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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18일) 자다 깨니 3시 20분이었어요.
낮에 잠시 눈을 붙여서인지 잠이 오지 않아 TV를 틀었더니 와-감동의 스토리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란 TV문학관이 방영되고 있는 중, 처음 접하는 기관사 이야기,
원제목은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로 작가는 이균영씨-.
동덕여대교수로 재직중 이 작품을 써놓고 발표도 못하고 사망, 97년에 문예지에 발표했다네요.
감동은 우리네 인생사의 숙명적인 그리움과 쓸쓸함들, 연극같은 삶이 잘 나타나 있어서지요.
30년 근속을 자랑하는 화물차 기관사 박석우님의 젊은 시절이야기와
그에 얽힌 두 여인의 사랑,이별이야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낡디 낡은 신문기사를 태우고
숙소로 향하는 주인공의 생애가 진한 감동을 불러준다. 아-. 사는게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내 지나온 뒤안길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구요.
너무 감동스러워 대본까지 탐을 내 인터넷에서 실례를 했어요.ㅎ
모처럼 처음 접하는 대본 눈도 내렸겠다 한번 만나보시길 -.
네? 그럼요. 이것이 인생 사는 거지요. 창피할 것도 없고요.ㅎ(권하는 이;德田)
▷TV 문학관 -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
< 신1 > 청량리 역 기관차고( 낮)
타이틀.
속도를 늦추며 레일위로 달려오는 기차
화물을 가득 실은 열차가 서서히 구내로 들어온다
역무원의 신호에 철로를 바꿔 정거장으로 진입한다.
또 한 대의 열차가 출발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신호가 떨어지고 열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구내를 빠져 나간다 이런 저런 역의 여러 모습들
레일 위를 달려가는 기차 바퀴.
수많은 레일들이 서로 엉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쭉쭉 뻗어 있는
광활한 광장이 인상적이다.
서로 닿을 듯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레일들이 잠시 보여진다.
(이 레일의 이미지는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석우와 옥 순, 석우와 아진, 옥순과 성호, 석우와 성호 등. 이들 모두가 사 랑하는 사이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철길같은 운명들이다)
(F.O)
< 신2 > 기관차고
영규가 8031호 화물차를 점검하고 있다(점검하는 여러 모습들)
꼼꼼하게 체크하고 정비한다
<신3>석우방 (낮)
가위에 눌린 듯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낮잠을 자는 석우
꿈결처럼 아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땀을 흠벅 흘리며 꿈인듯 생시듯 아기 울음소리에 취해있다. 석우 성호야!
석우 벌떡 일어난다. 아무도 없다 고요하다.
희미하게 사진이 들어온다. 아진(32)이 웃고 있다
석우와 인혜, 군복을 입은 성호가 함께 서 있다
사진을 물끄럼이 보는 석우
<신4>기관차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관차를 손보고 있는 영규.
이때 지나다 이를 보는 운용계장
운용계장 이조사 너무 서두르지 마! 아직 출발하려면 멀었어
영규 첫 운행이라서 그런지 가슴이 설래는데요
운용계장 (혼자소리 처럼)그럴 수 있지
운용계장 갈 길을 간다.
<신5>석우의 방
밥상을 드리고 있는 인혜
인혜 어서 드세요
석우 왠 미역국이냐
인혜 내일이 오빠 생일이잖아요. 아빠는 내일 아침 문곡에 계실거고........ 석우 . .........(기특한 듯 물끄럼히 인혜를 보다)
그래 니가 잊어 버리지 않고 챙기니 고맙구나. 이 녀석 어디서 밥이 나 제대로 얻어 먹는지........
벌써 그 녀석이 집나간지 일년이 다 돼 가는구나.
인혜 (얼른 말을 바꾼다)얼른 드세요. 늦겠어요
석우 그래 먹자구나
참 아까 자꾸 애기울음 소리가 들리더라
인혜 고양이 소리를 잘못 들으신 것 아녜요
석우 (혼자 말하듯)아냐 분명 아기 울음소리였어 너무 생생해
<신5-1> 청량리역
시계탑이 오후3시경을 가르키고 있다.
<신6> 기관차고
영규 이판작업을 하고 있다
수송 계원의 수신호에 따라 33칸의 화물칸 차량을 기관차 뒤에 긴 꼬리처럼 달고있다
이때 사무실 쪽에서 운용계장(40)과 석우가 오고 있다 .
운용계장 이조사, 박 기관사님이야 인사드려!
영규 (얼른 기관실에서 뛰어 내려와 꾸벅 인사한다)
이영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석우 그래요? 첫 운행을 야간에 하게 되어서 내가 괜히 미안하네요.
자 ( 손을 내민다)
영규 (두 손으로 굳게 잡으며) 아닙니다.
백 만 킬로를 무사고로 달리신 분을 모시고
첫 운행을 하게 되어 오히려 제가 영광인데요.
석우 그렇게 봐 주면 고맙고요.
운용계장 초보들 전부 박기관사님을 따라 나가려고 줄을 섰는데
이조사 자네는 정말 운 좋은 거야.
영규 (사람 좋은 웃음 웃으며)잘 알고 있습니다.
석우 이거 왜들 이러세요. 봉급날도 한참 남았는데
(영규에게) 그냥 배운 대로만 하면 다 됩니다.
영규 저한테는 말씀 낮추십시오.
운용 계장 그러게. 박기관사님은 너무 점잖아서 가까이 하기 오히려 힘들 때 가 있다니까. 그거 아세요?
석우 (억양 그대로 받아)그거 몰라요?
모두들 큰소리로 웃는다.
운용계장 여기 항로표!
운용계장에게서 항로 표를 받아드는 석우.
< 신7 > 레일광장 (기관차고?)
영규가 8031호 화물차의 "이판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석우.
석우 천천히 출발 대기선까지 끌고 갈 수 있겠어?
영규 걱정 마십시오
석우 매사에 조심하라구
영규 네
마침내 영규가 모는 기관차가 화물칸들을 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이)
철길을 밟으며 기관차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석우,
다시 보여지는 레일의 이미지.
<신7-1>중앙통제실
통제사 8031열차! 대기선에 대기하고 기계점검 하십시요.
< 신8 > 기관차 운전실
석우 열차! 대기선 대기
속도계와 제동등을 체크하는 석우.
(사이)
석우 (무선 전화기에 대고 상황보고 한다)
8031호 8031호 발기 준비 완료! 발기 준비 완료!
통제사 (E)알았습니다! 제천 태백 갑니까?
석우 네!
통제사 (E)앞 선로에 보이는 것 성북 가는 건데 먼저 보내고 출발하십시오!
석우 알았습니다!
< 신9 > 청량리역
차량 한 대가 역을 빠져 나간다
<신10> 기관사실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석우와 영규
이윽고 신호등에 출발 신호가 켜진다.
석우가 제동장치를 풀고 출발 시킨다. 바퀴가 서서히 움직인다.
영규는 잔득 긴장되어 있다.
긴 화물차가 서서히 역을 빠져 나간다.
<신11>인서트
한강(남한강?)을 배경으로 화물열차가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다.
<신12>기관사실
석우와 영규의 시선으로 기차가 달린다.
<신13>서울 변두리 어느 곳
달리는 화물차
<신14>기관사실
기적을 울린다.
영규 (앞쪽을 가리키며) 건널목!
석우 건널목!
< 신15> 건널목
건널목에서 근무자가 흰 수기를 흔든다.
건널목을 지나가는 기관차.
< 신16 > 기관사실
석우의 시점으로,
기관실의 앞창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끊임없이 닥아온다
풍경은 어느덧 짙은 녹음의 산과 들이다.
영규 인제 좀 마음이 놓이네요....서울을 벗어나니까.
석우 첫 운행 때는 다들 그래.
이조사는 지금 몇살이지?
영규 스물 다섯 살요.
