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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寶林寺) 전남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 061-864-2055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홈페이지 : http://www.borimsa.org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천왕문·영각(影閣)·요사채 등이 있다. 사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었다. 현재 사천왕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보림사동부도(寶林寺東浮屠), 보물 제156호인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7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8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남쪽 석탑이 높이 5.4m, 북쪽 석탑이 5.9m이며, 석등은 높이 3m로서 이들은 모두 870년(경문왕 10)에 건립되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858년(헌안왕 2)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조성한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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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3일 대구불교대학총동문회 53선지식에서 장흥 보림사 참배를 하였다. 53선지식 사찰순례 3돌 기념(159차)으로 치뤄지는 행사였다.
보림사(寶林寺)에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중 최초로 개창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종찰(宗刹)답게 여러 가지의 성보문화재들이 경내에 현존한다. 그 중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2건 4점과 , 보물 8건 13점이 있고, 전라남도지정 유형문화재가 13건 202점이나 된다. 그 외에도 다수의 비지정 성보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그야말로 사찰의 이름답게 보물[寶]들이 숲[林]을 이루고 있는 가람[寺]이다.
보림사 동부도전
버스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일주문이 보이고, 주차장에서 동편으로 이동을 하면 동부도가 있는 부도전이다. 동부도전은 버스가 보림사 주차장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위치를 파악(일반적으로 부도전은 일주문 밖에 있기 때문에 사찰을 참배할 때면 사찰이 거의 왔다 싶을 때는 습관적으로 창 밖을 살피게 된다) 해 두었기 때문에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서부도는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하여 아쉽다.
보림사 동부도(寶林寺 東浮屠, 보물 제 155호)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높이 3.6m.
동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 속에 있는 여러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각 부분이 8각으로 깎여져 있다.
이 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속에 있는 여러 부도 중의 하나로,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부도의 형식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기본을 따랐으며 지대석(地臺石)도 8각으로 매우 넓다.
하대석(下臺石)은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운데 매우 평평하며 큼직한 8엽의 복련(覆蓮)이 덮여 있고, 모서리의 연판(蓮瓣)에 귀꽃이 있다. 복련 밑에는 높직한 면을 돌리고 8각의 면마다 안상(眼象)을 1구씩 조각하였다. 이 안상의 끝머리 좌우에서 안으로 뻗은 두 개씩의 뿔은 매우 날카로워 일반적인 형태와는 다른 것이 특징이다.
중대석(中臺石)은 가늘고 낮은 8각 돌기둥으로 표면에는 조식(彫飾)이 없다. 상대석(上臺石)은 하대석과 같이 반구형에 가까운데 귀꽃이 없을 뿐 큼직한 8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다. 밑에는 낮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높은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 역시 8각의 석주형인데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 문호형(門戶形)과 자물쇠형이 얕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의 다른 부재들에 비하여 좁고 낮은 편으로 아랫면에는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으로 넓은 낙수홈이 패여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박하고 옥개석 윗면에는 여덟 줄의 굵고 높은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 조식되었다. 상륜부(相輪部)의 옥개 꼭대기에는 간석(竿石)이 놓였고, 그 위에 추녀의 모퉁이가 약간 위를 향한 보개(寶蓋)가 놓였는데 우동 끝에 귀꽃이 표현되었다.
보개 위에는 보륜(寶輪)이 있고 바깥쪽으로 굽은 이중연판 위에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이 부도는 조각기법이 세련되었으나 밋밋하고 가냘퍼 입체감이 결여되었고 조형에 있어서도 중대석이 작고 좁아 불안한 감을 준다.
또한 각 부재의 너비도 좁아져서 더욱 이러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형식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 서부도(寶林寺 西浮屠, 보물 제 156호)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2기. 높이 3m.
보림사 경내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2기의 부도가 함께 나란히 서 있는데 모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기본형태는 같으나 장식수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중 서부도에는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변형된 이색적인 8엽복련석(八葉覆蓮石)이 놓였는데,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많이 사용되던 여의두문(如意頭文)과 비슷하다. 복련 밑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1단의 각형(角形) 몰딩(moulding)이 있다.
중대석(中臺石)은 8각 모서리에 연주형(連珠形)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새겨졌고 각 면에는 원형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上臺石)에는 단판8엽(單瓣八葉)의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는데, 판내에는 타원형의 윤곽 속에 네 개의 꽃모양이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8각으로 된 탑신(塔身)에는 우각(隅角)의 표시가 없고 앞면 한 면에는 호형(弧形)과 자물쇠, 그 밑에 두 개의 문고리가 각각 모각되었다.
옥개석(屋蓋石)은 좁으며 8각으로 되었고 아랫면에 1단의 받침이 있을 뿐 다른 조식은 없고 추녀 밑은 직선이다.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을 따라 내려와 전각(轉角)에서 반전(反轉)이 있을 뿐 귀꽃은 없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낮은 편구형(扁球形)의 복발(覆鉢)과, 연잎과 앙련에 싸인 작은 보주(寶珠)가 포개져 있다. 형태는 아름다우나 조각수법이 가냘프고 지나친 장식성이 눈에 띈다.
동부도에서는 하대석 가장자리에 연판이 붙은 평판적인 귀꽃이 있고 밑에는 얕은 면을 돌려 8각 각 면에 안상 2좌씩을 두었다. 또한 탑신 1면에는 문호형과 자물쇠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의 추녀에는 1단의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는데 대부분 파손되어서 원상태를 알 수 없다. 상륜부 역시 일부 손상되었으나 대체로 완존한 편으로 반전이 심한 보개(寶蓋)와 보륜(寶輪)·보주가 있다.
