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9 연중 제17주일)
미라클 메이커
일찍이 예수님은 공생활 초기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을 실 때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가엽이 여기시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빵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이렇게 상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빵이 물질을 상징한다고 볼 때,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바라지 않고 더 큰 빵을 바라는 인간의 욕심이 잘 못된 것이지요. 필요 이상의 물질은 되려 인간 영혼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최근 타 본당 골프대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보통 식사 후에 라플 뽑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좀 큰 게 걸렸습니다. 맨날 꽝이거나 된장이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골프백 2개, 선풍기 1대, 식사 초대권 1개 등등. 그런데 여기에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가진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뽑힙니다. 그러나 누구 준다고 생각하면 잘 걸립니다. 사실은 8월초에 공소 야유회가 있는데, 경품 추첨이 있거든요. 공소 신자들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니 그냥 운 좋게 뽑힌 것이지요. 기도발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입니다. 저한테 와서 로또 축복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오늘 오병이어 이야기는 남녀노소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결과만 보지 마시고,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중요한 복음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기적이 일어난 때입니다. 복음은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먼 옛날 모세가 자기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넜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탈출하던 밤에 이스트를 넣지 않는 빵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모세가 되어 당신 백성을 죄의 노예 살이에서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즉, 십자가 희생 제사로 새로운 파스카를 만드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바로 파스카 축제일입니다. 그리고 그 전날 밤 제자들과 빵을 나누시며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지요. 그러니 오늘 빵의 기적은 단순히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실 주님의 파스카, 즉 십자가 희생 제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주실 빵은 한 끼 먹고 나면 사라질 보리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줄 살아 있는 천상의 빵인 것입니다. 곧 성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헎신헌혈의 삶입니다.
한편 이것을 깨닫기 위해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장정만 5천명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을 대하는 태도는 각기 다릅니다. 먼저 필립보의 말을 들어 봅시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필립보는 주님 앞에서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여러분 일당에 2백을 곱해보십시오. 이렇게 큰 돈이 갑자기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그리고 산 중에서 어찌 그 많은 빵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필립보는 불가능하다고 주님께 보고한 것입니다. 제가 성당을 리모델링할 때 혹자는 기대조차 안 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 성당을 어떻게 고쳐? 헌금이 뻔한데...” 두 번 째 인물은 안드레아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안드레아는 믿음이 부족하여 기대하는 하지 않지만 약간의 협조는 합니다. 보잘 것 없는 도시락 하나는 어디서 구해왔으니까요. 우리도 안드레아일 때가 있습니다. “그거 제가 해 봐서 아는데요. 바위에 계란치기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골리앗 같은 현실 앞에서 도전해보지 않고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입니다.
끝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익명의 기부자입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 당시 보리빵은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거무스레하고 겉이 딱딱합니다. 물고기는 불에 구워 먹을 정도로 큰 생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빵에 찍어 먹는 엔초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의 한 끼 도시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익명의 기부자는 고작 도시락 하나를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용할 양식 전부를 바친 것입니다. 자신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기부자를 한 꼬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못하는 것을 어린 아이가 해 냅니다. 기적의 마중물을 그 꼬마가 퍼다 나른 것입니다.
여고에 있을 때, 연말 불우 이웃 돕기를 하는데, 저한테 한 학생이 돼지 저금통을 들고 왔습니다. 그 친구는 필요한 데 다 쓰고 남은 잔전을 저금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아끼고 아껴서 돼지를 배불렸습니다. 그런 어린 친구들의 정성이 모여 누군가의 입가에 미소 짓게 만듭니다.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성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번 감실을 십시일반으로 마련했고, 지금 다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주님의 현존이 모셔져 있는 감실을 바라봅니다.
끝으로 주님은 그 꼬마가 바친 오병이어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도시락이지만 그 어린이의 마음을 보시고 감명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적은 물질과 능력의 기적이 아니라 나눔과 감사의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기적에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만 보고 감사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될 것 같으면 금방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다시 복음을 보십시오. 오늘 기적이 일어나게 한 것은 적지만 전부를 바친 아이의 마음과 양이 적다고 실망하지 않고 감사를 드린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살이를 하면서 절대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가 제게 그러더라고요. 캐나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라고. 신앙은 이것이 다 해결되고 나면 개인 기호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추레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품위가 떨어집니까? 좀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칼질 하면 그 사람 교양이 올라갑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와 인재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수몰되어 죽고, 어떤 사람들은 불에 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재민이 부지기수인데, 국가가 다 해결해 줍니까? 아니면 빌게이츠보다 돈이 많다던 아마존 사장이 다 먹여 살립니까? 부자가 더 인색한 것 아시지요. 가진 것은 넉넉하지 않지만, 선량하고 자비심 많은 시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난민들을 구재합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적은 감사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노력 없는 횡재를 바라지 말고 성실히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쓰고 나서 남은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피와 땀을 오병이어로 만들어 바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기적은 너희들이 일으키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