로 내려오는 공의 가풍(家風)이 그러한 것이다.
아, 공의 여러 자제들은 선비의 명망이 대단하며, 현감군은 학식이 밝고 투철하여 동료들이 원대하게 기대하고 있으니, 공이 미처 받지 못한 보답을 하늘이 장차 이에 크게 열어 주시려나 보다. 마땅히 눈을 씻고 기다려야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아, 훌륭하다 공은 / 猗夫夫
곤륜산(崑崙山)의 옥과 같아 / 如崑玉
겁화가 불타도 / 刦火燒
색을 변치 않았네 / 不渝色
황파에 이르러 / 洎黃巴
세상의 화가 혹독하니 / 世禍酷
여러 사람들은 두려워 몸을 떨고 위축되었으나 / 衆瑟縮
공은 분발하여 일어나 / 公奮作
동지들을 고무하여 / 鼓同志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네 / 攖頷尺
일이 망극하게 되자 / 事罔極
대궐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 守闕哭
위리안치를 당하고 / 鎖圓扉
바다 모퉁이로 귀양을 갔네 / 竄酒曲
사문의 변괴는 / 斯文變
같은 종족(宗族)에서 나왔는데 / 宗門出
공은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여 / 不少饒
크게 배척하였네 / 如距敓
선비들은 공의 의리에 탄복하여 / 士服義
모두 혀를 내둘렀네 / 咸吐舌
이것이 그 큰 행적이니 / 此其大
남은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네 / 餘可識
옛 친구가 명문을 쓰니 / 故人銘
붓이 부끄럽지 않네 / 筆不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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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반좌죄(反坐罪) :
무고(誣告), 또는 위증(僞證)으로써 남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피해자가 받은 것과 동일한 벌을 가하는 것.
[주02] 성모(聖母)가 …… 당하였다 :
성모는 중전(中殿)을 높여 부르는 칭호이며, 사제(私第)는 사가(私家)와 같은 말. 숙종 15년(1689)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장 희빈(張禧嬪)과 그의 도당인 남인(南人)이 권력을 잡고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축출되었으며, 이이와 성혼이 문묘(文
廟)에서 출향(黜享)된 일을 가리킨다.
[주03] 당고전(黨錮傳) :
사화(士禍)를 당한 유명한 선비들을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후한(後漢) 시대 이응(李膺)ㆍ범방(范滂) 등의 명사가 당고의 화에 걸
린 내용이《후한서(後漢書)》당고열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끝>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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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我同門友, 有尹汝會者, 蓋觀其平居粥粥若無能, 常有退人一步、低人一頭底意象, 而及其遇患亂, 其剛鐵石。 當己巳禍作, 外舅李公慶昌謂公曰: “目前之禍機方煽, 何可自蹈?” 公笑曰: “義不可免, 則禍不足恤。” 李公歎其有守, 不復言。 若是者, 當於古人中求, 非衰世人, 豈非有得於我師門正直規模者耶?
公諱明運, 汝會其字也。 坡平之尹, 以高麗太師莘達爲上祖, 而有侍中瓘, 以德業致大名。 後九世, 世有大官, 入我朝, 坡平君坤, 官崇政、冢宰。 高祖諱仁涵, 號竹齋, 官參判: 曾祖諱弘立, 典籍、贈都承旨: 祖諱惟健, 進士、贈參判, 値光海朝, 篤學不仕。 考諱飛卿, 官參判。 先是, 尹善道搆禍斯文, 公居言地, 以 “誣人以逆, 當施反坐律”, 力爭之, 世以直言稱。 妣李氏, 佐郞九淵女, 牧隱之後。 聰敏强記, 略通經史, 辨論古今, 得失鮮不中理。
公生於崇禎壬午, 卒於戊戌月日, 得年七十七。 公與伯氏眞寶公受業於尤齋宋先生, 儕友咸推與焉。 肅宗大王初卽位, 先生以禮論爲鑴黨所搆誣, 自北南遷, 禍將不測。 門人宋尙敏進《論禮》冊子, 大忤群兇, 竟死桁楊, 暴屍金吾門三日。 公實與聞冊子事, 不忍其無人收屍, 與尹公以健匿屍於山谷間, 以殮瘞之, 人皆義之。