이 2기의 부도는 상륜부까지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1941년 사리장치(舍利裝置)의 도굴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것을 1944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나 손상은 없다. 단정한 비례와 규칙성 있는 결구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보림사는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일주문이다. 일주문 정면에서 사진을 찍으니 일주문 천왕문 석탑 대적광전이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는다. 하여 일주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두 걸음 옮겨보니 그렇게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보림사 일주문
일주문에는 편액이 두 군데 걸려 있다. 바깥쪽에는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라는 편액이 안쪽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보림사 일주문(一周門) - 『절 이름 보림(寶林)은 글자 그대로 보배로 이루어진 숲을 말한다. 보림사는 선종(禪宗)의 보배라는 의미로 헌강왕이 직접 이름을 지어서 내려 보냈다. 중국 광동성 소주부에 위치한 육조 혜능대사가 지은 절 이름이 보림사이다.
아마 한국의 보림사는 바로 혜능의 선맥(禪脈)을 이은 한국의 혜능, 보조 체징선사(804-880)를 기리는 의미였을 것이다. 현재 기록상 보림사 장생표주(일주문과 같이 사찰의 경계를 설정하는 석표로서, 759년 신라의 경덕왕이 보림사의 장생표주를 세우게 했다)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를 통해 구산선문 이전에도 사격(寺格)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보림사 일주문은 한국 선종의 첫 문이며 한국불교를 발전시킨 조계종을 열었던 첫 문이다.
이런 보림사의 일주문은 사천왕문과 함께 6.25전쟁에도 살아남아 한국 선종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는 조계문(曹溪門)이라 하였는데 어느 시기부터인지 해탈문(解脫門), 외호문(外護門)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일주문 안쪽의 편액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 역시 보림사가 보조 체징선사로부터 구산선문(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을 산골짜기에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을 표방하는 선찰(禪刹)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현판 끝부분에 세로글씨로 작게 ‘순치14년 8월 일 예조 수어청 양사첩액 옹정4년 3월 일 시행(順治 十四年 八月 日 禮曹 守禦廳 兩司帖額 擁正 四年 三月 日 施行)’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1657년에 국가 수호사찰이 제액(題額)을 내렸고, 1726년에 시행한다는 내용이다.
들어가는 앞면에는 ‘가지산 보림사(迦智산山 寶林寺)’ 현판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는 사찰의 있는 곳의 산 이름을 사용하는데 보림사는 가지산과 함께 쓰였다. 가지산의 ‘가(迦)’는 ‘kya'로 범어 ’sakyamuni' 석가모니에서 따왔다. '지(智)'는 범어 ‘jnana'로 한자로 야나(若那)’, 사나(闍那)‘로 음역하며 그 뜻은 일체의 도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잘 결정하고 판별하여 마침내 번뇌를 끊는 주요 원인이 되는 정신 작용이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지혜를 말한다. ’가지산‘이란 결국 부처님의 지혜로 이루어진 스님들이 사는 곳(山門)이다. 일주문에 붙어 있는 현판 하나도 참으로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보림사 일주문은 <장흥부 가지산 보림사 중창기>에 보면 1685년에 정문과 종각을 중창하고, 1686년에 당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전에 일주문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주문 천장을 뚫고 나온 한 마리 용은 선종대가람 보림사를 지키려는 듯 편액을 향해 있고 그 아래 창방에 ‘외호문’이라는 작은 현판과 잘 어울려 국가 수호사찰의 면모를 보여 준다.
보림사 일주문은 주 기둥이 잘 보이질 않는다. 물론 주 기둥을 통해 지붕의 하중을 제일 많이 받고 있지만 언뜻 보면 자연석 위에 올린 보조기둥 네 개가 창방과 평방을 받치고 있어 하나의 집처럼 느껴진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로 올라간 기둥에 비해 커다란 다포의 홑처마 팔작지붕은 무척 화려하다.
주 기둥과 보조기중 사이에는 편액을 설치하지 않아 일주문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두 개의 주 기둥 안쪽 창방 뺄목에는 서로 마주보게 청룡, 황룡을 조각하여 사찰 수호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다섯 분의 부처님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이채롭다. 뒷면 위쪽 판벽을 궁륭형(宮窿形)으로 둥글게 처리하여 멋을 부렸다.
보림사 일주문은 금당인 대적광전과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일주문에서는 대정광전이 보이도록 해 시원한 느낌이다. 또한 자연석을 허튼쌓기를 한 낮은 돌담장은 일주문과 거리를 두어 시야를 트이게 함으로써 일주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담장과도 잘 어울리게 하였다.』
보림사 일주문 내용 『 』은
불교문화학자 권중서님의 <사찰의 문과 다리>에서 퍼옴.
<가지산 보림사>에서 가지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차별없는 지혜를 말한다. 보림의 원뜻은 보배가 가득한 숲이라는 뜻인데, 위 가지의 설명과 같이 이러한 본래 지혜를 믿고 깨달아 잘 보호해서 모든 중생들에게 걸림없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행을 말한다고 한다.
최완수님의 <명찰순례>에는 '선종대가람' 편액 밑에 '외호문'이라는 편액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혹시 외호문이라는 편액이 있었고 사진을 찍으신 분이 계시면 저에게 보내주시길 부탁합니다. )
보림사 사천문
보림사 사천문(四天門) - 정면 3칸, 측면 2칸 집으로 문 안 좌우에 보물로 지정된 대형 목조사천왕상 4구와 금강역사상 2구(지방문화재 제 85호)가 모셔져 있다.
사천왕문 내 금강역사
보림사 사천문에는 좌우에 금강역사 1구씩이 봉안되어 있는데 훔금강역사와 아금강역사의 구분이 애매하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왼쪽에 밀적금강, 오른쪽에 나라연금강을 봉안한다.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나라연금강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고도 한다.
