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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차례대로 <조선고적도보>, <조선의 풍수>, <중원경과 중앙탑>에 수록되거나 소개된 사진자료이다. 이 가운데 조선고적도보의 것은 1912년 11월 20일에 세키노 타다시 일행이 촬영한 것이고, 가운데의 것은 구체적인 촬영자와 촬영시기를 알 수 없으나 1917년의 해체수리 이전에 찍은 것은 확실하며, 맨 오른쪽의 것은 해체수리 이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재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에 충주시에서 흔히 '중앙탑'으로 알려진 '중원탑평리칠층석탑'에 대한 정밀실측작업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 동안 키높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것을 바로 잡을 겸 향후 수리보수에 대비하기 위해 실측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가장 키가 큰 이 석탑의 정확한 높이는 12.95미터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줄곧 이 석탑이 14.5미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실측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무슨 근거에선지 ㅡ 목측(目測)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ㅡ 조선고적조사의 독보적 존재인 세키노 타다시 교수가 그렇게 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14.5미터이지 최초의 기록을 살펴보니까 "약 48척"이라고 한 것을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다가, 그리고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하다가 나온 것이 그 수치인 것으로 확인된다.
가령 아래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세키노 교수의 조수로 줄곧 활동했던 야츠이 세이이치가 <고고학잡지>에 연재햇던 <조선통신>이라는 글의 한토막이다.
...... (1912년) 11월 19일 경기도 여주읍을 작별하고 충청북도 충주군에 들어가 가흥면사무소(可興面事務所)에서 1박, 다음날 충주읍에의 도중에 금천면 탑정리(金遷面 塔亭里)의 칠중석탑을 구경하였사옵니다. 이 탑도 여주 신륵사의 전탑과 동시에 야기씨에 의해 ≪고고계≫ 제1편 제9호에 소개된 사진도 이 잡지에 나와 있습니다. 탑이 있는 장소는 충주읍의 서북 약 2리, 한강의 왼쪽 기슭 약간의 개활지(開闊地)에 있사온데, 총높이는 약 48척, 화강암으로써 축조한 빼어난 신라탑이며, 그 위대한 점에 있어서는 전라북도 익산군 미륵사지(彌勒寺址)의 대석탑에 버금가는 자리를 얻을 만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충주읍에서는 이틀간을 머물렀고, 그 가운데 하루는 읍의 동북 약 4리, 동량면 하곡동 (東良面 荷谷洞) 옥녀봉 남록에 있는 개천산 정토사지(속칭 개천사지)에 왕복하였사온데, ...... (하략)
이 글은 세키노 교수 일행이 강원도와 충북, 경북 일대의 고적유물을 두루 조사하던 와중에 정리되고 기고한 것이기 때문에, 현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벌써 석탑의 높이를 약48척이라고 적고 있다. 그들은 이 석탑을 행로 도중에 잠깐 구경하고 사진자료를 담았을 뿐이었다.
우리가 흔히 중앙탑의 모습으로 자주 구경하는 것의 하나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것인데, 이것은 바로 세키노 교수 일행에 촬영한 바로 그 자료이다. 촬영일자는 위의 조선통신에서 나와 있듯이 1912년 11월 20일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사실관계를 짚어 보자.