석 그래? 나도 스물 다섯 살 때 처음 기차를 몰았는데.....
영규 (반가운 듯) 그러세요?
근데 박기관사님은 왜 기관사를 하시게 됐어요?
모두들 박기관사님은 이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고시 공부하던 분이라는 소문도 있구요.
석우 (웃는다) 나 광부였어. 열 여덟 살 때부터 막장 출입했지.
영규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났죠?
석우 ......글쎄
영규 기관사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거예요?
석우 ......
영규 그 때도 기관사가 되려면 공무원 시험을 봐야 했나요?
석우 (입술에 손가락 대며) 운행 중 잡담 금지
영규 아, 예! ( 머쓱해진다)
석우의 얼굴.
< 신17> 옥순의 얼굴 ( 회상)
옥순(23)의 얼굴이 말하고 있다.
옥순 석우야, 넌 광부가 되면 안돼. 절대로 안돼.
만일 니가 다시 막장으로 돌아가면 우린 끝이야.
< 신18 > 기관실 (현실)
영규 입을 꼭 다물고 앞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석우 그런 영규가 안되 보였던지 말을 건넨다.
석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광부가 기관사가 됐으니 출세한 거지.
이조사는 왜 기관사가 된 거야?
<신19> 들판의 개울가
물장난을 하던 아이들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영규 (역시 손을 흔들며) 쟤들만 할 때,
기관사가 무진장 멋있어 보였어요.
<신20>기관사실
석우 어릴 때 꿈을 이룬 셈이네.
영규 .....그렇게 되나요? ( 크응 웃는다. 자조적인 웃음이다)
사실 저는 군대 가서 사람 됐어요. 그전에는 뜬구름만 잡으려고 했 죠. 참 웃기는 것이, 제대하고 나오니까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바꿔 신어 버렸더라고요.
결국은 여자하고 군대가 절 사람 만든 거죠.
석우 가는 세월과 여자는 잡지 못하는 법이지
영규 .............지금의 사모님과는 연애결혼 하셨어요?
석우 (말을바꾼다)그래 지금은 애인이 있어
영규 아직은요 그러나 곧 생기겼죠
석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떠돌며 먼 곳을 꿈꾸는 여자란
결혼 상대로선 적당치 않아
영규 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독하게 사랑할 여자를 말입니다 비극적일수 록 더 좋겠어요.
석우 (혼자소리처럼) 비극적이라........
두 사람 약속이나 한 듯 잠시 침묵한다. 각기 회상에 젖는 얼굴.
<신21 > 솔티재 부근 버스 정류장 (회상, 32년 전 )
텅 빈 신작로 길에 군복을 입은 한 청년(23)이 서 있다. 석우다.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 오는 소리가 나자 얼른 가로수 뒤로 몸을 숨기는 석우.
이윽고 버스가 와서 선다.
옥순이 내린다. 그녀는 이런 탄광촌에서는 눈에 띄게 매혹적인
그러나 천박하지는 않은 외양을 갖고 있다.
옥순의 뒤에 대고 버스 안에 탄 사내들이 휘파람을 분다.
옥순은 개의치 않고 두리번거리며 석우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나 소심한 석우는 얼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숨어 있다.
실망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옥순.
마침내 버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석우는 옥순의 등뒤로 다가 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찌른다.
깜짝 놀라 돌아보고 활짝 웃는 옥순.
그러다 금새 토라진 표정으로 석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때린다.
옥순 안 나온 줄 알았단 말야!
석우는 수줍은 듯 웃기만 하고
옥순은 얼른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볼을 내민다.
옥순 날 기다리게 한 벌이야. 빨리!
석우가 머뭇거리자 옥순은 자신이 얼른 석우의 볼에 재빨리 입을 맞춘다. 까르르 웃는 옥순. 석우는 당황하면서도 행복하다.
< 신22 > 솔티재 언덕
꼭 붙어 앉아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두사람.
옥순 한달 있음 제대지?
석우 응.
옥순 제대하고 한달 있음 검정고시 시험이구.
석우 응.
옥순 강좌공부는 잘 되가?
석우 응
옥순 응응 응 밖에 몰라?
석우 (씩 웃는다) 아니.
옥순 (석우 어깨에 얼굴을 부빈다)니가 이번 시험에 합격 못하면 . ......아아 생각하기도 싫어
석우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 마.( 어깨를 안아준다)
옥순 그래 넌 꼭 해 낼거야. 난 널 믿어.
니가 고등학교 포기했을 때,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아깝다 아깝다 하셨니.
그때 난 나보다 니가 고등학교에 못 간다는 게 더 화가 났어.
석우 .........
옥순 니가 광부가 되겠다고 광업소 사무실에 찾아 왔을 때 난 정말
화가 났어.
석우 ..........
옥순 (정색하고 본다) 다시 막장으로 돌아가선 안돼.
그렇게 되면 우린 희망이 없어.
석우 알았어. 널 위해서 약속할께
옥순 (안심이라는 듯 다시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어리광 부리듯)
우리 사무실 소장 말야.
석우 새로 왔다는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는 사장 조카?
옥순 응 왠지 거슬려. 되게 거만하다?
얼굴도 폣병장이처럼 하얀데다가 줄기차게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나오는데.... 못 봐 주겠어.
석우 너 햐안 거 좋아하잖아
옥순 여기가 어떤 곳이니? 사무실 문 꼭꼭 닫고 있어도 검은 탄가루로 콧구멍이 새카매지는데잖아. 그게 뭐야?
석우 .........?
옥순 커피를 하루에 열잔도 더 마시고. 귀찮게시리.
덕분에 나도 커피 맛 들려서 큰일났어.
< 신23 > 철길 주변( 저녁 놀)
팔장을 끼고 걸어오며 얘기 중인 두사람.
옥순 전화기가 있는 내방에서 텔레비젼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어.
그때 현관 벨소리가 울리는 거야. 라라 라라 라라 라라라--( 엘리 제를 위하여) 하고 말야.
나는 마시던 찻잔을 들고 정신없이 현관으로 쫓아 가.
그럼 석우 니가 장미꽃을 들고 서 있는 거야.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서.
난 탄성을 울리며 니 목을 이렇게 껴안아.
(실제로 석우의 목을 껴안는다) .
석우 장 장미꽃이랑..... 찻잔은 어떡허지?
옥순 상관 없어.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려.
석우 ......
옥순 ......
두사람의 얼굴이 서로의 입술을 향해 다가간다.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려는 순간 멀리서 기차 오는 소리가 들리고
와락 석우를 밀어내는 옥순. 철길을 향해 뛰어간다.
레일 위에 엎드려 귀를 기울이는 옥순.
옥순 석우야, 기차 오는 소리야. 기차가 와!
정말 멀리서 기차 오는 소리가 들리고 옥순의 눈빛은 열에 뜬 듯 빛난다. 기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차창마다 불빛을 밝힌 객차다.
옥순 바로 저거야 ! 저 기차가 우리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 거야
석우 옥순아 위험해!
기차가 점점 다가오는데도 피할 생각이 없이 기차를 바라보는
옥순을 석우는 몸을 날려 피신시킨다. 그래도 옥순은 정신없이
사라져 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옥순 우리가 타야 할 기차야. 저걸 타고 우린 서울로 가는 거야. 갈 수 있지? 날 꼭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 거지?
< 신24 > 철교 (저녁 무렵, 현실)
기관차가 노을 속을 달리고 있다.
마치 30여년 전에 솔티재 아래를 지나던 그 기차처럼.
<신25> 기관실
석우 담배를 꺼내 물면 얼른 불을 붙여 주는 영규.
석우 이상하지?
영규 네? 뭐가요?
석우 이 철길 말야.
우리 기관사들은 언제나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잖아.
기차가 뒤로 가는 법은 없으니까 .
