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마침표를 내다보는 평온한 고백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가는 노년의 기록
시력 40년을 맞이한 김광규의 열한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맑은 눈으로 현실을 관찰하여 성찰하고 명료하게 다듬어내 시에 투영해왔다. 국내외와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를 공감시키는 진리가 담긴 시들로 그간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상과 한독협회의 이미륵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2011년 여름 종심(從心, 일흔 살)을 맞이한 시인이 2015년 가을까지 4년 동안 바라본 세상과 기억들, 앞서 보낸 동료들에 대한 애도와 담담한 내일 맞이가 담긴 66편의 작품들을 총 4부로 나누어 묶은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일상에서 진리를 추출해내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가 우러나는 김광규 특유의 관조가 돋보인다.
김광규의 시는 일상성 속에 도사린 삶의 허망함과 인간의 왜소함을 변형 없이 그대로 보여주면서, 평범한 것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고 비범한 진술을 통해 일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교묘한 전위의 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은 여유 있는 시선으로 대상을 섬세하게 관찰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융합된 유기적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조차 두려움 없이 맞이하고 있다._이숭원(문학평론가)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방법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에 충실하다. 하루 또 하루, 각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장면들은 시인의 눈에 들어 마음에 오래 머물다 긴 사색의 끝에 시 한 줄이 된다. 오늘이 마음에 머무는 동안 시공간은 유연하게 교차한다. 시인은 오늘 관찰한 무언가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먼 훗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시인의 눈에 150년 전 그려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카카오톡에 열중하”는 오늘날의 소녀 같다. 그러나 동시에 “늙지 않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앞으로 태어날 딸의 딸의……/변함없는 모습”(「가을 소녀」)이 된다. 그런가 하면 난초를 손질하다 “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불러 난초의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을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보여주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그랬듯 자신의 손자에게 난초를 보여주려 하지만, 손자의 손자는 난초꽃을 “시큰둥하게/힐끗 쳐다보고”는 게임만 계속한다. 종심이란 나이는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는 놀라움조차 뒤로 보낼 때가 아닌가.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선 “나이 들 때까지/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난초꽃 향기」). “그대로 두고 보기로 했다/천천히 눈이 녹은 그 자리에서/연녹색 새싹들이 돋아날 때까지/그냥 기다리기로 했다”(「설날 내린 눈」). 평론가 이숭원은 해설에서 이처럼 “시간의 속살을 음미하듯이” “그냥 지켜보는 것”이, 시인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소멸을 둘러싼 여러 겹의 공감들
오랫동안 앓아온 병명을 대고
그 약을 살 때까지 나는 그저
길을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문밖에서 그냥 행인으로 머물까
안으로 들어가 병자가 될까
ㅡ「유리약국」 부분
어떻게 사는가만큼 어떻게 죽는가도 중요하다. 육체는 점점 쇠약해진다. 산책길에서 넘어져 허리를 다쳤을 때(「어제 넘어진 자리」), 비행기에서 잠시 정신을 잃을 때(「다가오는 시간」), 스트레처카에 실려 들어갈 때(「여기까지」)…… 노년은 이렇게 “성큼 다가온 검은 시간”(「다가오는 시간」)을 시시때때로 맞닥뜨리는 시기다. 이번 시집에는 노년을 체감한 순간에 대한 소회와, 사라지거나 잃어버리고 잊혀가는 누군가 무언가에 대한 담담한 애도가 가득하다. 김광규 시의 전반을 흐르는 공감은 먼저 저세상으로 간 친구(김치수 평론가, 「그대 가 있는 곳」)와 “땅에서 태어나 땅속으로 돌아다니는/우리의 외로운 조상”(「쪽방 할머니」)부터,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결국 내 목에/두르기 전으로 되돌아”(「까만 목도리」)간 잃어버린 목도리나 “시간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정물처럼 슬퍼 보이는” 유선 전화기(「딱딱한 정물」)에까지 가닿는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죽으면/어차피 땅 위에 쓰러질 것을/정신의 온갖 질곡 벗어나/살과 뼈와 터럭과 욕망 모두/떨쳐버리고/한없이 편안하게/땅 위에 누워 있는 부드러운 모습”(「누워 있는 부처」)일 뿐, 슬프거나 어둡지 않다.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마음이 “부끄럽지 않은가”라고(‘시인의 말’) 겸양 섞어 적었지만, 언젠가 다가올 삶의 마침표에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삶에 대한 경의를 토로하는 시인의 시야말로 ‘중얼거림’(‘시인의 글’)을 넘어선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들까지 모여서
모처럼 생일잔치 벌여준 날
70년 전에 내가 태어난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머니 젖꼭지에 댓진을 발라
네 살짜리 막내아들
젖을 뗀 날
밤새도록 계속된 폭격이 겨우 멈춘 뒤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오래된 기와집 폭삭
주저앉은 꼴 믿을 수 없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물주머니가 아래로 처져
깜짝 놀라게 늙은 모습
거울 속에서 발견한 날
36년간 다닌 직장에서 등 떠밀려
퇴직하고
산길 내려오다가 넘어져
깁스를 한 채 목발 짚고
절뚝거리던 날
20년 동안 피우던 담배 끊고
다시 30년이 지나 마침내 술까지
끊게 된 날
심장혈관 전문의 진단을 받고
달라트렌 정과 아스트릭스 캅셀 매일 먹기
시작한 날
오늘이 그날이다
평생 써온 일기장에 먹칠을 하고
온 가족을 오래도록 괴롭히다가
마지막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세상 떠나는 날
내일이 내게서 사라져버리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ㅡ「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시를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오늘날의 시는 멋진 아리아[?唱]가 될 수 없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터티브[敍唱]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터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唱)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주어진 위치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의 현실적 입지가 약화되는 현상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자 매체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이른바 시적 상상력의 자장이 축소된 반면, 확대된 현실의 온갖 폭력이 언어를 유린하고 있다. 요즘도 수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시 전문지도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지만, 시의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일부 문인들만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를 운위하기에 이르렀다. 시는 이제 은밀한 속삭임도 못 되고, 일방적인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얼거리다’는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을 원하지도 않는, 글자 그대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종언을 개의치 않는 중얼거림이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나도 어느새 40년 동안 중얼거리고 있는데, 의외로 알아듣는 사람이 국내외에 적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과 소통이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혹시 잘못 중얼거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