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1:1-6절) 성전건축을 게을리한 백성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과 자신의 퇴직금(退職金)을 다 털어서 양계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그의 모든 미래가 걸려 있는 양계장은 순식간에 흙탕물로 뒤덮이고, 닭들도 전부 진흙투성이가 되어 죽어 버렸습니다. 비가 그친 후, 양계장 안은 진흙이 무릎까지 차올라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일단 진흙을 치우고, 죽어 있는 몇 천 마리 닭들을 묻어야 했습니다. 그것부터 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진흙을 치우고, 죽은 닭들을 파묻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사(移徙)를 갈 때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까는 것은 기본적인 일에 속합니다. 그 일부터 하지 않으면, 짐을 풀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소(小)선지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즉 호세아서와 아모스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고, 나머지 소선지서들은 대부분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스라엘도 망(亡)하고, 유다도 망(亡)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학개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지 70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소수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친 후, 희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발견한 것은 거대한 폐허(廢墟)더미였습니다. 그 폐허(廢墟)더미에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폐허 더미 자체를 치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도대체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성전(聖殿)부터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으로 중단되면서, 백성들은 점차 자기 생활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각자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농사를 짓는 데, 빠져서 성전 짓는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두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책망하고 계십니다.‘도대체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성전은 폐허로 내버려 둔 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그들의 삶은 정리가 되지 않은 집처럼 제대로 된 곳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마치 청소도 하지 않고, 도배도 하지 않은 채, 이사 짐부터 풀어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은 미루어 둔 채, 덜 중요한 일들을 먼저 붙들었습니다.
Ⅰ.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1-2절)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두 지도자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그들이야말로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민감하게 살펴보고, 진단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표면적인 증세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삶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씨를 뿌렸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했고, 음식을 먹었지만, 배부르지 않았으며, 옷을 입었지만,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지자는 이런 증세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파사, 즉 페르시아 땅 고레스의 칙령(勅令)에 의해 기적적으로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전원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적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아 있었고, 소수의 사람들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였습니다. 거기에는 성(城)도 없었고, 집도 없었고, 농사지을 밭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廢墟)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처음 바벨론을 떠나올 때는 옛 예루살렘의 화려한 영광을 재현해 보겠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눈앞의 현실을 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힘에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아직은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일단은 우리부터 살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농사를 짓고, 자기 자녀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다 백성들을 2절)...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데는 이들의 생각이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성전부터 재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즉 아무리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쌓여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 할 성전부터 짓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려 15년 동안 성전을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성전을 방치해 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쪽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방인들이 섞인 혼혈(混血)민족으로서, 자신들도 성전 재건에 동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思想)이 유입될 것을 염려하여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들은 페르시아 왕에게 유다 백성들을 모함(謀陷)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고레스 이후에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는 결국 그들의 모함(謀陷)을 받아들여 성전 건축을 금지하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며,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까지 중단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짓지 못한 것은 자의적(恣意的)인 선택 때문이 아니라, 불가피한 외부적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이 백성’이라고 부르면서 심하게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성전을 짓기 싫었던 터에 왕(王)의 조서(詔書)가 내려오니까,‘잘됐다’면서 성전 건축을 팽개치고, 자기들의 생활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4절)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여기 ‘판벽(板壁)한 집’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화려한 집(아파트)’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건물 내부 장식이 워낙 발달해 있기 때문에 나무판자로 벽을 세우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 당시 포로생활에서 갓 돌아온 자들이 이런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내부를 화려하게 꾸민 집이라기보다는 벽을 나무판자로 완벽하게 막아서 세운 집, 즉 가건물이 아닌‘완성된 집’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해석이 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즉‘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버려져 있는데, 어떻게 너희 집부터 이렇게 완성시켜 놓고 살 수 있느냐? 가장 중요한 성전이 미완성 상태로 있다면 너희 집들도 당연히 가건물 상태로 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성전부터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였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왕의 조서가 내려오기가 무섭게 성전을 내팽개치고 너희 집들만 완성해서 편하게 살려고 하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삶의 가장 앞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성전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면, 다른 일들도 제대로 할 수 없어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청소나, 도배도 하지 않고, 짐부터 풀어 놓으면, 집이 제대로 정리가 되겠습니까? 짐을 푸는 일은 좀 미루더라도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부터 해 놓아야 생활이 하루 빨리 안정될 것입니다.
아무리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 때문에 성전을 못 짓게 되었더라도‘우리들의 집은 성전을 짓고 난 후에 짓겠다. 그때까지는 기꺼이 가건물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지, 왕(王)의 명령이 내려왔다 해서 자기들부터 완성해 놓고,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입니다.
