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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라는 고통
고통은 신의 선물
고통을 통해 우리는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다.
암의 고통
자아 성찰을 위한 최고의 순간임을...
연구결과 어떤 병이든 무의식적 죄책감이 동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몸에 병이 있다면 무의식적 죄책감이 있다고 짐작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적 죄책감이 없으면 이런 병들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혐오를 동반하는 파괴적인 것만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치유의 비밀이 있다
지금까지
심장질환이나 우울증, 알콜중독,
마약중독같은 병들을 치료할 때
마음과 의식의 기본법칙들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병들은
모두 심각한 난관으로
실재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변화시킨다.
이번 장은 특히 암환자들과 그 가족들,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이들, 현재 암치료를 받는 중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치유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 몸과 마음, 영혼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치유법은
꼭 기존의 현대의학이나
대체요법만을 고집하지 말고
두 방법을 모두 포용해야 한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인간의 타고난 한계를 적절히 고려하면서 몸과 마음, 영혼의 측면들을 포함한 더욱 포괄적인 차원에서 병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환자들 가운데
이 만성적이고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
대부분 담당의사와 의료진들이
가망없다고 포기한 환자들이었던 이들은
전부 포괄적인 차원에서 병을 다루었다.
그들이 속해있는
진정한 실재의 포괄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영혼이라 불리는
인식의 영역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는 어떨까? 이것은 이목을 끄는 기발한 문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매일의 삶에서 실험을 통해 실제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실제적인 무엇이다.
이 치명적인 질병에서 회복돼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친구들이야말로
인간에게 알려진
어떤 질병에서도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들이다.
앞의 장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치유곤란한 여러가지 만성 질환들을 안고 있었다. 증상들을 일부 치료해도 병 자체는 호전되지 않았다. 사실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기존의 일반적인 치료법들을 써봤지만 몇몇 증상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반면 다른 증상들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그러다
의식의 장이라는
포괄적인 차원과
이 장들이 자기치유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면서
이 모든 질병에서 회복되었다.
통풍과 높은 요산수치로 고통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마음속의 생각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안 후
마음속 생각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의 화학작용이 실제로 달라졌다.
이를 계기로 원자와 세포, 원소, 전자 등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해는
암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접근법에서
아주 중요하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는 이렇다. 몸은 마음속의 것들을 반영하고 마음은 다시 영혼의 입장을 반영한다. 인간의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자리를 알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차원의 영향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몸이
마음의 결과물이고
마음은
영혼의 결과물이므로
의식이라는 영역에서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임상학적으로도 맞는 얘기다. 의식의 차원에서 병을 다루는 사람들은 어떤 의학적 방법으로 몸을 직접 치료하지 않아도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경험이 경험되는 자리를 이해하고
실제를 들여다보지 않아서 갖게 된 일반적인 착각들을
내려놓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본적인 사실을 살펴보자. 먼저 몸 자체는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 예를들어 팔은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공간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경험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팔의 감각도 경험하지 못한다. 팔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 신체적인 몸보다 더욱 큰 어떤 것 즉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감각을 포함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체적인 현상들은 마음이라는 더욱 큰 차원에서 경험된다. 몸의 경험이 일어나는 자리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흥미롭게도 마음자체에도 자신을 경험하는 능력은 없다.
생각은
하나의 에너지 형태에 불과하며
자신이 생각임을 경험하는 능력은 없다.
느낌도 자신이 느낌임을 경험하지 못하며, 감정도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경험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을 품는 것은 마음보다 더욱 큰 의식 자체의 에너지 장이다. 이 에너지 장은 크기도 한계도 형태도 없다.
이 의식덕분에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한다.
그러나
의식자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의식의 에너지 장안에는
빛과 유사한 고주파의 진동이 있다.
바로 자각 awareness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자각덕분에
우리는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주고
마음은
신체적인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해준다.
그러므로
신체적인 몸 자체는
가장 실제적인 만큼
가장 강력한 것으로부터
몇단계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생각의 에너지가
신체적인 몸의 에너지 차원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앞의 장들에서 자기치유를 불러오는 여러가지 기법을 설명했다. 의식자체의 본질을 설명한 후 나중에 설명할 자기치유 양식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제시한다.
