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2. 어버이및스승의주일예배설교
욥기 32장 1~17절
그리스도인 어른
■ 일반적으로 성인(成人)을 ‘어른’이라 합니다. 옛날에는 결혼을 한 사람을 ‘어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어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사람이나 지위 또는 항렬이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 ‘어른’입니다. 이처럼 ‘어른’이라는 경칭을 사용하는 것은, 예의를 존중하는 유교문화권에서는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절이 달라졌습니다. ‘어른’이라는 경칭은, 어른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경칭으로 남아있을 뿐, 요즘 세대가 이해하거나 인정하는 ‘어른’은 단지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대에게 어른은 자신들의 세대와는 다른 의식과 가치관을 가진 소위 ‘꼰대’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대 간의 이러한 이해 차이는 어느 시대에나 있던 현상입니다. 요즘만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어느 세대든, 세대 간의 갈등은 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갈등이, 역사를 진보시켰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갈등은 부정성이 아닙니다. 긍정성입니다.
그러므로 ‘어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무례함이나 생각 없는 태도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성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오늘 본문은 욥의 친구들 중, 막내인 ‘엘리후’의 발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4절과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내인 엘리후는 연장자들의 말을 아주 긴 시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연장자들은 엘리바스-빌닷-소발, 세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연장자 순으로 욥에게 말 걸기와 훈계, 그리고 논쟁을 하였습니다. 욥과 이 세 연장자의 길고 긴 대화는 2장에서부터 시작해서 31장에 이르렀습니다. 이 길고 긴 대화-논쟁을 엘리후가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쟁을 들을수록 엘리후의 마음은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네 사람, 욥-엘리바스-빌닷-소발의 논쟁은, 결론도 못 내는 소모적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엘리후는 이 네 사람이 연장자이면서 워낙 출중한 지혜자로 인정을 받는 분들이기에 이들의 대화에 나름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도 없고, 결론도 못 내는 이 소모적 논쟁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1~5절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사실 엘리후도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연장자들의 논쟁이 소모적임을 알았고,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자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6~7절입니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엘리후는 연장자, 어른에 대한 올곧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자가 먼저 말하게 하는 것이 예의이고, 연륜이 많은 자가 더 나은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결코 형식적 예의를 차린 이해가 아니었습니다. 바른 예의를 갖춘 바른 이해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연장자, 모든 어른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혜자라도 늘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엘리후는 7~9절을 통해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엘리후는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연장자들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고, 겸손히 어른의 말에 경청하고 예의를 갖춰 발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지혜의 근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8절)
그래서 나이가 많다고 자연히 지혜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연로했다고 당연히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9절)
물론 인생을 산만큼 지혜가 생기고, 연륜만큼 지혜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도 연륜도 하나님 앞에는 그저 티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들어 높이 쓰시고,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혜를 허락하실만한 신앙 태도를 갖춘 자라면, 그의 나이와 연륜에 상관없이 지혜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앞세우고, 연륜을 앞세우는 꼰대 같은 어른 노릇을 안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무시하고, 연륜을 경시하는 태도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를 엘리후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겸손히 어른의 말에 경청하고, 예의를 갖춰 발언을 할 줄 아는 태도는 젊은 사람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로, 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젊은이는 갖춰야 할 예의를 알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어른의 자세이고, 그리스도인 어른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 그래서 오늘은 어버이주일이자 스승의 주일로 지키고 있으니, 오늘의 주제에 비추어 젊은 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 어른들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 젊은 여러분이 이해하는 바와 어른들이 이해하는 바가 달라, 긴장하고 갈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인내하며 경청하다 보면,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괜한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보다는 이득이 더 많을 것입니다. 역사가 늘 그랬습니다.
2. 경청의 인내심과 함께, 발언의 기회를 포착하는 법과 그 타이밍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고어가 된 ‘낄끼빠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구분하라는 옛말의 신조어입니다. 이 말은 처신에 관한 지혜의 말이다 싶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듣지만, 내가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를 잘 잡아야 어른들의 맘을 상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기분 좋게도 할 수 있습니다. 발언의 수위와 상관없이 모두를 경청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선이나 기세를 잡았다고 마냥 그 기를 이어 가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발언을 멈추는 것도 지혜입니다. 낄끼빠빠죠.
엘리후는 이것을 잘했습니다. 10~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그리고 16~17절입니다.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이처럼 엘리후는 경청의 인내심과 함께, 발언의 기회를 포착하는 법과 그 타이밍을 찾는 법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엘리후처럼 이러한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 살다 보면, 못마땅한 일, 보고 싶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잔소리하게 되고 화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기보다는 화를 내지 않을 지혜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웃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은 젊은이에게, 젊은이는 어른에게 말입니다.
바라기는, 비전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전교회 식구들이 이런 분위기를 이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심각할지라도, 유쾌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유머의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화목한 여러분의 삶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