보림사 사천왕상
보림사 목조사천왕상(보물 제 1254호) - 높이 293 cm , 금강역사상 높이 250 cm.
일반적으로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지물 비파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지물 보검 ),서방 광목천왕( 西方 廣目天王-지물 용과 여의주 ), 북방 다문천왕( 北方 多聞天王 - 보탑 )이다.
참고, 불교입분 (대한불고조계종 포교원)
천왕문 앞에 붙여놓은 안내문에는 지국천왕이 보검을 증장천왕이 비파를 들고 있다고 써 놓았는데 이는 오류인 것 같다. 실지로는 동방 지국천왕이 비파를, 남방 증장천왕이 보금을, 서방 광목천왕이 짧은 칼을, 북방 다문천왕이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배치는 동남서북의 전통적 방식을 택했다.
사천왕상이 모셔저 있는 사천문(四天門)에 걸려져 있던, 1780년에 지어진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의 내용에 따르면 이 네 분의 사천왕상은 정덕 을해년(正德 乙亥年: 조선 중종 10년, 서기 1515년)에 계문(戒門)스님의 주도 하에 조성되었으므로, 국내에 현존하는 사천왕상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상으로는 유일한(임진왜란의 전란중에 국내 유수 사찰들의 사천왕상이 모두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더욱이나, 1971년도에 전적류 등을 포함한 많은 양의 복장물들이 다량 발견되었으나 아쉽게도 복장물들의 목록은 물론이고 그 행방도 묘연한 상태이므로, 크나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1995년도에 퇴색되고 부식된 사천왕상들을 보수, 보존처리를 하기 위하여 정밀지표조사를 하던 중에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부분의 안쪽 공간에서 총349책의 고전적류가 발견되었다.
그 많은 전적류 중에서 "월인석보 권제25","금강경 삼가권제1",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권제9,권제10"은 국가지정 보물로 되었고, 201책은 전라남도 지정 유형문화재가 되었으니, 참으로 희유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조성된 불상 등을 포함한 일체의 불교 조각상 중에서 이렇게 몸통의 복장구(腹藏口)이외의 팔과 다리부분에서 복장물이 발견된 경우는 보림사 사천왕상이 최초이자, 유일한 예이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이 사천왕 발밑의 생령좌를 자세히 살펴보자. 『상당히 특이한 모습이다. 사천왕의 다리를 들고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삐죽 나온 송곳니에 무쇠팔 근육을 자랑하며 가볍게 사천왕의 다리를 들었다.
이렇듯 사천왕 발밑에서 별의별 형상의 생령좌를 만날 수 있으니 이 도한 우리 조상들이 표현하고자 한 다양하고 특별한 해학이 아니겠는가...』
『 』는 권중서님의 <불교미술의 해학>에서 발췌함.
생령좌
대개의 경우 각 사천왕 발 밑에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표정의 생령좌가 있는데 보림사 사천왕문에는 특이하게도 이 생령좌 1구만 존재한다. 그리고 발밑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 밑에서 오히려 사천왕의 다리를 받들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보림사 종무소
종무소가 있는 당우에는 "청정인월림궁(淸淨印月林宮)"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청정인월>은 '맑은 못에 달 그림자 뚜렷하듯 마음에 진리를 새기고 살아가라'라는 뜻이고
<림궁>은 림(琳)은 아름다운 옥 림자로 '아름다운 궁궐' 절을 고상하게 칭하는 단어라고 한다.
보림사 성보박물관 ( 박물관 내부 사진은 윤상철선배님이 쓴 글 보림사 one http://cafe.daum.net/kyung386/ILxK/515 을 참조하세요.)
박물관에 나와 있는 사진 내용을 옮겨 봅니다.( 사진은 위를 참조하세요 )
보림사 창건설화 -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에 있는 보림사를 거쳐 중국 보림사에서 참선 하던 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서기가 어린 곳을 찾아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피다가 가지산에 머물러 암자를 지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참선을 하는데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물으니, "방장산 제일봉에 사는 천왕의 딸 성모천왕 선아입니다. 저도 터가 좋아 여기에 온 지 여러 해 되었으나 연못에 아홉 마리 용이 판을 치고 있으므로 스님도 살기가 힘드실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력을 가진 스님께서 용을 쫓고 이 곳에 절을 짓되, 제가 살 수 있는 조그만한 거처를 마련해 주십시오." 하고 호소했다.
원표스님은 이 말을 듣고 연못에 부적을 던져 용을 내쫓았으나 다른 용은 다 나가는데 백룡이 홀로 끈질기게 버티었다. 원표 스님이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마침내 백룡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못에서 나와 산기슭을 갈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용의 꼬리에 맞아 팬 자리가 용문소가 되었다.
원표스님은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너무 크지도 않고 질박하지도 않게 절을 지어 가지산 보림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그리고 선아의 원에 따라 따로 집을지어 가람 옹호신으로 삼고 이 집을 '괴화당'이라 이름지었다. 당초 있었던 연못의 물줄기 하나를 남겨 작은 돌을 쌓아 구덩이를 만들었더니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여서 덮개돌을 만들어 비밀스럽게 했다.
이 이야기는 1457-1464년에 기록한 <보림사 사적기>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통일신라의 불교미술 - 통일신라는 삼국시대의 미술을 종합하여 세련되고 풍요로운 미를 발전시켰으며, 우리나라 미술의 황금기를 이루었고,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무르익은 기교의 산물이었다.