먼저
암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병의 경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병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위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 같은 비극이나
온갖 중병, 개인적 삶의 시련들 모두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밑으로 내려가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며
자기연민이나 우울, 절망에 빠질 수도 있고,
시련을
하나의 도전이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시련이
더 정확한 자각을 위한 발판임을 깨닫고
기회를 잡을때까지
이런 시련은
삶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왜 그럴까?
삶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들에는
힘이나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최대치의 압력이 주어져야만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이제까지 믿어오던 것들의 실상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마음이 보통은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보통은
커다란 시련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필요한 성장이 일어난다.
암을 포함한
다른 심각한 질병들과 관련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런 커다란 시련들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적이다.
그 목적은
'가능한한 신속하게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것'이다.
불치병에 걸렸을 경우
시간이 분명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치명적이라거나
마지막이라고 받아들인 것들은
실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마음의 힘
때문이다.
마음이
어떤 병을 치명적인 불치병으로 받아들이면
그 병은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는다.
물론
카르마에 의한 운명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런 점은 믿음체계의 위력을 입증해준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병에든
누구도 항복하거나
희생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내친구들 가운데도
이제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병들을
이겨낸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내가 오늘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도 딱 한가지, 내 개인적인 삶에서 나도 똑같이 병들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수많은 병들로 인한 과다출혈로 이미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들 모두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마음속에
완벽한 몸상태를 그리고 있으면
몸이 점차 완벽해지면서
병은 사라져 버린다.
이처럼
몸이 의식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구체화시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몸은 마음의 구현체, 즉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속에 들어있는
생각의 반영물일 뿐이다.
물론 자신의 마음을 되살펴 보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세
그런 생각을 한 기억이 없는데'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한 기억이 없다면,
자신의 삶속에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그 생각이
인류의 집단의식에서 비롯되거나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소리없이 프로그램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과 경험을 바라보는 다른 맥락과 방식을 창조해낼 수 있도록 의식지도를 다시 살펴보자. 의식지도를 보면 자기치유의 모든 원칙들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쯤이면 아마 의식지도를 처음 보았을 때와 지금의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의식지도를 살펴보는 일 자체가 점진적인 학습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배운다.
좌뇌는
단선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조금씩 순차적으로 학습한다.
반면에
우뇌는
상황을 위에서 돌려보다가
순전한 반복적 노출과 익숙함을 통해
전체를 근본적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마음 주변의 어딘가에 있는
무의식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이 현상들을 끌어 모아서
유용한 방식으로
그 동시성을 꿰어맞춰볼 것이다.
의식지도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의 에고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나는이나 나를, 나 자신이라고 말할때 의미하는 소문자 s를 쓰는 작은 나 self말이다. 이 작은 나의 개념과 인상, 견해,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느낌, 사람들이 나나 나를, 나 자신이라고 말할 때 보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총합이다.
의식지도에는
가장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
가장 높은 단계를 향해 올라가는
다양한 차원의 에너지 혹은 의식의 단계들이 있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 이 모든 단계들을 수치로 표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너지 장의 방향도 발견했다. 용기 미만의 장들은 에너지가 아래를 향하는데 이것은 이 에너지장들이 파괴적이고 삶을 지지해 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용기위의 단계들에서는 에너지가 위로 향한다. 지도 맨 위와 가까운 곳에는 사랑의 장이 있는 반면 지도의 아랫부분에는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장이 존재한다. 에너지 장들과 이 장들의 상대적인 힘, 이 장들이 긍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지 등을 이해하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예를들어
치료받을 때 한쪽손에 약품을 들고
누군가에게 우리의 근력을 검사해달라고 하면
이 약품이 우리에게 효과가 있을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있다.