우선 상륜부 쪽을 살펴보면 이중의 노반 위로 복발과 앙화가 보이는데, 복발은 이때 반파된 상태이고 그 위에 놓인 앙화도 이 때문에 기우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눈여겨 볼 부분은 기단부의 아래 왼쪽이다. 사진 정면으로도 기단부의 일부 부재가 탈락되어 있는 것이 완연한데, 왼쪽 부분은 기단면석이 완전히 탁락되어 있고 그 바람에 기단부에 채워놓은 잡석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세키노 일행이 이곳을 지나갈 당시에 이미 석탑의 보존상태는 썩 좋았다고 볼 수는 없는 형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세키노 박사 일행이 남긴 사진자료로는 기단부의 상태를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야츠이의 글에서도 써 있듯이 야기가 <고고계>에 소개한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사진을 확보한다면 좀 더 다른 모습의 중앙탑을 구경할 수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풍수>라는 책에 보니까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는 훨씬 다른 각도의 '중앙탑'의 사진 하나가 남아 있다. 여길보면 사진 속의 기단부 오른쪽에 보이듯이 기단면석이 완전히 터진 것처럼 이탈되어 있고 잡석들의 모습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한편, 기단부 왼쪽도 면석이 절반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짐작컨대 세키노 일행이 촬영한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세키노 일행이 이 석탑을 보았을 때도 이미 석탑의 모습이 그러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지만 그나마 온전한 모습의 석탑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덜 파손된 쪽으로 사진을 촬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사진에 보이는 석탑은 ㅡ 상륜부 쪽에 기우뚱한 상태가 그대로 보이는 것에 비춰보더라도 ㅡ 해체 수리전의 모습인 것은 틀림이 없다. <조선의 풍수>는 1931년에 조선총독부 촉탁의 자격으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펴낸 것으로, 무라야마 그 자신은 단지 이 사진을 참고자료로 인용한 것이 불과하므로 원사진의 출처와 사진촬영시점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무라야마가 <조선의 풍수>에 '중앙탑'에 관한 얘기를 끌어들인 것은 건탑의 유래와 풍수의 관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풍수적 비보석탑의 의미를 소개하려 함이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충주의 중앙탑 충청북도 충주읍내를 북서로 거슬러 약 1리 20정(일본식 표기임)쯤에 가금면 탑평리에 중앙탑(中央塔)이라고 부르는 구층의 석탑이 있다. 이 탑은 신라 원성왕 12년(일본 연호..생략)에 건설했던 것인데, 탑의 건설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는 이 탑을 세울 무렵 이 지방이 흡사 조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앙진호(中央鎭護)를 위해 세운 것이 되는지라 이를 중앙탑이라고 불러왔다고 이르며, 일설에는 당시 이 충주의 땅이 왕기(王氣)가 성한 곳이라 하여 이 왕기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진호설이든 진압설이든 어쨌거나 이 탑이 풍수적 목적 탓에 세워진 것은 양설의 모두에게 귀결되는 바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앙탑'의 유래에 관한 얘기는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익히 들어온 바 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중앙탑'이라는 명칭은 정말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참으로 의외다 싶은 것은 이에 관한 기록을 아무리 뒤져보려고 해도 전무하다시피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탑에 관한 유래가 구전되어오고, 그러한 명칭이 분명 조선시대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야담>이나 <야사>와 같은 종류의 기록에도 전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은 속리산에 있는 '정이품송'에 관한 것이 있다. '정이품송'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그 유래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바인데 정작 이에 관한 고문헌의 기록이 있는가 되져보면 <실록>이고 <야사>고 간에 그 어디에도 한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직 공부가 부족함인가?
'중앙탑'이라는 명칭의 최초 용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무라카미 토모지로(村上友次郞)의 <최근지충주> (1915년)라는 곳에 수록된 것이 그나마 매우 빠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된다.
중앙탑 (일명 반천탑盤川塔) 읍내와 떨어져 2리여 되는 가금면 탑평리에 있으며, 신라조의 원성12년(환무천황어우)에 건립된 것으로 즉 조선의 중앙에 위치한 것을 표시했다고 이르는데, 일설에는 충주에 왕기가 있어 이를 억압하고자 하여 본탑을 탑평리에 건설했다고도 이른다.
훨씬 나중에 나오는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완전히 축약해놓은 듯한 구절이다. 아니, 무라야마의 설명이 위의 구절을 완전히 부풀려놓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얘기이겠다.