영규 그렇죠. (농담한답시고)이판 작업할 때 빼구요
석우 나는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백만 킬로를 달렸어.
그런데도 항상 제자리로 돌아와.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영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그래서.....후회 되세요?
석우 아니? 그래서 좋아......
영규 ........?
정면 창으로 풍경들이 끊임없이 다가온다.
석우 (혼잣말처럼) 이 창으로 보이는 세상들....
영규 네?
석우 이 창에 비치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 말야. 희한해
변함 없으면서도 뭔가 끊임없이 변하거든
말없음으로 말하고
결코 꾸미지도 않는데 화려하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여.
항상 떠나면서도 언제나 그 자리고 말야....
영규 (새삼스럽게 석우를 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탄하는 눈빛이다)
석우 (그 시선 느낀 듯) 어려워?
영규 멋져요.( 웃는다)
석우 기다려 봐......시간이 흐르면 이조사에게도 이 창이 가르쳐 줄테니....
다시 정면 창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다가온다.
마치 지나간 세월이 다가오듯.
< 신26 > 문곡 석우집( 그 일년 후, 회상 )
가난한 탄광촌 사택이다.
제대하고 집에 온 석우 앞에 삶은 닭냄비가 놓여 있고
석우모가 뜨거운 닭을 호호 불며 찢고 있다.
석우의 남동생( 15)과 여동생 둘(13, 10)이 침을 삼키며 보고 있다 가 냉큼 집는다.
석우모는 그 손들을 사납게 후려치며 큰아들에게 닭다리를 내민다.
석우 저 다 못 먹어요 어머니. 애들 좀 주세요.
석우모 가들 다 먹었다. 어제가 니 제대하는 날인 줄 잘못 알고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온 식구가 떡을 쳤어.
아직도 내 입에서는 닭냄새가 풀풀 난다.
(애들을 노려보며) 나가들 놀아? 턱주가리 빠뜨리고 있지들 말고! 동생들 억지로들 일어나 나가고
석우 내키지 않는 듯 닭다리를 뜯는데
석우모 인자 집안 가장이 돌아 왔으니 에미가 오늘부터는 발편히 뻗 고 자것다. 너 광업소 소식 모르재?
요새 막장 일이 밀려 일손이 영 딸린다더라.
석우 어머니 저 탄광일 당분간 쉬고 싶어요.
석우모 (놀라)왜?
석우 군대 있는 동안 고등학교 검정 고시 공부를 좀 했어요.
두 달 후가 시험인데
석우모 (말 자르며) 너 그거 옥순이 년이 조종해서 벌린 짓이지?
석우 (아무 말 못한다)
석우모 고것이 에미 동생들 다 버리고 대처 가서 재미나게 살자 고 널 꼬신 모양이다만, 그 년 지금 여기 없다!
석우 여기 없다니요?
석우모 야밤 도주했어!
광업 소장인가하는 서울나기 따라 서울로 도망갔댜.
소장 첩이 됐다더라.
옥순이란 년이 그럴 줄 몰랐더니....
그동안 내 며느리가 되겠거니하고 쏟은 정이 분해서 나도 며칠간은 잠이 안오더라....그러니 너도
그러나 석우는 이미 방을 뛰쳐 나가고 없다.
< 신27 > 동네길
광업소 사무실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석우.
<신28> 광업소 사무실
석우 문을 벌컥 열면,
사무실 책상에 걸레질을 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흠칫 놀라며
석우를 바라본다.
석우 정 옥순씨 없습니까?
여자 (겁에 질려) 모 모르겠는데요.
(종만) 석우야 옥순이는 진작에 그만 뒀어.
종만이 뒤에서 석우의 어깨를 잡는다.
< 신29 > 개성집
식사와 술을 함께 파는 국밥 집.
광부들의 단골 주점이다.
종만 휴가 나왔을 때 옥순이가 아무 눈치도 안보이대?
석우 (술잔을 털어 넣는다) 전혀 몰랐어.
종만 하긴 옥순이 집에서도 아무도 몰랐다고 하더라.
어느날 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거야.
어떻게 보면 옥순이 답지 않냐?
너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문곡 사내들이 차지하기에
옥순이는 좀 버겁지.
석우 그 소장이라는 남자는....
종만 ( 놀란다) 너 그것까지 아냐?
( 사이) 공교롭게도 정일훈 소장이 서울 본사로 발령 간 다음날 옥 순이가 사라져 버려서 소문이 그렇게 나긴 했는데 아무도 본 사람 은 없어.
석우 ........
종만 세상에 어디 여자가 옥순이 하나냐?
걔 언제고 일 낼 애였어...그러니
석우 (말없이 일어나 나간다)
어깨가 축 쳐진 석우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보는 종만.
< 신30 > 참나무 골( 혹은 숲, 밤)
온몸을 나무 기둥에 부딪치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는 석우.
<신31> 철새가 나르는 호수가(현실)
석우의 분노처럼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기차, 기적소리에 철새들이 일제히 비상한다
<신32 > 석우집 대문 앞 (다른 날 저녁 무렵)
술에 취해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석우.
멀리서 빈 광주리를 들고 오던 석우모가
한걸음에 달려와 통곡 한다.
석우모 야 이눔아 석우야!
(두들겨 깨우지만 의식이 없다)
이 못난 놈아! 이게 며칠 째여
이러다가 옥순이년 때문에 우리 아덜이 먼저 죽고 말것네!
( 죽을 힘을 다해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야들아! 민우야아! 느들 성 좀 날러라아!
방문이 열리더니 동생들이 뛰어 나온다.
셋이서 석우를 떠메고 들어간다.
석우모는 제풀에 지쳐 그냥 주저 앉고 만다.
석우모 옥순이 탓할 것두 없어....
재주 있는 너를 가르치지 못한 에미가 죄다, 가난이 죄여....
아이고....
석우의 눈이 빛난다
<신33>솔티재
넋을 놓고 앉아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있는 석우
수염이 턱수록하고 광대뼈가 튀어 나온 참혹한 얼굴이다
옥경(옥순의 언니)이 닥아온다. 아기를 업고있다
옥경 석우씨
석우 (미동도 않는다)
옥경 이러지마! 옥순이가 이런 석우씨의 모습을 보면 어떻겠어........
옥순이 소문처럼 정소장 첩 된 것 아니야
석우 (쳐다본다)
옥경 그 앤 꿈을 찾아 떠났어. 어디에선가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고
있을거야. 그런데 석우씬 이게 뭐야
석우 (눈이 점점 빛난다)
옥경 나중에 옥순이 만났을 때 보란 듯이 떳떳해야 하지 않겠어?
석우 (어떤 결심같은 것이 서린다)
<신34 > 문곡 석우집 ( 밤),겨울
라디오에서 통신 강좌가 들려 온다.
밥상에 고등학교 교과서를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석우.
그 뒤로는 단칸방이라 동생과 석우모가 엉켜 자고 있는 모습이 보 인다.
<신35 > 샘가 ( 다른 날, 밤),겨울
잠을 쫒느라 물함지를 머리에 들이 붓는 석우.
(영규) 전방 신호등!
<신36 > 기관실( 현실)(N)
석우 전방 신호등!
빨간 불이 점멸하며 요란한 벨소리가 기관실을 뒤흔든다.
<신37 > 철길(N)
빠른 속도로 석탄 펄크차가 교행해 간다.
전등을 깜빡깜빡 비추며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펄크차.
<신38 > 기관실(N)
석우 영동선은 외길이라 신호를 조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음야.
영규 올라오고 내려가는 기차들이 외길에서 마주보고 달린다고
생각하면 앗찔해.....으-- 식은 땀 나요.
무선 전화기가 지글거리며 신호를 울린다.
(무선) 8031호! 8031호!
영규 말씀 하십시오!
(무선) 저녁식사 어떻게 할 겁니까?
영규 (석우를 본다. 석우 고개 끄덕하고) 두 개 준비해 주세요.
