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65년이 되도록 한국천주교회가 친일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사죄'요구에 끌려다니는 이유는 해방 이후 공간에서 깔끔하게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해방과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 친일인사에 대한 처단 요구가 거셌다. 1946년 12월에 출범한 입법위원들은 1947년 6월 입법위원 선거법을 통해 반민족행위자들의 공민권을 제한했으며, 7월에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으나 미군정이 공포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결국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으나 아승만 대통령과 친일파들의 거센 반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교회는 친일행적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했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교회지도자의 위태로운 침묵
해방 직후 한국 천주교회는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아무런 권위있는 공식적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노기남 주교는 1945년 8월 17일자로 발표된 고유(告諭)를 통해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력 자중"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강인철 교수는 "해방이 교회에게도 큰 기쁨이었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천주교회 역시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었으며, 이제 해방과 더불어 추방 내지 연금당한 선교사들, 징용 징병된 인사들이 되돌아오고, 징발당한 교회시설을 되찼았을 뿐 아니라, 극도로 불편한 신사참배를 더 이상 강요당하지 않고, 교회의 활동에 대한 감시의 눈을 더 이상 염두에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침묵 속에서, 해방 후 거의 한 달이 지나도록 해방 축하를 위한 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강인철 교수는 이러한 자제요구가 "혹시나 교회 내부에서 일제시대의 공과(功過)를 따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탓"으로 추측한다.
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일찌감치 타협했으며, 특히 일제 말기 전시체제에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따라서 교회는 종교적 억압의 피해자로서 친일잔재 청산에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겠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제기할 입장이 아니었으며, 특히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 문제가 불거질 때 혼란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친일파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교회에 우호적인 미군정의 등장은 한국 천주교회에 상당한 안정감과 자신감을 주었다. 결국 한국교회는 미군 진주 이후에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45년 9월 9일에야 '승전과 해방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9월 26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집전하는 "세계평화회복을 감사하는" 장엄미사와 '미군장병 환영식'이 명동성당에서 이어졌다.
당시 일본인 교구장 문제는 단순히 처리되었다. 해방 당시 조선에 남아 있던 광주교구장 와키다 신부는 곧바로 사임하고 골롬반선교회 출신의 임 신부가 교구장을 계승했으며, 대구교구장인 하야사카 주교는 "내 임의로 대구에 온 것이 아닌즉, 대구를 떠나는 것도 내 임의로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태도로 1946년 1월 사망할 때까지 교구장직을 지켰으며, 교회 안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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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수립 후 1948년 한 때, 이승만과 나란히 선 노기남 주교. (사진출처/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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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선 친일논란 없어.. 이례적 현상
노기남 주교 등 한국인 교회 지도자에 대한 친일전력을 둘러싼 시비도 교회 안에서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개신교와 불교, 천도교 등 타종교와 다른 분위기였다. 타종교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친일파 처단의 움직임이 일어나 종권(宗權)구도가 전복되거나 위협받았으며, 심지어 교단이 분열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지극히 이례적이며 예외적인 현상 속에서, 명백한 친일 전력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교회으 주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오히려 노기남 주교는 장면과 상의해 1945년 9월 12일 주한미군 사령관 정치고문 나이스터의 부탁으로 군정 측에 협력할 한국인 지도자 60여 명을 추천했다. 이 명단에는 적극적인 친일파인 윤치호 등이 제외되었지만,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 친일혐의가 짙은 다수 인사가 포함되었다. 또한 노 주교는 친일 지주세력의 정치적 본거지인 한민당에 조종국, 박병래, 장발 등 40여 명의 천주교 인사들을 참여시켰다. 조종국, 박병래 등은 일제강점하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를 역임한 자들이다.
당시 교회는 토지개혁 과정에서 애매한 입장을 보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地主) 교회였다. 1924년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 속한 부동산 가운데 '경작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양천주교재단의 경우에 89%였으며, 원산천주교재단은 87%, 경성(서울)천주교재단은 76%였다. 따라서 교회 재정은 이들 경작지에서 나오는 소작료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교회의 소작지 운영은 1860년대부터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선교에 적용하던 '교민주의(敎民主義)'를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교민주의는, 교회가 대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에게 경작케 하거나 임대해서 소작료나 임대료를 받아 교회경비를 마련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신자나 비신자에게 생계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신자층을 유지확대하는 선교정책이다. 한편 반봉적인 지주-소작제도아래서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본당신부와 평신도의 관계는 지주-소작인 관계로 맺어진다는 점에서 권위적 성직자중심주의로 나아간 이유도 얼마간 해명할 수 있겠다.
북한교회가 1949년까지 종교적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경제적 곤란에 처하게 된 이유 역시 1946년 3월에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 때문이다. 연길과 덕원의 대부분 교회소유 토지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대부분 몰수되었고, 북한교회는 남한교회에 지원을 호소했다. 남한교회는 미군정과 한민당 등의 저지로 토지개혁이 늦추어졌으며, 그마저도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그러나 훗날 박정희 군사정권과 유착했던 대구지역 대표적 평신도였던 이효상은 1951년 봄에 "전쟁기간중 수행된 토지개혁은 반(半)공산'적이며, '사회주의적'이라고 혹평했다.(천주교회보 1951.4.15)
반성과 사죄 없이.. 친일파는 반공주의로
한국천주교회는 한민당과 이해기반을 공유했기 때문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 반탁운동을 전개했는데, 친일파들은 반탁론자를 '민족진영'으로 부르면서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교회잡지였던 <가톨릭청년> 등에서도 똑같은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1948년 친일파 처단과 친일잔재 청산 문제가 다시 제기되자,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청년>은 '편집부' 명의로 "총선거에 임하는 국민적 태도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민족적 성업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류가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다 같은 동포이니 널리 용서할 것은 누누이 말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한편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 실린 글에서 P.R.K라는 필자는 "남조선에서는 미군정은 처단은커녕 일부 등용까지 하여 무지각한 반민족적 도배를 도량케 하여 뜻 있눈 인사로 하여금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며 강력히 친일파 처단을 요구했다. <가톨릭청년> 1948년 7월호에서 조원환은 "건국은 기독교 정신으로"라는 글에서 친일파 청산은 인재를 매장시켜 버리는 것이고, 정략적 복수라고 비난했다. 조원환은 친일파로 지목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되어 수감되었던 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 명동성당 총회장을 지냇으며, 1962년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개설된 지성인교리반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친일파 처단에 대한 찬반 양론이 분분했는데, <경향신문>은 주로 찬성 입장을 드러내고, <가톨청년>은 반대 입장을 드러냈으며, <경향잡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강인철 교수는 이를 두고 "교회지도자들은 1948년의 친일파 처단 논란에 대해 소극적 반대 내지 '불쾌한 침묵'이 태도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해방정국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한 공식적 사과나 반대 없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정국을 주도해 가는 주체로 성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반공주의'는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한국교회가 친일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적에 대해 엄숙히 사죄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사 청산에 머물지 않는다. 교회가 자신의 신원을 되찾는 길이다. 과거 교회가 일본제국주의와 미군정, 이승만과 박정희 등 정치권력과 타협하고 밀착되어 '생존과 성장'을 도모했던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이미 그 습관은 김재덕 주교, 지학순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등을 통해 버리기 시작했지만, 교회가 공적으로 '권력'과 이별하는 절차의 하나로 교회 스스로 자신의 과거 행적을 참회하고 겨레 앞에서 용서를 청해야 한다.
*이 글은 강인철 교수의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184-210쪽에서 주로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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