도움이 안되는 약일 경우
팔의 근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추천받은 치료법의 효력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에너지 장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 에너지 장들이
암과 암의 연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 영혼 모두 사실은 의식의 표현이므로 모든 것이 극히 중요하다. 에너지 장이 부정적이면 생화학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모든 측면들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에너지 장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다면
의식지도를 보고
각 에너지 장에서 어떤 감정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예를들어 자기연민의 감정이 있으면 50의 부정적인 에너지 장속에 있는 것이다. 50의 에너지 장은 물론 사랑의 에너지 장 500과 비교하면 그 힘이 매우 약하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생각들을 내려놓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정적인 느낌이나 생각의 에너지는
열두개의 경락을 통해
인체의 경혈에너지 체계로 전이되고
몸의 기관과 세포들에서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몸의 세포들이
이 미움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노에는
인체의 생리적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에너지 장까지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마음은
가장 작은 분자와 원자에 이르기까지
몸의 모든 기능적 측면들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몸의 모든 원자와 분자들이
의식의 단계와 믿음들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몸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들은
의식안에 새겨져 있는
청사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꾸면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수 있다.
플라세포 반응도
몸에 대한
마음의 이런 영향력을 입증해준다.
수십년간의 연구결과가 어떤 알약에 치유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약 1/3의 환자들이 회복되거나 증상이 호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는 효력이 없는 의문투성이의 만능 약들이 계속해서 대중에게 팔려나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어도 1/3의 사람들은 효과를 체험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부정적인 믿음체계때문에
실제로 안좋은 결과를 얻는
노시보(nocebo)효과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똑같은 약물을 주입해도
긍정적인 생각을 지닌 이들은
좋은 효과를 보고하는
반면
약삼분의 일의 환자들은
노세보 효과로 인해
부작용을 호소한다.
설탕으로 만든 알약을 처방하면 많은 사람들은 두통이나 구토, 소화불량, 현기증, 불면증, 졸림 등을 호소하고 반응을 잘 보이지 않는 삼분의 일은 효험은 물론이고 부작용도 호소하지 않는다.
이로인해
임상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격언이 회자되었다.
삼분의 일은 호전되고
삼분의 일은 악화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의사가 어떤 치료를 하든 똑같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힘은 최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최면중에 단지 암시를 걸기만 해도 병이나 증상들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정보들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임상실례들, 친구나 동료들의 경험들에서도 가져온 것들이다.
나는 나의 마음과
의식속에 품고 있던
몸에 대한 생각들을 변화시키면서
실제로 몸의 화학작용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병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병을 치유하는데
필수적인 기본원칙은
바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마음속의 생각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무언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바로 마음의 믿음체계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들의 구현체가
바로 신체적인 몸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흔히 그런 생각을 품은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생각의 형태들을 품고 있는 것으로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일례로
대중매체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의식을 받아들여
부정적인 믿음체계에
에너지를 불어넣었을 수도 있다.
이런
집단의식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자각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암의 경우
암과 관련된 두려움이나 온갖 부정적 함의들,
생각의 형태들 같은 일반적인 마음이
암에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부정적인 에너지 장인
두려움 자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많이 품고 있으면
흔히 암을 포함한 두려운 것들이
의식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자신도 모르게 열어두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암에 걸리기 쉽다고 믿은 적이 없어도
몸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입증하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의 형태로
이런 집단적인 믿음체계를 받아들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에너지 장들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죄책감의 에너지 장 30은 의식지도 아랫부분에 위치한다.
죄책감의 장에서는
자기혐오의 감정이 일어난다.
심리학과 심신의학의 관점에서
암이 갖는 중요성을 많이 연구한 결과
암환자의 심층에는
흔히 무의식적인 자기혐오나
자기비난, 인간적 결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면이
많이 깔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처리와 치료,
치유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병과 증상들을 치료해서
병을 호전시키거나
병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여러해 동안 편두통과 십이지장 궤양, 통풍, 저혈당증, 순환장애, 레이노병, 그레이브스병, 게실염 등으로 고통 받았다. 이 모든 병들은 내 믿음체계의 결과였으며 무의식적인 죄책감도 어느정도 동반되었다.
연구결과
어떤 병이든
무의식적 죄책감이 동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몸에 병이 있다면
무의식적 죄책감이 있다고 짐작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적 죄책감이 없으면
이런 병들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혐오를 동반하는
파괴적인 것만이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치유의 비밀이 있다.