(무선) 알았습니다.
석우 (손목 시계를 본다. 어느새 8시가 넘어 있다)
<신39 > 문곡역 대합실 ( 겨울 회상)
대합실에 톱밥난로가 타고 있고 밖에는 눈이 오고 있다
서울로 떠나는 석우와 전송나온 석우모와 동생들 종만이 서 있다.
석우모는 신문지에 싼 뭉치를 석우에게 건넨다.
석우모 삶은 계란하고 김밥이다.
찻간에서 꼭꼭 씹어 먹어라. 물이 없어서 어쩐다냐.
목 맥힐턴디
석우 (동생들을 본다. 남동생에게) 석대 너는 어떡허든 형이 계속 학교에 보내 줄테니까 틈틈히 공부 해 둬, 알았지?
(여동생들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 준다 )
(종만에게 말없이 손 내민다).... 고맙다.
종만 다음에 여기 올 때는 기차 몰고 와라.
석우 그래야지.
(모에게) 도착하면 바로 편지 드릴께요.
(가방을 들고 개찰구를 나간다)
<신40 > 철길 (현실)
강원도 험한 산골짜기를 구비구비 도는 기관차.
<신41> 어느 간이역 승강장
불이 꺼진 승강장에 한 젊은 여자가 일회용 도시락이든 비닐봉지를 두개 들고 서 있다.
속도를 늦추며 들어와 정지하는 기관차.
석우 (몸을 내밀고) 안녕하세요?
여자 어머 박기관사님이시네? 안녕하세요?
(비닐 봉지를 올려 준다)박기관사님이 드실 줄 알았으면 더 맛있게 만드는 건데 그랬어요.
석우 (받으며) 어머님은 건강하시죠?
여자 그럼요,.
석우 안부 전해 주세요.
이쪽은 ( 고개를 내밀고 호기심으로 보고 있는 영규를 가리키며)
우리 이영규 기관 조사예요. 첫 운행예요.
여자 어머 그러세요? ( 활짝 웃는다)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 도시락 드셔 보시구 많이 애용해 주세요.
(어두운 불빛 속에 여자는 제법 아름다워 보인다)
영규 예에!( 수줍은 듯)
맛있게 먹겠습니다!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자는 손을 흔든다.
뭔가 아쉬운 듯 기차의 꽁무니를 안보일 때까지 보고 있는 여자.
마치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듯, 그 옛날의 옥순처럼.
<신42 > 기관실
제어대에서 손을 떼지 않고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국물을 들이키는
석우.
영규 (부지런히 먹다가 불만스러운 듯) 이렇게 식사를 해야 하는 직업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석우 익숙해지면 이런 식사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
영규 모든 직장인들이 점심시간 따로 있고 식사후 커피도 마실 시간이 있질 않습니까? 이렇게 근무하는데도 120킬로 이후 거리일 경우 운 행 시간외에는 아무것도 근무시간으로 쳐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까?
석우 어떤 것에도 양면은 있지 계절의 변화와 자연들을 우리만큼 친숙하 게 느낄 수 있는 직업도 드물걸.... 이 신선한 공기만 해도 서울사람 들 돈 주고 사서라도 마시고 싶은 공기 아니겠어?
영규 그건 그런 것 같아요
<신43> 어떤 터널
기차가 터널로 빨려 들어간다.
<신44 > 청량리 역 구내 기관차고 (일년 후 여름, 회상 )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석우 기관차를 이리저리 돌보고 있다.
동료 한사람이 옥경이를 데리고 온다
동료 여이 박조사 누가 찾아왔어
석우 고개들면 옥경이 앞에 와서 서있다
옥경 닥아오면서
옥경 석우씨 성공 했구나.
석우 오랜만이네요.
옥경 석우씨는 문곡을 빠져 나올 줄 알았어.
석우 누님도 많이 달라지셨어요.
옥경 문곡에서 석우씨가 검정고시하고 공무원 시험에 계속해서 합격했 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아?
그 인사를 문곡서는 못하고 결국 일년이나 지나서 여기서 하네?
석우 .......고맙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하고 긴장이 감돈다.
옥경 그래 기관사 일은 재밌어?
석우 예.....아직은 수습이예요.
그런데 왜 절.....
옥경 사실은.....옥순이 때문이야.
순간 거짓말처럼 공구를 쥔 석우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석우 옥순이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다 잊었습니다!
(그러나 표정은 곧 울고 말 것 같다)
옥경 알아.....
그렇지만 어떡해..... 사람부터 살려 놓고 봐야지.
석우 그게 무슨 말씀예요?
옥경 옥순이가 지금 병원에서 죽어 가.
석우 (멍하고)
옥경 바보같이....자살을 하려고 약을 먹었지 뭐야.
석우 왜 그런 일을 ......
옥경 석우씨한테는 정말 낯이 없어. 옥순이가...정소장.
그 사람 아이를 가졌었나 봐.
석우 ..........
옥경 그런데 그 부인이 알게 되서 아이를 유산 시켰대....
그리고 나서 약을 먹은 거야.
석우 그런데 저보고 뭘 어쩌라구요?
남의 사랑싸움에 왜 제가 끼어 듭니까?
옥경 깨어나서 지금까지 물 한모금 안먹고 울기만 해.
뼈만 남았어... ( 운다)
의사가 이러다가는 며칠 못 버티고 죽을 거래.
석우 ............
옥경 어제는 옥순이가 밤새 헛소리를 하는데
석우 .......................
옥경 .석우씨 이름 만 부르고 있어.
(사이) 사람 목숨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우리 옥순이 좀 만나 줘.
응? 부탁이야......
석우 (마침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다)
어딥니까? 그 병원이!
옥경 고마워 석우씨.....
<신45 > 기관실 ( 현실)
와르륵 문이 열린다.
영규가 문을 열고 돌아서서 소변을 보고 있다.
석우는 갈증이 나는 듯 벌컥벌컥 생수를 마신다.
한 손은 여전히 핸들을 잡고 있다.
( 사이)
영규가 문을 닫고 돌아서며 볼멘 소리를 한다.
영규 소변이 안 나와요.
석우 때가 되면 나올거야, 운행 시간에 익숙해지면
영규 박기관사님은 기다리고 순응하는데 도가 트신 분 같아요.
석우 세상엔 말야, 더 빨리 더 멀리 뛰려고 발버둥치는 사람과
모든 걸 순리대로 기다리며 순응하는 사람이 있어.
이조사는 세상은 누구에 의해 움직여 질 것 같애?
영규 .......
석우 기다리고 순응하는 사람들이야.
영규 그래도 전 빨리 멀리 뛰고 싶어요.
석우 물론 그래야겠지. 그 나이 때는......
<신46> 옥순의 양장점 앞 ( 회상, 밤, 겨울)
서울의 변두리.
뉴욕 양장점이라는 간판 아래
유리문 안으로 양장점의 내부가 보인다.
석우 불꺼진 내부를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석우 (혼자말로) 어디갔나......
<신47 > 옥순의 방
양장점에 딸려 있는 작은 살림 방이다.
작은 흑백 TV 가 있고 그 옆에 전화기도 있다.
벽에 횃댓보가 쳐 있고
옥순 작은 술상을 두고 술을 따라 마시고 있다.
방을 들어오다 이 모습을 한심한 듯 보는 석우.
옥순 기관사 아저씨! 오늘은 어딜 다녀왔니?
대구? 목포? 부산?
넌 좋겠다 늘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어서.
석우 아직도 부러워할 게 남았어?
넌 니 꿈을 이루었잖아. 전화기도 있고 TV도 있고! 이런 방에서
옥순 (OL)커피가 아니고 술을 마시고 있는 것만 달라! 그렇지?
( 까르르 웃는다)
석우 (심통난 듯) 그래!
옥순 넌 이대로 말거니?