Ⅰ.성전 건축을 중단한 또 다른 이유 유다 백성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을 중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떠오르는 의문은‘이것이 과연 이들이 성전 재건을 등한시한 이유이겠느냐?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또 다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勅令)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수는 노예까지 합쳐서 대략 5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해방이나, 약속의 성취로 보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였습니다. 출애굽 때는 남자 어른의 수만 60만 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大軍)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는 큰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5만 명 정도 돌아온 것을 가지고 해방(解放)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라의 회복(回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들은 적잖은 실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무언가 이상하다. 온전한 해방이 되려면 적어도 출애굽 때 정도의 인원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 일어났던 것과 같은 기적과 능력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해방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볼품없는 성전을 지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윗처럼 성전 건축에 필요한 엄청난 재료들을 준비해 줄 왕(王)도 없었고, 솔로몬처럼 큰 역사를 일으킬 만한 지도자도 없었으며, 그만한 일을 수행할 인구도 없었습니다. 5만 명 정도로 이 일을 하려 들다가는 쓰레기만 치우다가 시간을 모두 다 보낼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것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들은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지, 구약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오히려 왕(王)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들의 생활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성전 건축이 중단된 이면에는 쓰레기가 너무 많았다든지, 돈이나, 사람이 없었다든지, 외부의 방해와 압력(壓力)이 있었다든지, 하는 물리적인 이유 외에 신학적(神學的)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우리가 돌아온 것이 과연 온전한 회복이냐? 만약 온전한 회복이 아니라면 이런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문제를 신학적(神學的)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전과 같은 규모의 성전을 지어야만 제대로 된 성전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된 후에 예전처럼 거대한 성전을 지어야 제대로 짓는 것이지,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초라한 성전을 지어 봐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패배의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은 구약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성령의 시대를 여시고, 전 세계적인 교회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을 일종의 봉화대(烽火臺)를 만들어야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 임하실 성령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학(神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돈이 있고, 사람이 모자라고, 환경적인 어려움이 산적해 있어도, 신학(神學)만 분명하고, 성경적인 안목만 있으면, 낙심하지 않고, 얼마든지 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옛 이스라엘로 돌아갈 생각만 하니까 ‘돈도 없다. 사람도 없다. 재료도 없다. 리더십도 없다. 사마리아 인들은 방해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짓지 말라고 한다.’면서 5년 동안이나,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을 때,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새롭게 세우시는 성령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재건하라고 말씀하신 성전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쓰레기더미 가운데서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공동체,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공동체와 예배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지, 큰 건물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새로 지을 성전에는 법궤(法櫃)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없어져 벼렸기 때문입니다.
법궤(法櫃)가 없는 성전도 성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구약의 성전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옛날 솔로몬과 다윗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과도기 세대이자,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새벽별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오류가 생긴 것처럼 오해했고, 이 상태에서는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집부터 완벽하게 지어서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Ⅱ.유다 백성들에게 나타난 결과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5절)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하나님께서는‘지금 너희가 공사를 중단한 데는 분명히 표면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더 진정한 이유는 어디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거라. 너희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내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이냐?
아니면 너희 자식 잘 키우고 농사 잘 지어서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사는 것이냐? 표면적인 이유 말고 진짜 이유를 '정직하게 생각해 보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데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어 버린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재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요, 스룹바벨 같은 총독이나, 여호수아 같은 대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삶에 만족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울인 노력에 비해 열매가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6절)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정상적인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고, 물을 마시면, 시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옷을 입으면, 따뜻하고, 돈을 벌면, 지갑이 불룩해지게 되어 있어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아무리 돈을 벌어도 이 구멍 저 구멍으로 모두 다 새 나가서 남는 것이 없다면, 분명히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나열하고 있는 항목들은 전부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곡식을 뿌려서 거두는 것, 먹고 마시는 것, 옷을 입는 것, 일을 해서 삯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이렇게 중요한 영역(領域)에서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수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일로 달려갔을 때,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현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너희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선발대로서 새벽별로서 너희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왜 우선순위를 저버리느냐? 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쓰레기 더미 위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심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곳에 성령이 임하실 때, 그 불길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Ⅲ.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 오늘 이 말씀처럼 우리 시대에 적합한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즉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일하면서 무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고, 노숙자가 되어서 거리로 쫓겨난 것입니다. 또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한 만큼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만 소중하게 생각했지, 영혼(靈魂)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혼(靈魂)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靈魂)이 건강해야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영혼(靈魂)이 병(病)들면, 아무리 좋은 집에서 배부르게 먹어도, 만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가장 앞자리에 모시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축복(祝福)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시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새벽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 교회들에 비해 뜨겁고,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껏 우리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야 황폐(荒幣)해지든, 말든, 자기 집(아파트)가꾸고, 자기 아이들 키우는데, 온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한때 누렸던 그 많은 축복(祝福)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즉 그 많은 돈, 그 많은 공장이 다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나라는 쓰레기 더미 비슷하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고 있고, 많은 기계들이 작동을 멈추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있어야 할까? 이 쓰레기들을 전부 치울 힘은 없다 하더라도, 이 가운데서 하나님 제일주의(第一主義)로 한번 살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작더라도 하나님 중심의 성전을 지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 유다 백성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가장 중요한 일은 미루어 둔 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정받는 직장에서 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경력을 쌓을 수 있을까? 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자기의 행위를 살펴볼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으며, 진정한 만족을 느끼고 있습니까?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생활 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그 이야기를 다 털어 놓아 보라’고 하십니다.
