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남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운동
 이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양정의숙에 재학 중이던 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여 빈궁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급하고, 동·하기 방학 기간에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벌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1908년 영남지방의 유지들과 교남교육회(橋南敎育會)를 조직하여
잡지 발행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교육재원의 확보에 힘썼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7년에는 동래(東萊) 구포(龜浦)에 구명(龜明)학교와 의령에 의신(宜新)학교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자신의 향리인 입산리에 창남(刱南)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을
실시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책략은 나날이 극악해져 갔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고종)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경운궁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하여 당시 반일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케 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케
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분담케 하는 소위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하였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 받는 형식을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강제하였다.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
 이와 같이 선생은 일제의 한국 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10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선생을 비롯하여 서상일·김동삼 등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한 대동청년당은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김구 등 서북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와 연계를 갖고 항일 민족의식을 결집하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선생은 2대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였지만 곧 이어 조국이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자,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봄 선생은 일본에 견학 간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경의 관심을 돌려놓고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안창호·
이갑·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조국 광복의 방략을 논의한 뒤, 모스크바로 가 체류하면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기지로
자리잡고 있던 만주로 나와 독립군 단체들을 역방하던 중,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선생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이를 이용하여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 한 때문이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이 유기적인 정보 연락망을 갖추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조직망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1914년 9월 청진을 거쳐 해로로 부산에
도착한 뒤, 즉시 그 같은 계획의 실행작업에 착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