야간 대학이라도 가서 교수도 되고 박사도 되야지?
석우 (닥아와 술상을 한쪽으로 치우면서)난 이대로가 좋아 이게 내 길이 지 싶어.
옥순 바보! 넌 욕심이 너무 없어
(석우의 얼굴을 쓰다 듬는다) 꼭 여자 같아.
니가 여자였고 내가 남자였다면 재미있었을 거야 그치?
석우 (손 떼내며)잠깐 들려봤어. 가봐야 겠다
그만 마시고 자라. (일어서는데)
옥순 석우야!
옥순 (금새 눈물이 글썽해 본다) 넌 왜 내게 아무 것도 묻질 않니?
석우 .........
옥순 난 널 속이고 배신했어 그러니 날 때리고 욕해 봐.
독하고 더러운 년이라고 화를 내.
그러면 차라리 내 속이 시원하겠어.
석우 (도로 앉으며 손을 잡는다)옥순아.... 난 널 그리워 한 적은 있어도 미워한 적은 없어.
제대하고 와서 니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도
난 널 미워하지 못했어, 오히려 나의 무능력이 미웠지.
옥순 .......
석우 그때와 똑같아.
난 지금도 문곡에 박석우고 언제든지 여기 있어.
변하는 것도 너고, 떠나고 오는 것도 너야....
<신48> 기관실
슬픈 얼굴의 석우 눈에 이슬같은 것이 맺힌다.
<신49 > 석우의 자췻방이 있는 골목길( 다른 날)
퇴근길의 석우, 걸어 온다.
길가 담에 빨래들이 널려 있다. 석우의 옷들이다.
다가가 자신의 옷임을 확인하고 황급히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신50 > 석우 자췻방
방문을 열면 책상 밥상으로 쓰는 사과 궤짝이 신문지로 덮여 있다.
얌전히 개어져 있는 석우의 속옷이며 양말들도 눈에 들어온다.
석우 신문지를 들춰보면 정갈한 밥상이 차려져 있다.
<신51 > 공중전화( 길)
통화 중인 석우.
석우 응 지금 막 퇴근 해서 들어 왔어 .......너지?
<신52 > 옥순의 방
영어 회화 테이프를 틀어 놓고 술을 마시고 있는 옥순.
옥순 그래 나야. ( 사이) 맛있게 먹었니?
안 먹고 나왔어? 어서 가서 밥부터 먹어 배고프겠다.
( 사이) 아니?
공부하고 있어. 영어 공부! 들어 볼래?
(카세트 볼륨을 높히고 전화기를 갖다 댄다)
알아 듣겠니? 유 노우? ( 까르르 웃는다)
석우야 앞으로 니 빨래하고 저녁밥은 내가 해 줄게. 괜찮아.
( 사이)밥 먹고 발 씻고 이도 닦고 이불도 잘 덮고 자....
석우 ...........
<신53> 거리
마구 달리는 석우
<신54>옥순의 방
와락 열리는 방문
석우 ........
옥순 ........
석우 닥아와 앉는다
옥순 기다렸다는 듯 석우의 품에 안긴다.
부둥켜안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두사람.
<신55 > 집 주변의 공터 (어린이 놀이터 같은 곳)
요란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옥순이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움켜 쥐고 뛰어온다.
뒤따라 뛰어오는 석우.
석우 옥순을 겨우 붙잡는다.
석우 왜! 뭐가 겁나?
너나 나는 문곡을 떠났잖아.
우리는 솔티재 아래를 지나던 기차를 탄 거야.
이제는 함께 어디든지 갈 수 있어. 함께 꿈꿀 수 있단 말야.
옥순 (그사이 정신없이 옷단추를 잠근다)
우리는 함께 꿈꿀 수 없어. 난 옛날의 옥순이가 아냐.
석우 .......
옥순 난 또 딴 세상이 보여.
이제는 흰쌀밥에 계란을 넣고 비벼 먹을 수 있고 테레비젼을 보며 전화를 받고 차도 마실 수가 있게 되었는데도
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그곳으로 가지 못해 괴로워
석우 그 곳이라니......그게 어디야? 그 남자 곁이야?
옥순 .......
석우 너 아직 그 남자를 못잊고 있구나.
옥순 니가 병원에 날 찾아 왔을 때 나는 너한테 의지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 같았어.
헌데 니 곁에 있으니 나는 또 떠나고 싶어.
석우 (안타까워)넌 그 남자를 절대로 가질 수 없어. 왜 그걸 몰라?
옥순 그 남자는 가질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남자의 세계는 가질 수 있 어. 내가 왜 영어 공부를 하는지 알아?
미국은 공부를 안했어도 능력만 있으면 성공 할 수 있대.
그 남자가 그랬어. 내게 회화책도 사주고 외국 패션 잡지도 사줬어. 난 언제까지 이 변두리 양장점에만 만족할 수는 없어.
언젠가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어
그 남자와 미국 거리를 걷고 말 거야.
석우 (옥순을 붙잡고 있는 손이 힘없이 스르르 풀린다)
옥순 석우야........
석우 갈께
옥순 그 남자는 나의 꿈이야, 그리고 넌 나의 고향이고.....
석우 벌써 가고 있다
옥순 (고집스럽게 서 있다가 뒤에 대고 소리친다)
더 이상 착한 널 속일 순 없어!
멈칫했다가 그냥 걸어가는 석우.
<신56> 어느 산골
아늑히 꿈길처럼 달리는 기차(대부감)
<신57 > 기관실 ( 현실)
기관실 벽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다.
말없이 운행을 계속하는 석우.
업무일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영규.
<신58> 간이역 앞
신호등에 불이 들어온다
구내로 들어오는 기관차
깃발을 들어 신호한다
굴렁쇠를 건다.
작은 역을 지나는 기관차.
역 앞 어둠 속에서 불빛이 원을 그리고 있다.
역무원이 보내주는 집무 신호다.
<신59 > 기관실
석우는 손을 흔들어 답한다.
얼굴은 몰라도 정겨운 사람들이다.
영규 ( 일지를 덮으며)저쪽에서 잘 보일까요?
석우 이조사도 여기 한 오년 만 앉아 있어 봐.
아무리 어두워도 다 보이게 될거야. 서로 표정까지 알아.
영규 정말요?
석우 정말.
영규 (싱겁게 웃으며 다시 업무일지를 본다)
<신60 > 옥순 양장점 앞 (겨울밤 , 회상)
싸락눈이 내린다.
유리 문 너머로 일을 마친 옥순이 가게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옥순이 밖으로 나와 가게 덧문을 닫는다.
순간 무엇에 이끌리듯 건너편을 바라보는 옥순.
얼어붙듯 꼼짝도 안하고 본다.
건너편에는 석우가 서 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석우의 어깨와 머리에는 눈이 덮여 있다.
옥순이 석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눈사람처럼 서있는 석우의 어깨며 머리의 눈을 말없이 털어주는 옥순.
석우 내 내 방에 연탄불이....꺼져서....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순은 와락 석우의 목에 매달 려 정신없이 볼을 부빈다.
옥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지난 몇 달간 니 생각만 했어.
잘왔어 정말 잘왔어....
우리 함께 살자. 나 술 끊으께 다시는 헤어지지 마.
<신61 > 어느행복한 하루의 몽타쥬들
비 오는 날의 퇴근길 버스 정류소.
우산을 들고 석우를 기다리고 있는 옥순.
석우가 내리자 달려가 우산을 씌워 준다.
서로 허리를 껴안고 빗속으로 사라진다.
옥순의 방에서 서로 비젖은 머리를 타올로 닦아주며
깔깔대는 두사람.
서로 밥을 먹여 주는 두사람의 모습 등
원초적인 행복감에 젖어있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61-1>철길
곧게 뻗은 철길위로 달리는 열차.
<신62 >옥순의 방 ( 여름 낮)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고 TV 소리가 들려 온다.