유사한 경우로 몇몇 박테리아들은 일정한 온도와 빛, 대기조건같은 특정한 조건하의 배양기에서만 성장한다. 조건이 달라지면 박테리아들은 더이상 배양접시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파괴적인 의식적인 욕구와
파멸적인 것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안에서만
계속 자랄 수 있다.
여기에
치유의 실마리가 있다.
본질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에너지 장의 회전방향이다.
약을 예로들어 보면
분자의 화학적 효과는
분자가 오른쪽으로 도느냐 아니면
왼쪽으로 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덱스트로 암페타민 황산염
(덱스트로는 오른쪽으로 라는 의미)이 한 예다.
이 약은 흔히 말하는 각성제로 체중감량효과가 있으며
높은 흥분감을 느끼게 해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결국에는 미친듯 발작을 일으키게 만든다.
한편
레보 암페타민(레보는 왼쪽으로 라는 의미) 황산염에는
전혀 이런 효과가 없다.
구성분자는 같아도
회전방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자기치유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긍정적인 에너지 장으로
확실히 이동하는 것뿐이다.
자기치유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의식 안의 지배적인 에너지 장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자기치유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치유의 정서적 진실과 물리학, 과학, 형이상학과 더불어 의학과 정신의학, 전인의학의 관점을 두루 파악했으므로 이제는 왜 이런 감정들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알 것이다. 그 이유는 착한 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들에 대한 집착이 파괴적이고 심지어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근력 테스트 방법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 방법으로 근력을 검사할때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품고 있으면 근력이 약해진다.
근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몸의 다양한 기관들과 연결되어 있는
경혈체계에 장애가 생겼다는 의미다.
또
세포들의 화학작용과
재생패턴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떤 병이든 치유의 유일한 기회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에너지 장으로 이동하는데 있다.
에너지 장이
더욱 긍정적이고
고차원적일수록 치유력은 증가한다.
현대의학이
치유하지 못한 병들에
대체의학이 효력을 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이런 발견의 덕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아미 몇년전에 치명적인 소화기 질환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죽음 직전에 이 병이 호전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특히
암같은
심각한 질환에서 회복되려면
반드시 죄책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죄책감과 자존감의 결여,
자기혐오와 두려움이
암에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죄책감
다음에는 가망없음과 절망을 동반하는
무감정의 에너지 장이 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세상을 가망없는 곳으로 보고
자기연민과 가망없음에 압도당한다.
암의 진행을
부채질하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무감정이라는 에너지 장 위에는 슬픔의 에너지 장이 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암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흔히 "왜 하필 나야?"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후회와 상실감, 낙담속으로 빠져든다.
세상과 삶을 슬프게 바라보면서
이 에너지 장의 희생자가 된다.
에너지 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암이라는 문제에서
우리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에 지배당하도록 스스로를 허용하는 것은 이 순진무구함 때문이다.
슬픔 다음에는 두려움의 에너지 장이있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도 암환자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두려움은 아주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지만 100의 에너지 장에 있기 때문에 힘은 더욱 강하다. 이 장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과 삶을 두려운 곳으로 보고 신도 징벌을 일삼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암에 걸리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명의 과정도
위축되는 느낌이다.
그러면
기가 꺾이고 에너지를 상실하면서
파괴적인 힘에 굴복해서
병의 진전을 무의식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는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이들은 전부
희생자로 주저앉기를 거부했다.
모두 자신을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사를 시작하고 기존의 일반적인 의술이외의 방법들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다그치기도 했다.
저 선생님.
해주실수 있는게 이게 전부인가요?
병을 치유하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또 열망과 분노의 마음에서 이렇게 묻기 시작한다. 저를 치유해줄 다른 방법이 있나요? 이런 태도는 이런 감정들의 에너지 장을 발전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있다"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 자부심을 가지면서 아주 결정적인 용기의 장으로 올라간다. 용기의 장 200은 두려움의 장보다 몇배는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장의 방향이 부정적인 방향에서 중립적인 방향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인체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 장은
안테나와 같다.
