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은 2001년 발간되었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발간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던 듯하다. 작은 아이가 2002년 월드컵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큰 아이와 터울이 3년이 됐으니 한참 고만고만하던 아이들을 키울 때였을 것이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좋은 책을 읽히고 싶다는 욕심에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차를 갈아타고 좋은 책이 많다는 성당 부설 도서관을 가보기도 했고, 버스에서 내려 등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산꼭대기에 있는 도서관을 대여섯권 만 돼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 책들을 짊어지고 무거운 줄 모르고 오르내렸다.
그렇게 다니던 도서관에서 <돼지책>을 만났다. 아이들 책이라는데 주부인 나를 위한 책같았다. 두 아들을 키우는 나에게 엄마가 남편과 두 아들을 업고 있는 표지는 그냥 '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는 마음만큼 엄마로서 살아가는 시간은 버거웠다.
아이들을 키우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나를 번민하게 했다. 그래서 시작한 '논술' 교사로서의 생활,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하루의 시간을 쪼개어 사는 것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절에 읽은 <돼지책>에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건 가족을 업은 엄마의 모습이다. 집안 일을 도와주지도 않고 '밥 줘' 하는 남편이나 아이들을 놔둔 채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리고, 그리고 가족들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을 잊은 건 아니었는데도, 기억에 남는 건 '업은' 모습뿐이다.
당시 나로서는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 가족들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리는 엄마의 '혁명'적인 모습이 너무 버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차마'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 '외면'했는지도. 집을 나갈 용기도, 이미 굳어져 버린 가족의 위계를 거스를 용기도 없는 나에겐 '가족을 업은 나'를 그대로 투영한 <돼지책>의 엄마가 오래도록 '가슴저미게' 기억에 남았다.
다시 읽은 <돼지책>
그래서 십수년이 지나 다시 <돼지책>을 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난감했다. 돼지책의 엄마가 '트라우마'처럼 가슴 깊숙이 뜨끔거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보게 된 <돼지책>, 그곳에서 나는 그림책이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를 만났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돼지책>은 가족을 업은 엄마와,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리자 돼지로 변하는 충격적인 가족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시 본 <돼지 책>에서 보이는 건 돼지로 변하는 가족보다 '엄마'라는 사람이었다.
책 속에 엄마가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고, 그런데 그 '집안' 일을 하는 엄마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은 엄마의 '자아'를 상징한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충분히 그 상황에서 엄마가 행복하지 않다는 게 전해진다.
흔히 '영혼이 없다'라는 말처럼 집안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에서는 그 '낮은 채도'의 그림처럼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엄마'가 집안 일을 마치고 일을 하러 간다. 그저 주부가 아니라 일까지 하고 있었다. 일을 하러 가는 엄마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다.
예전에 책을 봤을 때는 엄마가 '주부'로 일이 많아서, 집안 일에 치여서 행복하지 않다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본 <돼지책>에서 어쩌면 엄마는 '집안 일' 자체가 엄마랑 맞지 않아서, 혹은 현재의 삶 자체로만 만족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책의 마지막 폐이지에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엄마, 그 앞에서 돼지가 되어버린 가족들은 무릎을 끓는다. 그리고 이제 집안 일을 나누어 하게 된 가족들, 엄마는? 엄마는 밝은 표정으로 차를 고친다. 차를 고치는 엄마라, 여기서 <돼지책>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 엄마가 집안 일을 하며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저 집안 일을 하며 행복하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그 시간이 엄마에게는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해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차를 고치는 엄마'가 되기까지의 시간
나 역시도 그랬다.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이 소중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만'하지는 않아 늘 마음이 들볶였다. 되돌아 보면 그 '들볶임'이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계속 '시도'하도록 했던 '동인'이 되었던 것같다.
그래서 이제 다시 읽은 <돼지책>에서는 그저 '집안 일'이 버거운 '주부'의 가출 이상, 자신의 현재에 대해 고뇌하고, 미래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기꺼이 지금의 삶을 '버릴' 수 있는 한 여성의 '도전'이 느껴지는 것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가정'을 멀리하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엄마는 차를 고치는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예전에는 밝은 얼굴로 돌아온 엄마가 그저 버거웠던 집안 일을 하게 된 가족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본 엄마가 밝은 얼굴로 돌아온 건 '자신의 답'을 찾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엄마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가족들이 돼지로 변했는지, 집안 일을 하기 시작했는지).
심리학자 융의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로,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역할을 뜻한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사회에서 맡는 역할에 따라 여러가지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다.
그 중에서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주부'라는 페르소나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사회가 변함에 따라 주부의 '페르소나'는 성격이 달라져왔다. 가전 제품의 발달, 그리고 남녀 평등 사상, 나아가 페미니즘으로 여성의 위상과 지위는 한결 좋아졌다.
'향상'되었다는 주부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늘 페르소나로서 '주부'의 삶은 그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갈등'을 일으킨다. 물론 기꺼이 '주부'로서의 페르소나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부라는 '페르소나'와 늘 갈등했다.
그 '갈등'에 대해 예전에 보았던 <돼지책>에서는 그저 주부로서의 버거움만이 나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본 <돼지책>에서 그 '갈등'의 시간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나를 찾아가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돼지 책>의 엄마는 그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겨두고 집을 나설 수 있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밝은 얼굴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고뇌'는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향한 마중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첫댓글 읽어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