옥순의 무릎을 베고 누운 석우는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옥순 조심스럽게 무릎을 빼고 베개를 베어 준다.
선풍기를 석우 쪽으로 돌려놓고 방걸레질을 하기 시작한다.
(사이)
순간 패션 쇼 할 때의 워킹 음악이 들려 온다.
옥순 홀린듯 TV 쪽으로 다가가고,
TV에 고정된 옥순의 시선은 움직일 줄 모른다.
비로소, 패션 쇼가 진행 중인 흑백 화면이 보여지고.
(사이)
그 화면 위로 옥순이 들고 있던 걸레가 날아와 꽂힌다.
<신63 > 골목길
퇴근길의 석우. 휘파람을 불며 온다.
<신64 > 옥순 방
석우 옥순아!
석우 방문을 열면, 아침 이부자리도 개지 않은 지저분한 방안.
외국 패션 잡지가 방바닥에 펼쳐 있다. 미국 패션 잡지다 석우 옥순아! ( 가게로 간다)
<신65 > 양장점
무표정 하게 서 있는 마네킹 위로
석우 옥순아!
재단대에는 마름질한 옷감이며 옷본들이
가위며 자 등 재단 도구들과 함께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옥순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석우 ( 술잔을 뺏는다) 술 안마시기로 맹세 했잖아.
옥순 맘대로 안돼....
분명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면 안돼. 난 바보 천치야.....
<신66 > 옥순 방 ( 새벽)
자고 있는 두사람.
자명종이 울린다.
벌떡 일어나는 옥순. 정신없이 옷을 입는다.
석우 이 새벽에 어딜 가?
옥순 말했잖아, 회화 학원에 등록했다고.
나가는 옥순.
방문이 탁! 닫친다.
<신67>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면 굴속을 빠져 나오는 기차
인서트
<신68 > 옥순 방 ( 다른 날)
퇴근해서 집에 온 석우가 옷도 벗지 못하고 방을 치우고 있다.
옥순은 청소도 하지 않고 빨래도 해 놓지 않았다.
빈 술병이 나뒹글고 있고 옥순은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다.
옥순을 요위에 제대로 누이고,
술병이며 술잔 잡지 빨래감들을 치운다.
회화 테이프를 치우다가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석우.
(사이)
그러나 다시 꺼내어 카셋트 위에 올려 놓는다.
<신69 > 마당 수돗가 ( 밤)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석우.
<신70 >옥순방
석우 ,방에 맨 빨래줄에 빨래를 널고 있다.
옥순의 속옷들과 스타킹들이다.
<신71> 뉴욕 양장점 앞 ( 겨울)
눈보라가 치고 있다
양장점 덧문은 닫쳐 있고
"금일 휴업 주인 백" 이라고 씌여 있다.
석우 문을 두드린다.
한참 후에, 옥순이 쪽문을 열어 주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신72 > 양장 점 안
어둑한 실내.
마네킹이 쓰러져 있고 진열장 유리가 깨져 있다.
보란 듯이 병나발을 불며 왔다갔다하고 있는 옥순.
극도로 불안 해 보인다.
석우 (말없이 발 밑에 유리 조각들을 치운다)
옥순 (석우의 행동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술을 마시며 실내를 서성인다) 모든 게 시시해.
아무런 발전도 없고 자극도 없어.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석우 술 좀 그만 마셔 너 이러다 죽는다!
(술병을 뺏으려하고)
옥순 (안뺏기려 버둥 치며) 박석우! 너 이렇게 살다 죽을래?
서울 부산만 기계처럼 왕복 하다가 ?
석우 .....술병 이리 내!
옥순 싫어!
석우 이리 내!(술병을 뺏는다)
옥순 .........
석우 진정으로 니가 원하는게 뭔지 말해줄까
석우의 얼굴에 분노가 서린다.
옥순 .......
석우 그건 영어회화도 아니고 디자이너도 아냐. 그 남자 곁이야
옥순 ...그래.... 맞아
석우 .............
옥순 끝난 줄 알았는데 잊을 수 가 없어
석우 ............ 그 맘 이해할 수 있어
옥순 고개들어 석우를 본다 .
석우 나도 그랬으니까
석우 나간다
옥순 잘가 그리고 절대로 날 용서하지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석우 (비참한 석우)
F.O
<신72-1>어떤계곡
달리는 열차
<신73> 기관실( 현실 )
운전 하고 있는 석우의 얼굴.
영규가 졸고 있다.
석우 이조사! 이조사!
영규 예! 부르셨어요?
석우 졸지 마.
영규 죄송 합니다( 시계를 보며) 밥먹고 나니까
영낙없이 식곤증이 오네요.
석우 잠이 깰 때까지 얘길 하면 좀 나을 거야.
영규 (하품하며)보통 한달에 며칠이나 야간운행 하세요?
석우 글쎄.....많을 때는 열흘 정도?
영규 그렇게나요? 사모님이 되게 싫어하시겠네요.
석우 ...... 그 사람은 천사야
영규 천사요? 야!
석우 (사이)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든.
영규 .....아유 죄송 합니다, 몰랐어요.
석우 죄송 할거 없어. 벌써 15 년이나 지났는데.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바퀴.
<신74 > 개성집 ( 옥순과 헤어진 이듬해 겨울, 회상)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문곡에 온 석우가 종만과 술을 마시고 있다.
텁수룩한 수염에 꾀죄죄한 옷차림의 석우.
기관사 제복을 입었는데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다.
그 단추 구멍을 종만의 손가락이 찔러 보고 있다.
종만 이런 행색 하며 수염하며....꼭 무장 간첩 같다야.
석우 노총각 신세가 그렇지 뭐.
종만 너 옥순이 때문이지!
석우 아 아냐,
종만 문곡이 어떤 곳이냐.
너 옥순이하고 살다가 깨졌다는 소문 쫙 났어.
왜 헤어졌어?
석우 그 얘긴 하지 말자. ( 담배 꺼내 무는데)
뒤에서 성냥불이 탁 들어온다.
석우 쳐다보면 윙크하는 아진.
곁에 덜썩 앉는다.
종만 야 너 내 친구한테 맘있냐?
아진 있다면 한코 뜨게 해 주실래요? (석우의 팔을 찰싹 감는다)
종만 얘 말하는 것 좀 봐.
어쩔래 석우야, 얘가 한코 뜨자는데.
석우 (웃으며 손 내젓고)
종만 어쩌야 쓰꺼나! 점잖은 내 친구가 싫다는데?
대신 나는 어떠냐.
아진 (고래 살레살레 흔든다)
종만 얘 봐 너 내 굴 뚫는 솜씨 모르는 구나?
이래뵈도 막장 경력 10년야.
아진 흥 난 굴 잘 뚫는거 보다 (감고 있는 석우의 팔에 얼굴을 부비며)
오래 오래 길게 달리는 게 좋더라?
석우와 종만이 실내가 떠나가게 너털웃음을 웃는다.
<신75 > 개성집 밖
소변을 보고 있는 석우.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 서는데
아진 아저씨
지켜 보고 있던 아진이 어둠 속에서 태연히 다가온다.
우 (당황해 )여기 언제부터 서 있었어요?
아진 기차에 석탄 다 싣고 나면 서울로 가실 거죠?
석우 그래요
아진 몇 시에 출발하세요?
석우 내일 새벽 4시요
아진 그럼 저 좀 태워 주세요.
석우 그건 화차요 승객은 태울 수가 없어
아진 그러니까 부탁 드리는 거잖아요.
석우 석탄 더미 속에서 스무시간을 어떻게 보내?
안돼요, 그러다가 큰일 나면
아진 (말 짜르며) 내일 새벽에 역 안에 돌구치 나무 아시죠?