부정적인 것에 맞춰지면
이 안테나는
파괴적인 것들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 장의
경로 가운데에 있는 몸은
이 에너지에 손상을 당한다.
부정성과 파괴적인 힘이
몸에 손상을 가하고
암이라는 형태로
몸을 통해
힘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아마도 문제는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믿음체계,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용기의 단계에서는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세상에 대한 시각이 바뀌면서
문들이 열리기 시작하는
기회의 세상으로 올가간다.
이전까지는
답을 안다는 착각에
마음을 담아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일단 용기를 가지면 마음은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모르는 답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사실 나는 필요한 질문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잖아"
이렇게 자신을 여는 순간 힘을 얻고 마음을 열 용기를 갖는다. 이처럼 200의 단계에서는 진실을 직시할 능력을 얻고 진실을 위해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생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책임을 지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 병에 걸린 건 박테리아 때문이야.
내가 이 병에 걸린 것은 바이러스때문이야.
내가 이 병에 걸린 것은 암세포들 때문이야.
언제나
자신과 의식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병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병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삶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흔히
우리 무의식 속의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용기 바로 위에는 중립의 에너지 장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화살표가 위를 향하며 에너지 장도 250으로 비약한다. 초연 혹은 무심이라는 감정상태가 동반된다. 또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도 더욱 크고 새로운 자유와 삶의 긍정성을 경험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내면의 진실을 직시하고 숙명론을 포함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숙명론은 제 2차세계대전 중 병영에서 총알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같다. 총알이 우리를 향한 것이라면 그 위에 우리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므로 총알을 두려워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총알에 우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면 어차피 총알은 우리를 맞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총알은 "
카르마"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무슨일이 일어나든
다 운명인 것이다.
일어나기로 되어있는 방식이
카르마이므로
운명론적인 태도는
어느정도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그 덕분에 초연해질 수 있다.
암환자가 이런 상태에 이르면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음, 봐 살 운명이면 사는 거고 아니면 아닌거야. 내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병이 나을 운명이면 낫고 아니면 아닌거야. 난 어느쪽이든 따른 준비가 돼있어. 다시 말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갈때까지 신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원형질이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슬픔에 빠져 있거나
자기연민과 분노, 오만,
부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훨씬 편안한 상태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있고,
실제로 치유를 위해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서
암이 치유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다소 허황된 생각이지만 말이다.
중립의 단계를 넘어 자발성의 단계로 이동하면 세상을 호의적인 곳으로 보고 삶도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희망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 해결책이 있어. 맞아 암같은 온갖 치명적이고 가망없는 불치병을 안고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잖아".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창조하고
증명하겠다는 목적을 갖는다.
그리고
이 병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치유의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면
이 세상은
조화로운 곳으로 보이고,
이런 세상에서는
암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아주 즐겁게 자신이 되찾은 진실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신이
자애로운 존재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의식지도 아랫부분에 있는 에너지 장에서는 흔히 징벌을 일삼는 존재로 신을 인식하거나 신 대신 이런저런 형태의 자기징벌이나 통증, 고통을 믿는다.
그러나
자신이 적합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고
해결책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면
의식속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자발성의 단계로 올라간 후
사랑이라는 에너지 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인 단계다.
사랑의 에너지 장에서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믿음에 기초한 회복그룹인 기적수업 모임이나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협회처럼 치유능력으로 유명한 모든 조직들이 이것을 입증해보이고 있다.
이 에너지 장에서는
거의 모든 진행성 질환과
만성질환, 가망없는 불치병이
저절로 호전되거나 낫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치유책이 없거나 의료진이 그렇다고 인정을 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알콜 중독증만 놓고 봐도, 이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 멀쩡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고통을
더욱 성숙한 의식과 자각에 이르는 도약대로,
사랑을 위한 헌신속으로 들어가는 길로 이용한 결과
실제로는 이들의 삶은 변화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의 에너지 장이 지닌 본질이
이런저런 것을 해주면
너를 사랑할 거야 하는 식의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속으로 들어가면
드러남의 과정이 시작되고
정신과 두뇌안에서
엔도르핀이라는 화학물질이 분비된다.