특이 이 시대의 미술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서도 실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이상적인 미의 세계와 통일된 조화의 세계를 창조하려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은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석굴암은 그 안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 나한한, 인왕상 등을 배치하여 불교 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치밀한 구성을 밑받침으로 한 정제미는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이나 조각 또는 과학기술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넓게 트인 동핼ㄹ 내다보고 세워졌는데, 목조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석조물과 기단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라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삼층석탑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걸작이다.
구산선문 - 9산선문이란 신라 말엽부터 고려 초까지 중국 달마 대사의 선법을 이어받아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 일명 구산이라고도 한다.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禪敎)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이다.
당시 선사(禪師)들은 선교 간 상호위치를 정립하는데 대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산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스승이나 시간 위주로 자칫 보수적으로 경생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즉 자신에게 달려 있을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의 활약, 이 두 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었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스님들이 계속 배출된 것은 역시 9산선문밖에 찾아볼 수 없다.
구산선문은 다음과 같다
(1) 도의국사가 장흥 보림사에서 개산한 가지산문
(2) 홍척국사가 남원 실상사에서 개산한 실상산문
(3) 범일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개산한 사굴산문
(4) 혜철국사가 곡성 태안사에서 개산한 동리산문
(5) 무염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개산한 성주산문
6) 도윤국사가 능주 쌍봉사에서 개산한 사자산문
(7) 도헌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개산한 희양산문
(8) 현욱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개산한 봉림산문
(9) 이엄국사가 해주 수미산 광조사에서 932년(고려 태조 15) 개산한 수미산문 등을 말한다.
장흥 보림사에는 국보 2점, 보물 8점, 도유형문화재 13점 등이 있다 이 중 중요한 몇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월인석보 <권 제 25>
(보물 제 745-9 호 . 22.5 x 18.2cm) - 보림사 사천문(四天門) 안에 모셔저 있는 사천왕상의 복장물(腹藏物)로 있다가 1995년에 발견된 전적이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석가여래의 일대기와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한글로 적은 것으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합본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6년에 소헌왕후(1395 ~ 1446. 세종의 왕비이자 수양대군의 생모)가 죽자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세종(1397 ~ 1450, 재위 1418 ~ 1450)의 명에 따라 석가여래의 일대기[釋譜] 가운데 중요한 내용은 상세히 다루고[詳], 나머지는 생략하여[節] 1446년(세종28)에 편찬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을 보고 그 내용에 맞추어 세종자신이 몸소 부처님의 공덕을 읊은 것으로 1447년(세종29)에 간행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훗날에 세조(1417 ~ 1468 , 재위 1455 ~ 1468)가 된 뒤 1457년(세조3년)에 왕세자인 의경세자가 죽자, 부왕인 세종임금과 왕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앞 두 글자씩을 따고, 두 책의 내용을 합쳐서 1459년(세조 5 년)에 정음청(正音廳)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월인석보 권제 25"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권제 23이 현존하는 마지막 권이었으나,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처음으로 권제25가 발견되어서 학술적 가치가 더욱 크다.
금강경 삼가해<권 제 1>
(보물 제 772-3 호 . 39.3 x 25.7 cm) - 정식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으로서, 인도출신의 고승인 구마라습(鳩摩羅什 343 ~ 413)스님이 한문으로 번역한 "금강경"의 본문과 중국 송(宋)나라의 고승인 야보 도천(冶父 道川)스님과 예장 종경(豫章 宗鏡)스님, 그리고 조선초기의 고승인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 ~ 1433)스님 등 3인의 해설 "삼가해(三家解)"를 한글로 옮겨 1482년(성종13)에 궁중의 내수사(內需司)에서 금강경 본문은 "정축대자(丁丑大字)"로, 해설 부분은 "을해중자(乙亥中字)와 한글 소활자등을 사용하여 금속 인쇄한 책으로서, 보통 "금강경 삼가해"라고 한다.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1995년에 복장물로서 발견된 것인데, 보림사본은 전5권5책 가운데에 권 1의 1책(총 58장)으로서, 앞뒤의 표지만 유실되었을 뿐 본문의 내용은 완전하다.
동일한 판본(板本)이 보물 제772호와 보물 제773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한 가치의 전적이다.
상교정본 자비도량 참법 <권 제 9, 권 제 10 >
(보물 제 1252호,33.5 x 18.5 cm) - "참법(懺法)"은 지극정성으로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금생에 지은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시키는 불교 수행의 하나이다.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은 원래 중국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당시의 고승들이 엮은 책이다.
그 후 원(元)나라 때 이를 다시 상교 심정(詳校 審訂)해 10권짜리 책으로 묶었는데,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1995년에 발견된 것은 바로 이 "상교정본 자비도량 참법"전 10권 가운데 마지막부분인 권제 9와 권제 10이다.
이 판본은 본래 1447년[정통(正統)12년 , 세종29년 ]대덕공주 명빈 김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판각되었던 판본을 궁중 안에 보관해 오다가 1462년(세조8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재차 간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간행에 관한 사실이 확실히 밝혀져 있는 점과 , 지금까지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판본이 총 25종으로 알려졌으나, 새로이 궁중판 중수본 1종을 추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박물관 자료를 토대로 공부하는 김에 좀 더 하기로 합니다.
불상의 기원 - 불상이 출현한 시기는 대개 석가 입멸 후 500년(기원전후) 무렵이다. 이전까지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부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처는 정신적으로 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 이 시기를 일컬어 무불상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인도 불교도들이 부처를 기억하고 예배했던 대상은 부처의 몸을 다비해서 얻은 사리(舍利, sarira)였으며 이 사리를 모시기 위한 탑은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바로 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예배했던 인도에서의 탑이 우리나라에서 불교 전래 이후 전 시기를 통해 많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석탑(石塔)의 연원이 된다.