그 밑에서 기다리께요! ( 고양이처럼 사라져 버린다)
<신76> 문곡 역 안 ( 새벽)
달빛이 비추고
땅바닥에는 나무와 아진의 그림자가 함께 누워 있다.
돌구치 나무(CU)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진.
보따리를 꼭 끌어안고 입을 꼭 다문 채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앞에서 보여준 당돌하고 방종한 인상과는 달리
몹시 절박하고 비장해 보인다.
만약 석우가 오지 않으면 영원히라도 서 있을 자세다.
<신77 > 어떤 역 ( 현실 )
역구내로 들어와 서서히 정지하는 기관차.
화차 배차 시간 관계로 20 여분 동안 대피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관실 문이 열리고 석우와 영규가 내린다.
영규 안에 안 들어가 보세요?
석우 이조사나 들어 가 봐.
난 그냥 여기서 바람이나 쐬고 있겠어.
특급열차 보내려면 20분이나 기다려야해.
영규 그럼 화장실이나 다녀 오겠습니다.( 간다)
역 구내를 서성이는 석우.
저목장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방치되어 있는 기관실 없는 화물칸들을 본다.
석우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그 화물칸 중의 하나,
둔중한 철문을 드르륵 열어 본다.
<신78 > 화물칸 안(낮 회상)
철문이 열리면
석탄이 가득 쌓여 있는 한 구석에서 아진이 고개를 파묻고
보따리를 꽉 끌어안고 있다.
석우 내려요 아가씨 서울에 다 왔어요.
그래도 아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석우는 화물칸 안으로 뛰어 올라간다.
아진의 어깨를 흔든다.
석우 아가씨 청량리예요
아진은 그제야 얼굴을 들고 석우를 본다.
온통 검은 눈물자국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에 달라붙은 탄가루들이 얼굴에 검은 줄을 긋고 있다
석우 (그 얼굴은 석우의 가슴을 사무치도록 아프게 한다)
아진은 그런 얼굴로 멍하니 석우를 본다.
( 사이)
밝음에 눈이 부신 듯 이마를 찡그리더니 그만 석우의 품으로
핑그르르 쓰러지고 마는 아진.
<신79 > 저목장 ( 현실 )
석우는 그때처럼 생생한 아픔으로 화물칸 철문을 닫는다.
그리고 철문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그리운 아진.
<신80 > 석우의 자췻방( 새벽, 회상)
길가로 난 창문에서는 뿌연 새벽 빛이 들어오고 있다.
웃목과 아랫목에 석우와 아진이 각각 이불을 펴고 누워 있다.
눈을 초롱초롱 뜨고 천정을 보고 있는 아진,
넋두리 하듯 얘길 하고 있는 중이다.
아진 사실 제 이름은 조 아진이예요
스물 두 살이구요......집이 너무 가난해서 열 아홉 살에 가출했어 요. 악착 같이 일해서 고향빚은 갚아 드렸지만
전 요 모양이 되고 말았네요.
이제 다시는 ..... 술집은 가지 않을 거예요.
힐끔 석우 쪽을 건네 본다.
웃목의 석우는 벽을 보고 등을 돌린 채 자고 있다.
아진 (소리 죽여) 아저씨
석우 .....
아진 아저씨
석우 ......
아진 일어나 무릎걸음으로 다가간다.
아진 저좀 보세요 아저씨 ( 흔든다)
석우 (그제야 몸을 돌려 아진을 본다)
아진 인제 날이 밝았으니 전 가야겠어요.
아저씨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드릴 게 아무 것도 없어요.
( 사이)
깨끗한 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굴리지도 않았어요.
석우 .......
아진 (석우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가슴 위에 댄다) 괜찮죠?
(그런 아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다)
<신81 >석우의 자췻집 부엌 (다른 날)
가마니를 깔고 앉아 양은 냄비며 놋숟가락을 반짝 반짝 빛나게
닦고 있는 아진.
<신82 > 자췻방
밥상( 사과 궤짝 위에 신문을 깔은)을 받은 석우.
밥상 위의 냄비며 놋수저가 번쩍거린다.
아진은 자신의 국과 밥을 바닥에 놓고 먹는다.
석우 그러지 말랬지?
아진 전 이게 편해요.
석우 (아진의 밥과 국을 밥상 위에 올려 놓는다)
난 이게 편해.
그 말에 베시시 웃는 아진.
아진 알았어요. 전 당신 편한 게 좋아요.
<신83> 시장
함께 장을 보고 있는 석우와 아진.
석우는 새로 산 밥상을 들고 있다.
우체통이 보이자 아진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쫓아가 우체통에 넣는다.
석우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아진 (수줍은 듯) 고향 집에요.....
석우 당황하며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된다.
아진에게도 고향이 있고 부모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안해 봤던 것이다.
석우 아진이는 고향은 어디지?
아진 (좋아서)바닷가요! 우리 언제 함께 가요.
친정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구
석우 (무뚝뚝하게)내 얘기도 썼어?
아진 ..... 네.
(석우 기색을 살피다가) 제가 잘못 했나요?
석우 아니.(그러나 굳은 얼굴로 앞장 서 걸어간다)
그 뒷모습 멍하니 보는 아진.
슬프고 쓸쓸한 표정이다.
<신84 > 골목길 ( 다른 날)
출근하는 석우를 배웅하는 아진.
아진 그럼 오늘은 부산에서 주무시고 와요?
석우 응 문단속 잘하고 자.
아진 저.......
석우 왜?
아진 편지 도로 찾아 왔어요.
석우 편지라니? 무슨 편지?
아진 어제 시장에서 부쳤던 편지요.
우체통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편지를 걷어갈 때 우체국 아저씨에게 도로 달라고 했어요.
석우 (기가 막힌 얼굴로 본다)
아진 당신이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전 그냥... 부모님께 당신을 자랑하고 싶었어요.
석우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했어.
언제 당신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러 가, 아니
먼저 우리 어머니께 인사 드리러 가.... 알았지
아진 당신 좋을대로 하세요.
전 아무래도 다 좋아요.
<신85 > 석우 방 ( 겨울)
출근길의 석우에게 양말을 신겨 주고 있는 아진.
석우 고맙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진을 보고 있다.
석우 양말이 따뜻하네?
아진 그렇죠? 미리 아랫목에 넣어 뒀어요.
(양말을 다 신기고 장갑을 꺼내 준다)이거 제가 짠 거예요.
몇 컬레 짜 두었으니 운전하실 때 꼭 끼세요.
맨손으로 기계를 만지니까 손톱에 기름때가 잘 빠지지 않잖아요.
당신 고운 손이 엉망이 됐어요.
석우 (껴 본다) 요새 같은 땐 바퀴가 선로에 얼어붙어 있을 때가 있어. 맨손으로 떼어 낼려면 죽을 맛인데 잘됐네.....
아진 (미소로 보고 있고)
석우 잘됐어!
(아진을 향해 권투하는 흉내를 낸다)
손으로 막으며 웃는 아진.
<신86>석우 자췻방 (다른 날 새벽)
자명종이 울리자 시계를 누르며 아진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그만 폭 엎어지고 만다.
석우 여보! 왜 그래?
아진 갑자기 어지럽네요 괜찮아요.
석우 그냥 누워 있어.
아진 쌀 씻어서 밥 안쳐야 되는데
석우 내가 할께. 누워 있어.
아진 ...... 저 애기를 가진 것 같아요.
석우 뭐?
아진 ......죄송해요.
석우 (본다. 착잡하다)
아진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께요.
석우 (사이, 이윽고) 무슨 소리야? 낳아야지.
아진이처럼 예쁘고 착한 딸을 낳아.
천사같을 거야..... ( 아진을 안아 주는)
(석우 모) 안됀다!
<신87> 석우 자췻방 외경
( 석우모) 안돼!
방문 앞에는 석우 모가 문곡서 가지고 올라온 보따리들이
놓여 있다.