이 모든 에너지 장들에 따라
두뇌안에서는
효소들의 변화가 일어난다.
신경전달물질들이 변화하면
온 신경세포들이 열리고
방출된다.
그러므로
치유의 힘을 지닌
사랑의 에너지 장속으로 들어가면
부정적인 감정상태에 있는 사람과는 달리
무수한 뉴런들을
그들의 마음대로 활용하게 된다.
이것들을
자산처럼 운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무조건적인 사랑의 에너지장 속으로 들어가면
치유의 과정이 시작된다.
실제로
우리는 540가량 되는
가슴의 에너지 장에서
치유가 일어남을 발견했다.
그럼
자기치유를 불러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의식적인 죄책감이다.
자신이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밝혀내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러려면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할때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음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시작하면 평생 의식밖으로 밀쳐두고 억압하고 눌러두었던 온갖 부정성과 죄책감에 압도당해버리고 말거야". 모종의 도구는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들이 들고 일어날 때 처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우선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것들을 파악하는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이 있으면
고차원적인 이해 덕에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게 되고
그러면 죄책감도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또
평생 정확히 "하나의 죄"를 저질러 왔으며
이 "죄"를 계속 되풀이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 "죄"는 바로
우리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행동하면
행복을 얻으리라는
순진하고 안이한 생각에 따라
이제까지 모든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당시에는 생존에 필요하며
생존을 해야 행복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행동했음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 지닌 모든 감정의
기본이다.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기본적인 전제,
가장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착각은
몸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바탕에는
사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몸을 잃어버리면
행복의 원천을 잃고 말거야.
의식자체를 잃어버리고 말거야.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실재를
더이상 신체적인 몸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해주는 자각,
의식자체가 우리라면
몸은
사다리의 맨 아래에 있는
다리와 같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내려놓고
이것들을 억누르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그 도구는
이런 감정들이 의식위로 떠오를때 마다
이것들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자체가
기본적으로 순진무구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이
의식의 본질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자신이 한일을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하고
잘 믿는지 알 수 있다.
교활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순수함의 기준으로 볼때
아이들의 동기는
아주 순수하다.
이
근본적인 순진무구함은
나이가 들면서
어른과 같은 의식으로 변해간다.
아이들의 본질적인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어릴때의 의식속에 프로그램들이 깔렸기 때문이다.
순진무구하고
잘 믿기 때문에
후에 암을 만들어내는 온갖 생각들,
자기비난과 두려움과 연관있는 생각들,
인간성의 한계들을 다양하게 표출해 버려
자신을 거부하게 만드는 온갖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암을 치유하려면
더욱 커다랗고
고차원적인 큰나에서 생겨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인간의 모든 나약함은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받아들인 믿음체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체계들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의 형태로
매일의 삶에서 나타난다.
슬픔이나 상실감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외부의 무언가가 행복의 원천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그 원천을 아쉬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목적과 갈망,
우리가 행복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것과
우리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노는 더욱 깊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의식지도를 살펴보면서 이렇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내 의식속의 어떤 착각이
지금 암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용기미만의 모든 단계들은 암을 키우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암을 만들어내는 착각은 바로 행복의 원천이 자기외부에 있다는 외부의 무언가가 자신을 해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힘을
외부의 무언가에 내주고
투사시키는 순간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 떨어져
어리석게도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다.
에고의 무의식적인 목적은
자신이 희생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리가 계속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동의할지의 여부를
암으로 시험하려 한다.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순진무구한 희생자이며
외부의 무언가가 가해자라는 견해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시험을 하는 편이
에고에게는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순진무구함을 이해하고 인정하면
거짓된 순진무구함에서 비롯된
희생자적 태도는
필요없어진다.
희생자 자체가
애초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우리가 순진무구함으로 받아들인
믿음체계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악명높은 믿음체계의 예를 들자면
아마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일 것이다.
성공한 중년의 많은 사업가들이 알고있는 것처럼, 그들이 성공을 통해 얻은 일상적인 두통과 탈진, 많은 소송, 탐욕, 동료들의 질시다. 자연히 그들은 이렇게 한탄한다.
