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급성심근경색이 발병한 2001년 3월 이후 14주마다 이 병원을 찾는 심장병환자이다. 이런 삶을 15년째 이어오고 있는데, 오늘은 의사와의 만남, 간호사와의 만남 외에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5분 정도 쉬었다가 혈압을 측정한다. 추가로 혈당 검사도 받는다. 그 결과가 적힌 쪽지를 간호사에게 제출했다.
간호사는 예약 시간에 맞춰 진료받을 환자를 호명한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진행 상황에 따라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서 대기한다. 간호사는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진료를 마친 환자에게 예약 날짜를 지정해주고, 도착한 환자가 쪽지를 제출하면 이름을 묻고 그것을 컴퓨터에 입력한다.
이처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얼굴에는 평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더러 ‘들어가라.’고 한다. 난청이 심한 나는 조용하게 부르는 의사의 호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부르면 더욱 그런다.
의사는 컴퓨터를 보면서 건강이 어떠냐고 묻는다. 혈당이 문제라고 걱정한다. 의사와 상담은 1분 정도였다. 이상의 만남은 통상적인 만남이다.
간호사는 나를 다른 방으로 인도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나고 가세요.’ 하며 간호사 세 명이 근무하는 방으로 인도했다. 이들은 ‘연구 간호사’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여기서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담당 간호사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어느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개발 중이다. 우리 몸에는 좋은 콜레스테롤이 있고, 나쁜 콜레스테롤도 있는데, 이 중에서 나쁜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은 많이 개발되었지만, 좋은 콜레스테롤을 생성하도록 돕는 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런 약을 개발하려고 한다.
“선생님께서 현재 복용하는 약은 모두 누군가가 임상시험에 참여해서 검증받은 약입니다.”
이런 설명을 덧붙이며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임상시험’이란 의약품, 의료기기 등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다.
“좋습니다. 참여하지요”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그러자 간호사는 현재 복용하는 약을 잘 먹는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약 먹는 일에 소홀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간호사는 임상시험과 관련하여 친절하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는 곧바로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이 어쩐지 단호했다. 임상시험의 엄중함을 깨닫게 하려는 듯했다.
간호사는 혈압을 측정했다. 한 번 측정하고 1분 쉬었다가 다시 측정하는 방식으로 세 차례 실시했다. 그러는 동안 움직이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상당히 엄격하다. 그런 다음 검사용 피를 뽑았다.
1주일이 지났을 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나쁜 콜레스테롤의 양이 너무 많다고 하면서 '임상시험에 임하겠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임상시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숭고한 일을 놓고 제안하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달력에 표시해놓고 약을 먹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약 먹는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례를 털어놓았다.
다소 안심이 되었는지 간호사는 서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며 서약서를 작성한다.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하는데 마음에서 기도가 나온다. ‘이 약속,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하는 기도였다. 엄숙한 마음이 되어 기도했다. 서약서는 모두 10장 정도 작성했다.
내가 임상시험에 참여한 것은 병원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은 온통 나를 위한 일이었다.
우선 약 먹는 일에 소홀했던 나쁜 버릇을 고치게 했다. 진료 예약 날짜가 다가오면 먹지 않고 남은 약이 있었다. 한두 봉이 아니라 며칠 분이나 되었다. 언젠가는 아침 약만 먹고 저녁 약은 먹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약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무랐다.
약 먹는 일에 소홀한 것은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진료받을 때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처방하는 약의 단위를 높였다. 그것은 약을 먹지 아니하므로 잘못된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한 결과였다.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 나쁜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또 하나 나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의 삶은 무기력해지는 상황이었다. 약을 먹어도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런데 ‘임상시험에 참여하라’는 뜻밖의 제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최소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기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을 4년 이상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려는 신의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일과 중 최우선 순위는 약 먹는 일이다. 임상시험에 임하는 수많은 대상자 중 나에게 투입되는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 그래도 임상시험의 성공을 기대하며 약 먹는 일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새벽기도에 나갈 때도 약을 먼저 먹는다. 여기에 더하여 땀 흘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주 2회 이상 복지관에 나가 탁구장을 찾는다. 댄스도 배운다. 이렇게 하면서 규칙적으로 땀을 흘린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매사에 여유를 갖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실천하되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도록 절제하며 실천하고 있다. 그 결과 좋은 습관으로 굳어지고 있다.
임상시험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 그 시작은 약 먹는 일이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먹는다. 이게 바로 내가 경험한 임상시험에서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