중앙탑의 어원이야 어쨌건 간에 이 석탑은 참으로 '불행하게도' 근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제강점기에 접어드는 그 순간에 붕괴의 위험은 가속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라야마의 책에서 수록된 사진에서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러한 상태가 핑계가 되어 마침내 중앙탑은 일제의 손에 의해 완전한 해체수리가 결정되고 만다. 석탑수선의 건의는 1916년에 있었고, 바로 1917년에 해체작업이 착수되었다가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이 와중에 석탑 안에서 사리구가 두 군데서 발견되어 모두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진 일도 있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이 사리구가 정식 전시회를 통해 실물이 소개되었다거나 아니면 사진자료라고 공개되었다고 하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무슨 까닭일까?)
중앙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 대한 공식기록으로는 김희경 선생이 정리한 <한국탑파연구자료> (고고미술동인회, 1968)에 그 당시의 총독부공문서를 번역하여 옮겨놓은 것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 사실만을 여기에 적어 둔다.
지금의 중앙탑이 군데군데 시멘트 범벅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은 이때 해체수리되면서 덧붙여진 결과물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일제가 이렇듯 시멘트 덧칠을 하면서도 가급적 원형은 유지하려고 애를 쓴 흔적은 있다는 대목이다.
차 탑은 연(年)을 거듭하여 경사함. 따라서 이를 분해하여 원형에 의하여서 수립함. 유(唯) 혼토(混土)를 충전한 외 일석(一石)도 증감하지 않음. .... (하략)
이 기록은 위의 총독부 공문서 가운데 포함된 보고자료의 하나에 보이는 구절이다. 석탑을 해체 수리했다고 하면서도 이미 떨어져 나간 ㅡ 그리하여 분실되었거나 파손되어 사라진 ㅡ 기단면석을 별도석을 마련하여 덧붙이질 않은 채로 수리를 마감한 것으로 봐도 이말은 사실로 봐야 할 듯하다.
지난 1992년에 충주공업전문대학박물관에서 발간한 <중원경과 중앙탑>이라는 자료에 수록된 한 장의 중앙탑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길 보면 해체수리 후의 모습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단부 내부의 잡석이 콘크리트에 뭉쳐진 정도의 흔적만 보일 뿐 기단면석은 덧붙여지질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모습처럼 기단부 외형이 말끔히 다듬어진 것은 모르긴 해도 해방 이후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 시멘트 미장을 하여 탱주의 모양을 만드는 식의 덧칠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의 중앙탑 해체수리가 낳은 폐해는 무엇일까?
그들 나름으로는 최대로 원형 그대로 해체보수한다는 뜻을 가졌던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석탑의 해체조립과정에서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던 것은 분명하다.
우선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것은 제자리에 다시 세우기보다는 석탑을 통채로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오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것은 <대정육년도 고적조사보고>에 "전체를 분해하여 포장한 것을 박물관에 옮겨 원형과 같이 고쳐 세우는 공사에 착수했지만 내년도에 가서야 이를 마치게 된다"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어떠한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냥 원래의 자리에 해체복원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그 당시의 첨단자재와 첨단공법이었던 '시멘트'재료로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시멘트 사용의 폐해는 석굴암 해체수리와 익산미륵사지석탑, 안동신세동칠층석탑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충주 중앙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기단부의 조립에 있어서 엉터리 꿰어맞춤이 이루어져, 원형을 손상시키는 우를 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사진자료에서 확인했듯이 일부 부재는 행방을 알 수없는 상태였고, 최소한 두 방향의 면석이 대부분 탈락되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온전하게 원형의 위치를 파악하기 곤란한 어려움을 있었을 테지만 좀 더 세심하게 조립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많이 부족했다고 할 것이다.
요즘에 일부에서 이 중앙탑을 다시 해체조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제의 업보에서 비롯된 일인 셈이다. 하지만 조금 열린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일제로서도 별 도리는 없었을 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기단면석을 제외한다면 다른 부위의 잘못된 배치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그러한 반증의 하나일 것이다.
지금에라도 중앙탑을 다시 해체수리하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도리없이 그냥 두는 쪽을 택할 것인지는 좀 더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정리 : 2005.5.2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첫댓글 중앙탑 우리고장의 숨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