다음으로 예배 대상이었던 것은 금강보좌(金剛寶座)와 보리수(菩提樹) 그리고 보륜(寶輪)과 불족적(佛足跡) 등이 있다. 이러산 상징적인 표현은 불교 이전부터 있어왔다. 불교 이전의 고전적이고 성스러운 표상들로서 이 표상들이 불교 도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불상의 정의 - 부처(佛陀, Buddha), 즉 깨달은 자(覺者)를 조형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상을 말한다. 불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불교 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 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조각상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로는 부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상은 물론 보살상, 천왕상, 명왕상, 나한상 등을 모두 포함한다.
불상의 간다라 양식 - 간다라 지방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 불상의 제작 역시 신(神)을 조각하던 그리스의 정통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풍의 자연주의, 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은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불상이 등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지역을 지배하던 쿠샨 왕조가 대승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특히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은 대승불교와 간다라 양식을 발전시키고 동북아시아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불상의 마투라 양식 - 간다라 양식보다 늦게 인도의 중북부인 마투라 지방에서 인도 고유 전통을 기반으로 출현했다. 교통의 요충지이자 종교도시로 유명한 이 지역은 불교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곳이며, 힌두교계에게는 크리슈나신의 탄생지로서도 숭배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을 가지고 만든 마투라 양식의 불상은 상징적이고 엄격함이 강조되어 인도적인 예배 대상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우리나라의 철불 - 불상은 만든는 재료에 다라 금동불, 석불, 철불, 목불, 소조불 등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철을 재료로 만들 불상을 철불(鐵佛)이라 한다. 철불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부터이며 고려 초기에는 크게 유행했다.
불교의 예배 존상(尊像)을 금동과 같은 값비싼 재료로 만들지 않고 농기구나 무기의 재료이던 철을 이용한 것은, 철불을 만들어 모시고자 한 사람들이 중앙의 귀족이나 상류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방 호족가이거나 평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활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철로 불상을 만들어 모셨는데, 이런 점에서 철불은 불교가 대중화됨에 따라 예배 존상이 서민화 된 것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철불의 분포
01. 실상사 철불 좌상
02. 한천사 철불 좌상
03.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04.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05. 봉암사 철불 좌상 2구(부전)
06. 성주사지 철불 좌상(부전)
07. 전 적조사지 철불 좌상
08.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9
09. 백련사 철불 좌상
10. 사나사 철불 좌상(부전)
11. 광주 철불
12. 만기사 철불 좌상
13. 백운암 철불 좌상
14. 단호사 철불 좌상
15. 대원사 철불 좌상
16.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5
17. 전 보원사지 철불 좌상
18. 장곡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19. 장곡사 철조 약사불 좌상
20. 운장암 보살 좌상
21. 선원사 철불 좌상
22. 대복사 철불 좌상
23. 태안사 약삽ㄹ 좌상(부전)
24. 증심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1)
25. 증심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2)
26. 은적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27.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1
28.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2
29.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3
30.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4
31. 국립중앙박물관 철불 10
32. 법룡사 철불 좌상
33. 삼화사 철불 좌상
34. 남장사 철불 좌상
35. 동화사 철불 좌상
36. 영천 선원동 철불 좌상
이 중 몇 군데를 가려 소개하면
한천사 철조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667호(1980.8.23)
시대구분 : 통일신라시대 후기
소 재 지 : 경북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184
상세설명 : 광배와 대좌가 없어진 높이 153Cm의 철조불상. 통일신라 후기 불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지정번호 : 국보 63호(62.12.20)
시대구분 : 통일신라 경문왕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
상세설명 :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 찾으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어 이곳에 절을 세워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춘궁리 철조석가여래좌상
지정번호 : 국보 332호(63. 1.21)
시대구분 : 고려시대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상세설명 :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사창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철불좌상.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작품.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41호(63.1.21)
시대구분 : 통일신라 후기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실상사
상세설명 : 신라 선종사찰 가운데 초기에 창건된 실상사의 본존불상으로 창건조사인 홍척국사 내지 2대조사인 수철국사아 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를 받아온 부처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노자나불, 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이라는 뜻으로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을 성취하고 연화장 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각각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불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바라본 보림사
사천문을 통과하면 좌측에 성보박물관이 우측에 범종루가 위치하고 있다.
보림사 범종루
누각형태인 범종루에는 불전사물이 모셔져 있고, 범종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보림약수가 있는 수각(水閣)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 44호)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국보 제 44호) -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및 석등. 3기. 석탑의 높이는 남탑 5.4m, 북탑 5.9m, 석등의 높이 3.12m.
현재 보림사 앞뜰의 원위치에 남북으로 대립하여 구조와 규모가 같은 2기의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1기 남아 있다.
1934년 가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자기류(磁器類)·목판(木版)·비단·사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신라시대의 초창 이래 1478·1535·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相輪)을 얹은 신라의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된 지대석(地臺石)으로 놓였는데, 기단의 구성은 상·하층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의 갑석(甲石)이 얇고 부연(副椽 :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기단은 면석(面石)과 갑석을 같은 돌로써 조성하였는데 하단에는 높직한 굽을 돌린 위에 가느다란 1단의 굄을 조출하였으며,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기단의 갑상면에는 아무런 굄대도 없이 평평한 곳에 상층기단을 놓고 있는데, 상층기단 면석 각 면의 양쪽 우주는 정연하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 상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며, 그 중앙에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2단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굄대가 신라 성대의 석탑에서는 다각형이었던 것이 이때 와서는 1단이 원호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한데, 2·3층 탑신석의 양쪽 우주는 초층에 비하여 가냘퍼졌음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같이 보이고, 따라서 네 면의 합각(合閣)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의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탑에는 삼륜(三輪), 북탑에는 오륜(五輪)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로서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그리고 양쪽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오목새김 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2기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하여 하층기단은 협소하다. 탑신부에서 각 탑신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도 가늘며 옥개석 낙수면도 매우 얇고 전각의 반전만이 크기 때문에 가냘픈 느낌을 준다. 또 노반이 크고 상륜도 굵은 편이나 전체의 조각장식은 매우 약화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석등은 전형적인 신라석등으로서,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下臺石) 굄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퉁이를 향한 연판(蓮瓣)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上臺石)은 밑에 3단의 굄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 1석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扁球形)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重瓣蓮華)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대적광전(大寂光殿) _ 보림사 대적광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을 독존으로 모셔놓았다. 보림사의 중심법당이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 117호) -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859년(헌안왕 3년) 작. 높이 273㎝.