是時先生門人尹拯惑志於鑴, 讎視師門, 及其徒稍貳於先生, 則乃敢乘機闖發, 誣先生無忌憚。 公與拯爲近宗人, 且有世好, 惡其背師無狀, 絶其舊好, 同韓公聖輔上辨疏痛斥之。 己巳, 時事大變, 聖母遷私第, 兩賢黜聖廡, 兇徒之搆罪先生日益急。 公歎曰: “此豈仕宦時耶?” 亟申狀不仕, 卽與同門人疏暴師誣。 上怒益深, 先生竟被後命, 遂同諸生伏闕號泣, 蓋用己卯故事也。 乃以素帶加麻, 服先生。
吏曹承上命, 書啓不仕諸人, 上特下備忘曰: “曾前不仕之類, 雖不可一一追論, 而至於某, 則不仕翌日旋參於李箕疇之疏, 其不仕之顯顯有意, 可知。 輕蔑朝廷之罪, 不可不從重科斷, 以爲懲一勵百之地。” 拿問。 是時, 希載之母舅尹姓者, 起於賈豎, 與公爲官一署。 公之不仕, 蓋亦鄙其作僚。 彼輩以此嗛怒, 至是遽有此事, 知舊莫不危之。
及勘謫, 賊黯時判金吾嚇之曰: “上怒方深, 不可以畿邑配。” 公素孤貧, 無可依投地, 李公垈叔固先已棄官歸海美鄕廬, 移書公曰: “於我乎館, 朋友義也。” 公遂以海謫焉, 托李公眠食, 與李公相對, 慨傷時事, 惟寄意杯酌。
自世禍之後, 士友多落南, 湖、海之間, 便一水南北矣。 與數四會意者, 興至覓酒相呼喚, 入伽倻上丹丘, 或倘佯數日, 悠然若將終身焉。
甲戌四月, 上悔前之爲, 克返坤位, 追復宋先生官爵。 是月, 用筵臣言, 首敍公爲宣陵參奉。 公登庚申別薦, 甲子, 筮仕, 在參下, 凡三罷官而四除職, 由奉事、直長, 己卯, 始陞內資主簿。 自此所歷, 禁府都事、新寧縣監、掌隷院司議、江華經歷、掌院別提、尙衣僉正、廣興守、司宰僉正。
其爲新寧也, 新經大饑疫, 蕭然如兵燹後。 公至曰: “如人大病纔去, 惟安養可蘇。” 爲政主簡靜無擾。 又曰: “民固赤子, 而吏亦人也。 惟威明以莅之, 不至害民而已, 虐之則不可。” 又曰: “世之蠲正賦以干譽者, 固不可, 若爲民怨之甚者, 亦不可無變。” 縣自大饑後, 糶穀之逋欠雖多, 不忍徵及隣族, 捐俸累百石補欠, 取案火之。
歲時具米肉, 賜境之老人, 春和設宴以禮之。 訪家貧無以嫁娶者, 助資俾不失時。 學子與武士各以所業程督, 月終課其最, 賞之以爲勸。 縣東數區, 旱鹵廢耕, 爲築池, 使民食其利。 邑需舊例靠官吏貿直, 不及其半, 公以爲: “爲官而脅徵於吏, 吏不取之民, 將何出?” 乃悉心規度, 設廳需用, 罷勒貿之規。 及歸民無老少爭道遠將曰: “賢太守去矣。” 莫不咨嗟涕泣。 遂立生祠, 以生朝吏民上下咸集祠庭, 用薦牛酒, 適有朝禁, 更勒大石以思之。
公稟性和粹, 宅心安靜, 規模簡素勤愼, 故對人寡言語, 臨事少計較, 絶無虛誇浮浪之習, 忿勵殘暴之容。 操行不至刻苦, 而惰慢不設於宴安之時, 諧謔不及於到爾之友。 家事屢空, 而口不出求乞之言; 仕路甚跲, 而心不萌怨尤之意。 其處家莅官人, 初或不以爲奇, 而久則未嘗不誠心悅服。 嘗有人之官於公之隣治, 其父戒之曰: “汝每事就議於尹某, 則自可寡過。” 其平日見能於人, 此亦可見其一段矣。
與季氏及宗侄鳳儀終世同居, 寒溫飢飽、憂慽欣樂, 少無物我之分。 有疾病必親撫, 視得小物, 必相與之。 隆冾之樂, 至老彌篤, 人不得間焉。 是以和愉之德, 浹於一室, 以至妯娌, 相愛慕如同産, 僮僕相和樂如親戚, 無嚚訟之風、爭柝之言, 蓋其推之身而行之家者如此。
公嘗以爲: “吾年至而不能止, 尙此潦倒於僚底者, 只爲貧資斗米耳。 白首從仕, 豈素志哉?” 及鳳九爲養得一縣, 則公喜發於色曰: “吾可休矣。” 居數日而卒, 其平日雅意, 可知矣。
初娶全州李氏, 廣平大君之後, 持平時馠之女。 擧一男鳳輝, 進士, 直長。 繼娶和順崔氏, 左尹遠之曾孫, 學生爾巘之女。 擧
二男: 鳳威, 鳳夔。 三娶完山李氏, 恭靖大王之後, 其考卽李公慶昌也。 擧二男一女: 鳳九, 縣監: 鳳五, 進士。 申暻, 其婿也。 鳳輝側出二男: 心海, 心浩。 鳳威三男: 心雄, 進士: 心準; 一幼。 鳳夔一男心泳, 二女幼。 鳳九一男, 鳳五一男二女, 申暻一女, 皆幼。 心雄二男, 亦幼。 鳳夔不勝喪, 後公八月而亡。 公之葬在交河治東支石村坐丁之原。 二淑人葬於坡州泉峴鳴鶴山東負酉之原。
嗚呼! 利義禍福之際, 雖世之自好者, 及到手頭, 恇撓失措, 殆不能自立, 韙哉我汝會! 死生在呼吸, 略不動心, 眞所謂疾風之勁草也。 時淸之後, 依舊退遜, 終於下僚, 安其淡泊, 斯又難矣。 況其中間起廢, 實與老先生同其伸屈, 則亦足以定其平生。 後之傳黨錮者, 必有以公序之者矣。
若內行之純篤, 居官之廉謹, 自來家法然也。 噫! 源深者流永, 理固然矣。 公之諸胤, 士望蔚然, 而縣監君學識明透, 儕流之期待遠大。 公之未食之報, 天將大發於斯耶! 當拭目而俟之。 銘曰:
猗夫夫, 如崑玉。 劫火燒, 不渝色。 洎黃巴, 世禍酷。 衆瑟縮, 公奮作。 鼓同志, 嬰頷尺。 事罔極, 守闕哭。 鎖圓扉, 竄海曲。 斯文變, 宗門出。 不少饒, 如距奪。 士服義, 咸吐舌。 此其大, 餘可識。 故人銘, 筆不怍。<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