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세간(世間)에 많이 회자(膾炙)되는 말들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머뭇거림” “판단유보” “헷갈림”등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동층은 “결정 장애” 내지는 “모호한 입장”을, 손에 흙을 묻히고 싶지 않은 점잖은 지식인들은 “양비론”으로, 열정적 지지층은 “극단적 선동 행태”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때론 옳고 그름의 문제를 좌우이념 갈등으로 환원 축소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와 종교가 혼재(混在)할 더욱 그러합니다. 구약 성서에도 여러 실례(實例)가 있지만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 850명과 야웨 예언자 엘리야 1인과의 대결 장면입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종교인들 간의 갈등이 아닙니다. 정치와 종교가 어우러진 국가적 권력투쟁 형태이기도 합니다. 결국 폭력적 아합 정권에 부역한 바알종교 예언자들과 정의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 간의 대결이었던 셈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아합의 뒷배가 그의 아내이면 무속종교 바알교의 적극적 후원자겸 옹호자인 이세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의 전후는 이렇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에는 기근과 가뭄이 매우 심했습니다.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가축들과 사람들은 양식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러한 문제의 책임소재가 엘리야에게 있다고 다그쳤습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아합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최종적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누가 이 문제의 배심원들이란 말입니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배심원이 되게 합시다. 그들로 결정하게 합시다. 먼저 온(全) 이스라엘을 갈멜 산에 소집하여 나와 만나게 해주시오! 이세벨이 주는 양식으로 먹고사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을 소집하시오.”
그러자 아합이 온 이스라엘에 영을 내리고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들자 엘리야가 그들에게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만일 야웨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알과 야웨를 함께 섬겨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둘 다 함께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혼합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준엄한 택일(擇一) 요구는 백성들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들은 택일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야웨와 바알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엘리야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획기적이고 혁신적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은 한 주인을 사랑하면 다른 주인은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주인에게 충성하면 다른 주인은 무시해야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너희는 야웨와 바알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너희는 두 가지 인생,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 수 없다. 하나는 야웨께 복종하는 삶, 다른 하나는 바알에게 바치는 상반된 두 가지의 삶을 동시에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엘리야는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언제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망설일 것인가? 언제까지 한쪽 다리는 이곳에, 다른 한 쪽은 저쪽에 걸칠 것인가? 언제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왔다리갔다리를 것인가? 언제까지 형세를 관망만 하고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판단을 유보할 것인가?”
이러한 날카로운 질문들은 예언자적 비수(匕首, dagger)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 언제 비수가 된다는 말입니까? 성서적 신앙이 변질되어 편협적이 될 때, 성서적 신앙이 변질되어 세속화 될 때, 성서적 신앙이 변질되어 교단적이 될 때, 성서적 신앙이 변질되어 문화에 종속되어 갈 때, 성서적 신앙이 변질되어 독선적이 되어 갈 때입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은 딜레마 앞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할 것입니까?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만일 야웨가 하나님이면 야웨를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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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재물을 숭상하는 바알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적지 않게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명색이 기독교 목사이며 설교자이지만 그들은 실제로 바알교, 즉 풍산(豐産)종교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내뱉는 바알교단 목사들입니다. 바알교적 영성을 가진 목사와 설교자들과 예언자적 영성을 가진 참 목사와 설교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머뭇거리는 군중(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