지금은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신라 말기인 9세기 불상을 특징짓는 기준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과 비슷한 것이며,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 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된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면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이나 축서사석불좌상(鷲棲寺石佛坐像, 보물 제995호)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될 것이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년)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장사(長沙 : 지금의 長興)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주성한 것이며, 858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곳, 즉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하여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 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대적광전 외벽 벽화에는 염화미소, 달마대사상, 육조혜능대사상, 모래밥 공양, 관음영험, 목탁유래, 도림선사, 무착선사, 부설거사 및 팔상도, 흥미로운 벽화가 몇 점 있다. 다른 사찰에 흔히 볼 수 없는 벽화를 골라 싣기로 한다.
도의선사 귀국상
도의선사귀국상(道義禪師 歸國像) - 해동초조 가지산문 제일조 도의선사 귀국상이다.
육조혜능 법손인 지장선사께
남종선 계맥을 이어받고서
도의선사께서 당나라에서 귀국하시네
그 후에 보림사에 선방을 여니
구산선문 제일도량
바로 여기네
가지산문 이조 염거선사 입정상
迦智山門 二祖 廉居禪師 入定像
도의선사 선법을 전해받고서
설악산 깊은 골에 수행하시네
자신이 깨달아야 묘법전하니
이조의 염거선사
선정에 드네.
가지산문 개산조 체징 보조선사 설법상
迦智山門 開山祖 體澄 普照禪師 說法像
염거의 상수제자 보조선사는
가지산 보림사서
설법을 폈네
그 때에 대중이 팔백인이라
그로부터 이 땅에
선문 열리니
사가라 용왕이
서기 내리네
삼국유사 결집 일연대사
三國遺事 지은 一然大師
가지산문 후예인 일연대사는
투철한 법안으로
과거를 보며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였네
그것이 오늘날 삼국유사라.
구지선사
俱指禪師
구지선사 법거량은 손가락 드네
동자승 그것 보고 따라했더니
구지선사 그 손가락 짤라버렸네
그랬더니 동자승 심안 열렸네
우리도 자기가풍 찾아들 보세.
대적광전 범종
대적광전 범종 - 대적광전에 있던 동종(높이 66.2Cm, 입지름 53.2Cm)은 윗부분의 돌림대(상대)가 없이 그 위치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원형 안에 양각하였다.
종신(종의 몸체) 중앙에는 연곽(蓮廓) 2좌(좌우 각각 연봉 9개)와 보살입상 2구(앞뒤)를 네 곳에 두었으며 연곽과 보살입상 중간의 상단 부분에 해서체의 종서로 '주상삼전하(主上三殿下)'란 명문을 점선으로 음각하였다.
종의 맨 아래에 있는 돌림대(하대)에는 인동당초문을 장식했으면, 그 바로 위에 직경 2.2Cm의 구멍을 뚫어 지금 갈라져 있는 금이 더 내려가지 않도록 했다.
용뉴(龍紐)와 음통(音筒)은 파손되고 없는데, 흔적으로 보아 용뉴는 일반적인 쌍룡이 아니라 단용뉴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완주 송광사 종(1716년)에서 볼 수 있다.
종신 아랫부분에는 명문이 33행으로 121자로 점자 음각되어 있다. 경오(庚午)라는 간지가 확인되는데, 1750년 아니면 1870년으로 추정된다.
용뉴가 단용으로 보이고, 종신에 연곽 2좌와 보살 2구를 배치한 특수한 형태이며, 종의 균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신 아래에 구멍을 뚫어 놓은 점이 특이하여 범종 연구에 좋은 대상이 된다.
현재 보림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제 대웅보전을 참배하러 간다.
보림사 괘불대
대웅보전 앞에 있는 괘불대이다. 이러한 괘불대는 비슷한 크기와 모양으로 대적광전앞에도 있다.
보림사 대웅보전
보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 1951년 3월 11일 오전 8시 공비들의 방화로 전소된 대웅전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현주지 철안(徹眼) 스님이 1982년에 부임해 와 이루어 낸 일이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 팔작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봉안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기법이다.
이후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계셨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이렇게 보림사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걸로 보아 대웅보전이 불타기 전에는 대웅보전이 중심법당이었던 모양이다.
보림사 대웅전에는 삼불 사보살을 보셔 놓은 독특한 형태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연등불, 미륵불이 협시하고 계신다
삼존불 중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삼세불이다.
목경찬님에 의하면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족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저러한 배치가 된 것이다.
(목경찬님의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에서 발췌)
석가모니불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 후불탱은 석가모니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
연등불 좌우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이 협시하고(후불탱은 청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
미륵불 좌우에 보현보살, 지장보살이 협시하는(후불탱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특이한 구조다.
조금 복잡하게 여겨지겠지만 다음의 사진을 보면 명쾌해진다.