"성공을 거두면
행복을 얻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거야?
하긴 덕분에 멋진 차에 비싼 옷을 즐기고 좋은 동네에서 근사한 집에 살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다. 세속적인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과
자신에 대한 진실을 버렸다는 느낌으로 인해
죄책감과 환멸에 빠질 뿐이다.
암을 포함한 질병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본질적인 순진무구함과 연결되고,
삶의 온갖 사건들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이 내적인 순진무구함의 실재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모든
세속적 성공을 넘어서 있는
큰나를 분명하게 자각해야 한다.
삶의 경험속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건
내면의 무언가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침에 우리가 누구이고
오늘이 며칠인지 혹은
오늘 할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도 전,
처음의 것에 눈뜨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내면의 무엇이다.
깨어나
자각의 상태에 들어가면
고차원적인 큰나의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면
이것이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로
삶의 온갖 사건들을 넘어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
의식이
구체적인 생각의 세계속으로 내려왔을때만
비로소 "오 그래, 오늘 월요일이지.
혹은 맞아, 얼른 가야해"라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큰나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던 상태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삶의 사건들과
극도의 압박감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를 결정할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들의 희생자가 되거나
이것들을 초월의 도약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의식적 죄책감이다.
기적수업 모임에서는
두려움을 내려놓는 법과 사랑,
용서를 가르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적수업 모임이나 이와 유사한 과정들에서 가르치는 대로 실천한 덕분에 암이나 다발성 경화증처럼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많은 질병들에서 회복되었다. 기적수업 모임과 같은 모든 과정들이 관점을 바꾸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비난과 죄책감,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사랑과 용서, 자비의 상태로 들어가는 법을 가르쳐 주기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의지에서
이해하고 싶은 욕망도 생겨난다.
그러므로
자신을 치유할때는
두팔로 자신을 안아주며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내면에 치유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들도
치유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에고를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에고를 공격하거나
적대적인 위치에 서서
적으로 만들지 않고
스스로 사라질때까지
에고를 사랑해주어야 한다.
연민과 사랑,
이해를 통해서만
에고를 진실로 녹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을 성찰하다보면
평생 우리가 저질러온 실수들이
사실은 모두 순진무구함 때문이었음을
이해한다.
이 순진무구함에 대한 이해를
주요 목표로 삼으면
연민의 마음으로 인해
치유가 이루어진다.
타인들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갖고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으면
우리의 에너지 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암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에서만 자라날 수 있을뿐
긍정적인 에너지 장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
의식지도를 보면 500단계에 있는 사랑의 에너지 장에 누구나 이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헌신할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것같은 감정주의나 감상주의, 집착, 의존, 서로를 통제하기 위한 밀고 당기기는 물론 아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건
모든 생명을 보살피고
지지해주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의도,
가장 정확하게는
사랑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생명은
성인에게든 범죄자에게든
똑같이 균등하게 흘러든다.
생명과 진실,
내면의 신은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생명은
모든 존재들에게
똑같이 흘러든다.
성경에 나와있는 것처럼 비는 모두의 위로 똑같이 떨어져 내린다. 이 말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생명은
모든 존재들 속으로
똑같이 흘러들므로
우리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진실을 지지해주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야 한다.
자신을 치유하는 능력은
"신의 도움을 받으면서 필요한
내면의 작업을 통해
이 병을 치유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음"을 인정하는데 달려있다.
처리와 치료,
치유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처리는
단순히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고,
치료는
병을 이겨내는 것이지만,
치유는
인간전체를 포용한다.
우리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데 있다.
이것이 치유의 궁극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고요가
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초월의 궁극의 결과다.
그러면
더이상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신체적인 몸 이상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몸을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우리의 일부분으로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암치유는
자신이 신체적인 몸 이상의 존재이며
내면의 치유자를 불러내
이제까지 제시한 의식의 기법들을 활용할 힘이
자신의 의식속에 있음을
깨닫는데 달려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다.
"나는 치유를 허용할 수 있는가?"
"이 병이 치유될 수 있을까?"