즉‘저는 교회에 실망하고 목사님한테 실망해서 신앙생활 하기가 싫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가졌던 비전을 포기했습니다. 막상 직장에 다녀보니까 제 생각과 너무나 다르더군요.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선교지에 왔는데 막상 와 보니까 제 생각과 많이 다르네요. 우리 애들 영어나 확실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라고 털어 놓아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말씀이 있는 신실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재건(再建)해야 할 성전(聖殿)입니다. 우리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건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껏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고, 성경공부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말씀을 붙드는 정직하고, 신실한 작은 공동체를 세우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을 담는 그릇으로서 신실한 공동체를 회복하는 이것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큰 산(山)에 깊이 파묻힌 보석(寶石)을 캐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 보석(寶石)을 캐내려면, 성경에 완전히 헌신해야 됩니다.
즉 유명해 지는 길, 인기 끄는 길, 다 포기하고, 성경만 붙들고, 몸부림을 쳐야만 한 두 조각 겨우 캐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혼자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다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용도 잘 되지 않는 설교 듣고, 설사도 하고 배탈도 나고, 토하기도 하면서 함께 몸부림을 치다 보면, 조금씩 빛나는 보석(寶石)조각들이 캐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 새로운 것을 좋아 하지, 가만히 앉아서 말씀만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보석(寶石)들을 캐내지 못합니다. 말씀을 붙드는 신실한 공동체를 세우려면,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일을 좀 제쳐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교회 때문에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려고 합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이런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남이 다 차려 놓은 밥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저마다 자기 일 하고 자기 집(아파트) 장만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주일이 돌아오면, 딱 한 번 예배드리고, 그것도 예배 끝나자마자 곧바로 내빼 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황폐(荒幣)해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고, 굶고 있고, 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너희가 이때에 편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고 물으십니다. 즉‘내 집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는데 너희 집만 완성시켜 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옳으냐? 고 물으십니다. 요즘은 교회가 교인들의 버릇을 다 망쳐 놓았습니다. 한 명 한 명 올 때마다 칙사(勅使) 대접을 하니까, 교회 오는 것 자체를 큰 선심(善心)이나 쓰듯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새로운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과 신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진정한 만족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전(聖殿)이 황폐(荒幣)해졌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말씀을 듣지 못하면, 세상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뿐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만난 한 형제는 명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는데도 만족이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이나, 은혜(恩惠)를 알지 못한지가 너무 오래 되다보니까 전공 공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물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우물이 없으면, 양 떼도 키울 수 없었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물이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수없이 땅을 파고, 또 파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필요한 것은 돈의 우울도 아니요, 지식의 우물도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생수(生水)가 솟아나는 말씀의 우물입니다.
이 우물을 얻으려면, 자신의 온 삶을 투자해서 파고 또 파야 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수원(水源)이 막히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요(富饒)한 사람은 바로 이 생수(生水)가 나오는 우물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힘을 쏟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성령의 공동체를 만드는 이것입니다. 말씀 속에 묻혀 있는 보석(寶石)을 캐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을 위해 세상의 야망이나, 재미를 많이 포기하는 이것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앞선 우선순위(優先順位)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딪쳐 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자기 혼자 애쓴다고 될 일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뒷전으로 미루어 놓은 채, 자기 집, 일이나, 자기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해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무언가 희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 어른을 모시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려면, 아무래도 무언가 조심을 해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즉 어른이 계실 방도 마련해야 하고, 음식도 신경 써서 마련해야 하며, 행동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화가 나도 큰 소리로 싸우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데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이것입니다. 공동체는 결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쪼개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자기들 가운데 모시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려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성전을 건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일보다는 자신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에 더욱 바빴습니다. 만약 부모가 엄청난 부자라면, 자식들이 저마다 부모를 모시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富饒)하신 분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모시는 일을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백성이야말로 복(福) 받은 백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福) 받은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거주하실 수 있도록 자기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즉 우선순위를 바로잡고, 거룩함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은 판벽한 집에서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주여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신실한 공동체로 세워 주옵소서. 인간적인 방법은 사라지고, 오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공동체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그 일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집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자기 것을 조금 포기하고,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수고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애써 자기 집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애써 부자(富者)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이것입니다. 물이 펑펑 솟아나는 이 우물만 얻는다면, 세상에서 다시 목마르지 않는 완전한 축복(祝福)을 우리와 우리 가족과 우리 주위 사람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팬(성도)들이 진리의 복음을 활용하는 방법 지인 또는 가정(두.세명 모인 cell 교회) 마18:20절)두세 사람이 내 이름(예수 그리스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리라" 골방 새벽(개인 기도) 마6: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성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고전3:16절)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롬14:17절)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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