좌로부터 차례로
지장보살 미륵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연등불 관세음보살
이와 유사한 형태의 배치는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 하동 쌍계사 대웅전, 계룡산 갑사의 대웅전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이제 대웅보전 벽화를 살펴본다.
보시(布施)
보시(布施)
부처님이 되기 전 과거 인행시
자식들을 낳고서 살았었는데
어느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는
당신의 자식들을 내게 주시요
인욕보살 그 말 듣고 데려가라네.
그 외에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닫는 장면과 심우도 등이 외벽에 장엄되어 있다.
보림사 명부전
보림사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은 대웅보전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셔 놓았다. 그런데 도명존자 발 밑에는 <녹사>를 설명하는 안내문을, 무독귀왕 발 밑에는 <판관>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두었는데, 필경 어떤 보살이 청소를 하면서 잘못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 우측에 명부전이 있고 명부전 우측으로 뒤로 가니 또 다른 영역이 있다.
가지산보림사 사적비(迦智山寶林寺 事跡碑)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 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 158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 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 158호)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높이 3.46m.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舍利塔, 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찍이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 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창원전문대 이덕진교수님이 2009년 7월 19일에 불교저널에 기고한 글에는 가지산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은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년)이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迦智寺)로 이주한 뒤, 김언경 등 신라 중앙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형성된 선종 9산문의 한 파이다.
체징은 웅진(현재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어릴 때 출가해 도의의 법을 전해 받아 스승을 가르침을 펴고 있던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인가를 받은 도의의 손제자다. 그는 837년(희강왕 2)에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뵙고 840년(문성왕 2)에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개산하여 도의를 제1조로 하고 염거를 제2조로 자기를 제3조로 하여서 남종선법(南宗禪法)을 표방하면서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문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開山祖)는 체징이 된다.
체징의 제자 중에 그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逈微)이다. 그는 진성왕 5년(891) 중국에 들어갔다가 효공왕 9년(905)에 귀국하였다. 그는 해동(海東) 4무외사(四無畏士)의 한 사람으로써 고려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개경으로 갔다가 궁예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보림사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까지 이어져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寶林寺 普照禪師塔, 보물 제 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 157호)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4.1m.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의 묘탑으로서 사찰 중심에서 동쪽의 가지산 기슭에 있으며 여기서 40m쯤 떨어진 곳에 탑비가 서 있다.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地臺石) 상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매우 낮은 각형(角形) 1단의 굄을 각출하고 그 위에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하대석(下臺石)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현재는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하단은 각 면에 안상(眼象)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中臺)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돌을 따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측면에 권운문(卷雲文)을 원각(圓刻)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식하였다. 굄돌 상면에는 8각으로 낮은 1단의 각형과 높은 각형 2단의 굄단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는데, 측면의 운문(雲文)이 반전(反轉)되듯 입체적으로 위까지 올려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배가 약간 부른 형태로서 배흘림을 표현하고 있다. 각 면에는 상·하단부에 대칭으로 두 줄의 횡대를 돌리고 각 횡대 사이에는 모서리에 1좌씩, 그리고 그 중간에 1좌씩의 화문(花文)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상하에 괄호형이 있고 좌우에도 중앙에 1단의 굴곡을 둔 방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식의 안상을 평행선으로 이중이 되게 오목새김 하였다. 여기에서처럼 안상이 방형이라든지 삼중으로 안상을 조각한 중대석의 양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안상 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어 간소한 듯하나 각 모서리의 중간에 좌우 측면의 앙련대(仰蓮帶)와 상단의 8각 갑석형(甲石形)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하면에는 8각의 중대석 상면에 맞게 놓이도록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단엽1판(單葉一瓣)씩을 각 모서리에 조각하였는데, 이 판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연엽형(蓮葉形)을 오목새김하고 그 안을 고사리문과 곡선문으로 장식하고 있다.
탑신 굄대는 다른 돌로 높게 조성하여 끼웠으며 8각을 이루었는데, 각 측면에는 조각이 전혀 없으며 중간에 가로로 한 줄의 곡선을 돋을새김하고 상하단은 낮게 갑석형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측면이 수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횡선을 경계로 하여 각기 상하단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중대석의 배흘림의 의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굄대 상면에 굄단이 없이 탑신석을 안치한 것은 상대석 상면과 같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되고 특히 상단부에는 주두(柱頭 : 대접받침)가 모각되어서 목조가구(架構)를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甲胄)가 화려하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하면에 서까래모양을 모각하였는데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출하고 처마 부분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여덟 면의 합각(合角)에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 굵직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추녀는 수평이나 매우 중후하고 막새기와의 표시도 전혀 없는데, 각 모서리에는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우동 끝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조식되었다.
옥개 정상에는 2단의 각형 굄을 조각하여 상륜(相輪)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완형이 아니지만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원형이며 측면에는 여덟 귀퉁이를 표시하기 위한 화문을 조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횡대를 돌렸다. 그리고 이 위에 대의 마디 모양의 간주(竿柱)가 세워지고 그 중간마다 보륜이 놓였는데 각 측면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식하였다.
이 부도의 앞쪽에는 탑비가 남아 있어서 보조선사의 행적 및 당시의 사찰의 대외관계 등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여 볼 때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보조선사탑에서 바라본 보림사
보조선사탑과 탑비 우측에 위치한 선열당 - 내부를 들여다 보니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승탑과 탑비 좌측에 위치한 보림사 선방
보림사 미타전과 조사전
보림사 미타전(彌陀殿)
보림사 미타전(彌陀殿) - 미타전에는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불 독존을 모셨다. 미타전은 대웅전 서편 뒤쪽에 위치하며 조사전과 ‘ㄱ자’ 로 배치되어 있다.