" 내 안에서 치유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치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몇년 동안 나는 재발성 중증 게실염으로 고통받은 적이 있다. 그때 결국은 병원에 입원해서 응급수혈을 받아야만 했다. 병원에 마지막으로 입원했을때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일반적인 원칙들을 지킨 덕분에 병이 호전되었다. 그 후로 몇년간은 재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에 중요한 일이 터지면서 갑자기 병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증세가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했다. 숨막히는 통증에 경련과 출혈 등 온갖 증상들이 더욱 강도높게 다시 나타났다.
"나는
이런 증상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뭐지?
왜 그런 걸까?"라고 자문하면서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법 하나가 떠올랐고
이 기법을 통해
다시 뒤를 더듬고 더듬어서
이 특정한 질병속에 숨어있는
정확한 의미를 찾아냈다.
내속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내 속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부정적인 감정들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대부분은
치유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따르기만 해도
병으로부터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주어진 병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메시지
혹은 가르침을 얻는다.
병이 호전되고
무언가 계속 남아서
병이 재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발의 이유는
우리가 놓쳐버린
특정한 메시지가 숨어 있으며
우리에게 아직 더 배울 것,
카르마의 패턴이 낳은 결과가 있음을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는
삶의 주요한 난관들이
중요한 변화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배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몸은
덧없는 것이지만
영혼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욱 깊은 자각에 이른다.
회복을
획득으로 보는 시각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말이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흔히
회복에 대한 희망이
영적인 성장과정의
기폭제가 되기 때문이다.
질병이
영적인 성장의 동기를 부여해줄 때
영적인 성장은
흔히 두려움의 단계부터 시작되어
분노와 죄책감,
후회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순응과 수용으로 인해
이런 감정들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영적인 성장자체를
가치있게 여기게 된다.
그러다 드디어
더욱 깊이 순응하는 시기가 오면
병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회복을 신에게 맡긴다.
이런 단계에서
카르마의 본질도 이해하고
자각하게 된다.
카르마의 본질은 그 자체로 아주 미묘한 연구과제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카르마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입증 가능한 실제일까?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때
카르마는
개인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영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전체를 가리킨다.
또 전체적인 영향과
유전적 성향,
물려받은 인간성 자체의
맥락적 의미도 나타낸다.
의식에 대한 연구결과
생명자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것에서
순전한 에너지 형태로 변화할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부정적인 카르마를
확실하게 해체하고
긍정적인 카르마를 획득하여 얻는 이득을 통해
한계를 초월하는
귀중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성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지를
깊이 놓아버리면
종국에는 신체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져버린다.
우리 안의
암에 대한 축복을 건네고
"나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인식을 확장시킬 기회를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나중에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들것이다.
실제로 암에서 회복된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제 생에서
그 병을 앓은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암은 제게는 영적인 자각의 도약대가 돼주었거든요"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혜택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부정을 무너뜨려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지한 영적 작업을 시작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을 거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정신을 빼았겨
내면의 탐구를 시작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깨달음의 알아차림의 기회를 주신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 부처님,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럼 자기치유를 불러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의식적인 죄책감이다. 자신이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밝혀내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러려면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할때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우리 안의 암에 대한 축복을 건네고 "나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인식을 확장시킬 기회를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나중에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들것이다. 실제로 암에서 회복된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제 생에서 그 병을 앓은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암은 제게는 영적인 자각의 도약대가 돼주었거든요"
치유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 몸과 마음, 영혼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치유법은 꼭 기존의 현대의학이나 대체요법만을 고집하지 말고 두 방법을 모두 포용해야 한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인간의 타고난 한계를 적절히 고려하면서 몸과 마음, 영혼의 측면들을 포함한 더욱 포괄적인 차원에서 병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환자들 가운데 이 만성적이고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 대부분 담당의사와 의로진들이 가망없다고 포기한 환자들이었던 이들은 전부 포괄적인 차원에서 병을 다루었다. 그들이 속해있는 진정한 실재의 포괄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영혼이라 불리는 인식의 영역을 파고들어간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혜택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부정을 무너뜨려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지한 영적 작업을 시작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을 거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정신을 빼았겨 내면의 탐구를 시작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