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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마을 주민 가운데 한 분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디테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안내장을 돌렸습니다. 이름과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서로 통용하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사를 가고 또 새롭게 이사 온 가정도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면서 도우며 살자는 취지일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예전에 없었던 풍경이 하나 생겼습니다. 집 대문을 설치하고 닫아 두는 가정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이 크지 않고 가정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살았는데, 이제는 대문을 달고, 닫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변화되고 있을까요? 낯선 사람의 출입 또 다른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도 초원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녀습니다. 그런 중에도 광야 가운데 돌담을 쌓았습니다. 양떼를 도둑과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는 대문을 대신하여 목자들은 자신의 몸을 문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림처럼 ….
예수님은 이러한 베두인의 관습을 잘 이해하기고서, 자기에게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시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신다고 ….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밝혔습니다.
제자들도 이 구원의 복음을 확실하게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보십시오. 예수님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보호자 되신 예수님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늑대와 여우 심지어는 사자 하고도 싸웠다고 했습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몸을 내던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이사실을알아듣기쉽게말합니다.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들판의 양우리에서 목자는 스스로 양의 문이 될 뿐만 아니라 양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살의 피를 쏟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사단의 세력과 악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문제가운데빠져있는인생들이모여들었을때에말씀으로그들을귀신으로부터온전케해주시고, 병을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8:17에는이러한사실을두고서이사야선지자의예언을이루시는것이라했습니다. 무어라고하느냐하면
“….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
얼마나 감격스럽니까? 우리로 병들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 병을 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모든 질병과 죄의 짐을 친히 짊어졌습니다.
우리 집에는 19마리의 닭이 있습니다. 그 중에 지난 5년 전에 처음으로 입양한 암닭이 있습니다. 올해 알을 품기에 다른 장소로 옮겨서 알을 품게 했더니 한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하여서 키우고 있습니다.
어미 닭은 알을 21일 동안 품어서 병아리를 부화시킵니다. 그러한 동안에는 먹이도 잘 먹지 않습니다. 돌아다니지도 않습니다. 알을 깃털로 안고 품어서 사력을 다해 알을 37도 정도로 따뜻하게 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병아리가 다 성장하기까지 날개 아래에 품고서 체온을 보존해 줍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먹이를 찾아서 병아리를 먹입니다. 위험이 다가오면 병아리를 품고서 방어벽이 되어 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멸망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시기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르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예언했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라고 했습니다.
또 어미가 어찌 젖먹이 아이들 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어미가 젖먹이 아이를 혹 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다고 했습니다(사 49:14-15)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꼬이고 흔들리고 있습니까?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습니까?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 그가 우리의 인생의 문지기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고백적인 찬양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를 인도하셔서 맑은 물가로 쉴 만한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공급자 되신 예수님
저는 낙동강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어릴 적에 소를 어떻게 기르는지를 보았기 압니다. 소를 먹이는 가정은 아침에 소를 강둑에 풀이 많이 자란 곳에 소를 긴 밧줄에 메어서 풀어놓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다시 소를 몰아서 집에 몰고 와서 우리에 넣습니다.
낮 동안에 강둑에서 실컷 꼴을 먹었지만 농부는 우리 안에 있는 소에게 꼴을 줍니다. 낮 동안에 도랑에서 가서 베어 온 좋은 골을 한아름 우리에 넣어주어 배불리 먹게 합니다. 그러면 소는 밤새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마음껏 꼴을 먹습니다.
이와 같은 풍성함에 대하여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세상과 마귀는 도적같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너지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권세를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자기 자신을 다 내어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 피로연에 가보면 샴페인을 터뜨려서 잔에 부을 때에 맨 위의 잔에 콸콸 붓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잔에 채워지고, 그것이 흘러 넘쳐서 세 번째 잔에 넘쳐서 마지막 맨 밑의 잔에도 채워지고 넘치는 것이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영어에 ‘abundance’ 말로 풍성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어서 흘러 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인생에 차고 넘치는 풍성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아주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끊어야 하고, 세상 재미를 못 보는 것으로, 주일날, 골프도 못 치고, 낚시도 못 가는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끊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는 풍성한 꼴을 먹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낙동강 하류가 흐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저녁이면 쌀가게에 가서 쌀 한 봉지, 밀가루 한 봉지를 사서 저녁 밥을 해 먹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 잡혀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누리게 된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로 자존감이 생겼습니다. 매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기쁨, 성도와의 교제, 찬양대 연습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재미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행사를 참여하면서 나에게 숨어있는 은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깨달어 가는 말씀은 삶의 등불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물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의 가치를 인정하며 한 눈 팔지 않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목사의 삶이 고역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곳 뉴질랜드에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목자이신 주님께서 저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신 축복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저만 그렇습니까?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잘나서, 재능이 있어서, 재주가 좋아서 뉴질랜드에까지 와서 살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부어 주신 축복, 은혜입니다.
야곱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사방이 꽉 막히는 절망에 떨어지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고 서는 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앞길이 캄캄하였습니다.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지만 종살이할 생각에 앞이 암담했습니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황량한 광야를 가로질러 가는 가운데 해는 지고 어둠 속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해야 하는 처량하고 외롭고 척박한 밤을 맞이합니다. 이슬을 맞으며 고독한 잠을 청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창 28:12)
사방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늘 문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에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막막하고 황량하여 적박하게 느껴졌던 곳을 벧엘이라 이름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간 것 같은 곳, 자기만 홀로 남아 절망적인 삶의 터를 ‘하나님의 집’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서럽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겠습니까? 어떤 유대인 랍비가 들판을 지나가는데 들판 한 가운데서 사방이 꽉 막힌 울타리 속에 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답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소들이 사방에 막혀 있었지만 소들이 이따금 하늘을 쳐다보면서 “음메 …”하며 울었습니다.
랍비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떼들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사방에 막힌 것 같지만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구나.’
성도 여러분, 동서남북이 꽉 막혀 있습니까? 진퇴양난 가운데 빠졌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막힌 문을 여시는 인생의 열린 문이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으로써 우리의 구원자, 보호자, 공급자이심을 확신하고서 그가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축복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