보림사 미타전에 모셔놓은 아미타불
장흥 전 의상암지 석불입상(長興 傳 義湘庵址 石佛立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91호. 높이 184cm, 어깨폭 47.5cm
이 불상은 미타정인(彌陀定印)을 하고 계시는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이시다.
이 부처님은 현재 보림사 경내의 미타전(彌陀殿)에 모셔져 있으나, 원래는 장흥읍 사자산(獅子山)어귀에 있는 의상암(義湘庵)터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1975년에 장흥읍 원도리에 장흥교도소를 지을 때 그 앞으로 옮겼다가,1994년에 보림사로 옮겨 모시게 된 것이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넓고 높은 육계( 부처님 머리위의 상투같이 둥글게 솟은 부분).원만(圓滿)한 상호(相好), 상체(上體)의 섬세한 옷자락 표현과 당당한 어깨선, 그리고 광배(光背) 일부에 남아 있는 불꽃무늬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조사전(祖師殿)
보림사 조사전(祖師殿) - 보림사 조사전은 미타전과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에는 개산조보조선사진영(開山祖普照禪師眞影), 해동초조도의선사진영(海東初祖道義禪師眞影), 이조염거선사진영(二祖廉居禪師眞影), 태고보우대화상진영(太古普愚大和尙)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잠깐 보림사에서 소개하는 보림사 안내를 좀 살펴보기로 한다.
보림사는 신라말 세계인이었던 원표대사가 고가지사를 창건했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사께서는 당나라를 거쳐 인도에 가서 80화엄경을 처음 중국으로 가져와서 복건성 지제산에 화엄사를 창건하고 천관신앙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한편 회창폐불의 법난을 만나서 귀국하고 가지산에 고가지사를 창건하여 화엄사상과 천관 신앙을 전파 하였습니다. 당시 보림사 마당은 연못이었는데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 도량을 좋아하여 머물고 있던 선아라는 지리산 천황의 딸이 용들을 제도해 달라고 청하니 원표대사가 법력으로 제도해주자 이에 선아는 도량 수호신이 되겠다고 발원 하여 매화보살이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고가지사를 바탕으로 하여 선과 화엄이 만난 구산선문의 종찰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신라말에 도의국사는 37년간 당나라에 유학하여 조계 정맥이며 마조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백장선사에게 거듭 조사 심인을 확인받아 중국의 선법이 모두 동국으로 간다라는 칭송을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다가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 하였습니다. 마침내 보조체증선사가 헌안왕의 도움으로 가지산문을 개창하였으니 육조스님의 주석처인 보림사를 이은 조계선종의 종찰이 된 것입니다. 한편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국사를 모시고 있는 역사적인 도량입니다.
또한 보림사는 뒷산에 선사들이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차가 있어 수행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선차일여의 근본 도량입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차는 다성 초의선사가 극찬할 정도로 유명 하였으며 지금은 보림선차 청태전과 선아 발효차, 녹차인 원표차로 복원되어 한국의 선차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7차 세계선차대회 페막식이 열렸던 곳입니다
이 불이문(不李門) 안에는 조그만한 건물이 있는데 섬돌 위에 동국선원이라는 편액이 놓여 있고 그 옆에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선방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보림사 삼성각(三聖閣)
보림사 삼성각(三聖閣) - 보림사 삼성각에는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참고로 보림사 경내배치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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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및 참고 문헌
보림사 홈페이지(http://www.borimsa.org)
불교저널 2009년 7월 19일자 창원전문대 이덕진 교수님 기고문
사찰의 문과 다리(권중서)
명찰순례(최완수)
불교미술의 해학(권중서)
불교입분(관오불교복지대학)
불교입문(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목경찬, 조계종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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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했습니다.
아직도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ㅎ
감사합니다.
보림사 홍보위원?
위촉장을 받지 못했는데, 그만 둘까요?
@56야/준함/박진태 아닙니다.
계속 속행해주세요.
너무 멋지게 잘하셨어요.
짱입니다.
정견은 보배입니다.
@54야 금륜 홍상수 핑계삼아 이 힘든 작업 그만둘려 했더니...
선배님, 그래도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56야/준함/박진태 힘내세요!
피날레를 장식해야죠.
우리 모두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
이제 겨우 완성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오류 등을 가려내는 교정 작업입니다.
이 교정 작업에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동참하여 제대로 된 내용으로 이 장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졸면서 타자를 치다 보니 몇 군데 오타가....1차 교정하였습니다.
'청정인월림궁'을 수정하는 등 일부 수정하여 2차 교정하였습니다.
준함님 후기쓰신다고 수고많으십니다 준함법우님 수고덕분에 여러사람이 보림사 순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수고하셨고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하는 도반이 있어 늘 행복합니다.
"청정인월임궁(淸淨印月林宮)" ==> 종무소가 있는 건물에 걸려 있는 편액인데, 그 뜻을 아시는 분 댓글 부턱합니다.
산과 들에는
온갖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부처
아님이
없듯이
맑고 청아한
숲에 궁전에
달이
만상을
머금었습니다
청정인월림궁(淸淨印月琳宮)
琳 : 아름다울 림
청정 인월은
맑은 못에 그림자 뚜렷하듯 마음에 진리를 새기고 살아가라
림궁은
아름다운 궁궐 즉 절(寺)을 가리킵니다
@54야 금륜 홍상수 감사합니다.
@53(주)/ 적광/ 강지호 감사합니다. 이 의미를 토대로 본문 수정하겠습니다.
@54야 금륜 홍상수 이 시는 청정인월림궁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신 분이 지은 시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사찰순례 다시 상세히 잘 하고 갑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_()_
우리 모두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_()_
함께 하는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늘 감사합니다.
준함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