<신88 > 석우 방
석우모 내 눈에 흙이 들어 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돼!
웃목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석우와 아진.
아진의 배는 제법 불러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진의 눈물이 무릎 위에 모은 손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다.
석우모 니가 개성집에서 술팔고 몸팔던 처자라는 걸
문곡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감히 우리집 며느리가 될 생각을 해?
(석우에게) 문곡에서 니가 저 애하고 살림 차렸다는 소문을
들었을때도 나 그냥 한때거니 했다.
한창 나이 객지 생활 힘들어서 그랬거니 한 거야.
그런데 이렇게 애미 가슴에 생못을 박아?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가 아시면..... 아이구 석우 아버지.......
아녀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어난다) 내 저 아이 데리고 병원에 다녀 오마.
(아진에게) 아야 가자! 일어서라!
일어서는 아진의 울음 소리 더 높아지고
석우 (가로 막으며)안돼요 어머니!
저 이사람도 아이도 버릴수 없어요.
평생 함께 할 겁니다!
석우모 이제보니 너 저년한테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석우 뭐라고 하셔도 좋아요.
이 사람 전 버릴 수 없어요. 저 때문에 또 울게 할 수 없어요.
석우모 니 에미는 울려도 되고?
석우 ......
석우 모 (노려보다가) 너 그럼 옥순이가 낳았다는 아이는 어떡할래?
석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석우모 옥순이가 니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문곡에 파다하다.
(재빨리 아진을 본다)
아진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이다
그런 아진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석우모.
석우모 (아진 들으란 듯이) 그래 내가 성급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지.
너 옥순이가 낳은 니 아들부터 찾아와라.
그리고 나서 저 년허고 살든 갈라서든 해.
그러기 전에는 문곡에 얼씬도 마.
나도 서울에는 다신 안 올란다.
아이구 석우 아부지........
석우 아진을 본다.
아진도 석우를 본다.
<신89 > 뉴욕 양장점 앞
석우 멀찌감치서 양장점을 보고 있다.
유리문을 열고 손님인듯한 여자가 나온다.
얼른 몸을 숨기는 석우.
<신90> 양장점 안
석우 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무도 없다.
쇼 윈도에는 마네킹도 두 개나 서 있고 새롭게 달라져 있다.
감회에 젖어 내부를 둘러보는 석우. 내실로 통하는 문으로 여자가 나온다. 옥경이다.
옥경 석우씨( 몹시 당황한다)
석우 오랜만예요 . 옥순이 있습니까?
옥경 옥순이는 여기 없어. .....작년 가을에 양재 공부하러 미국 갔어.
석우 (사이)
애는 요? 옥순이가 낳았다는 애 말예요.
옥경 어떻게 알았어?
석우 ......
옥경 ......우선 좀 앉아요.
두사람 탁자 앞에 앉는다.
옥경 그애도 여기 없어. 옥순이가 미국에 데려 갔어.
석우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애를 데려가요?
옥경 (고개 끄덕) 그래도 데려갔어.
석우 석우씨도 알다시피 옥순이는 보통 우리같은 사람하고는 다르잖 아? 석우씨하고 헤어지고 나서 우리 가족과 어머니가 서울로 이사 했어. 옥순이가 오라고 해서.
살림을 합쳤는데 술은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더라고.
나중에야 옥순이가 애를 가져서 그랬다는 걸 알았지.
석우 .......
옥경 옥순이는 애를 낳고..... 알고 있겠지만 아들이야, 작년 봄에 야간 대학에도 다녔어. 조금 다니다 말았지만.....
한국에서 대학 다닌 사실이 있으면 미국에서 훨씬 유리하다나 봐.
참 지독한 애야.
석우 아이는 몇살인데요?
옥경 이제 첫돌이 좀 지났을 거야.
석우 (날짜를 꼽아 보는 듯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된다)
아버지가 누구랍니까?
옥경 몰라 아무도 몰라. 옥순이만 알아.
석우 ....... 혼자 갔나요?
옥경 .....?
석우 혹시 그 남자하고
옥경 몰라 우린 몰라. 그냥 이 양장점을 맡기고 떠났어.
석우 ...........
<신91 > 저목장 ( 현실 )
영규 박기관사님!
영규의 부르는 소리에 석우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영규는 손에 캔 음료 두 개를 들고 있다.
영규 시간 다 됐어요. 출발 해야죠
<신92 > 철길
다시 어둠 속을 달리는 기관차.
석우 어둠을 응시하면서 끝없는 철로위를 달린다
<신93> 청량리 역 기관사 사무실 (그로부터 2년 후, 회상)
기관사 유니폼을 입은 석우(34)가 통화를 하고 있다.
등 너머로 벽에 걸린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보인다.
석우 인혜는?
(아진) 업고 나왔어요. 인혜야 아빠 해봐 아빠!
석우 인혜야! 인혜야!
(인혜) 압....부 압부!
석우 압빠! 압빠!
(아진) 인혜가 당신 목소리를 알아듣나 봐요.
등허리에서 팔짝팔짝 뛰고 난리가 났어요.
석우 당신 시장 보러 나왔다고 했지?
시장 안 봤으면 그냥 집에 들어가. 외식하게.
인혜 정말요?
석우 짜장면 사 줄께. 집에 6시까지 갈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전화 끊고 돌아서는데)
동료 기관사 한사람이 들어오며 석우를 부른다.
동료 박기관사 누가 찾아왔는데?
석우 누가?
동료 몰라 여자야. 굉장한 미인인데? 저기...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는 석우의 시점으로.
멀리 한 여자가 서성이고 있다.
석우는 한눈에 그녀가 옥순임을 알아본다.
<신94 > 역구내의 철로변
아름답고 원숙해진 옥순이
석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
기관사복을 입고 걸어오는 석우.
옥순 .......오랫만이야 ( 손을 내민다)
악수하는 두사람.
석우 여긴 언제 왔어?
옥순 일주일 됐어. 내일 다시 떠나.
석우 ...........
옥순 석우 넌 그대로다. 하나두 안 변했어.
그 옷도 (웃지만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다)
석우 왜...배도 나오고 (하다가) 너두 그대로야.
옥순 (흐응 웃는다)
(사이)
석우 아이는
옥순 (OL)아이를 데려 왔어.
석우 ......
옥순 니 아이야.
석우 ....
옥순 생일은 음력 4월 13일야. 양력은 5월7일이고
새벽 한시 2 분에 태어났어
석우 .....(목이 멘 듯) 그래
옥순 니가 떠나고 나서야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어.
니 아이였기 때문에 꼭 낳고 싶었어.
이름이 성호야. 박성호.
석우 성호....
옥순 성호는 엄마하고 언니가 키우고 있었어.
석우 니가 데려간 게 아니었어?
옥순 언니는 잘못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던 거야
석우 넌
옥순 알아, 거짓말쟁이라는 걸....( 웃는다)
석우 (웃지 않고 정색을 하고 본다)
옥순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널 보고 싶었어.
이번에 가면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석우 ........
옥순 지금은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디자이너 학원에 다니 고 있어.
내가 디자이너가 되면 이름을 '제인 정'이라고 할거야
옥순은 미국 사람들이 발음하기가 어렵거든. 어떠니?
석우 좋은 거 같군.
옥순 내가 언젠가 말했지? 석우...넌....나의 고향이라고 ....
나는 고향을 버렸지만 고향은 나를 버리지 않아... 그렇지?
석우야, 제발 내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 줘.
석우 ( 연민의 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신95>석우집 골목길
석우, 굳은 얼굴로 성호(4)를 안고 걸어오고 있다.
겁먹은 얼굴로 그러나 열심히 막대 사탕을 빨고 있는 성호.
대문 앞에는 아진이 외출복 차림으로 인혜(2)를 업고
목이 빠지게 성호를 기다리고 있다.
성호를 안고 나타나는 석우를 보자 뛰어 오려다 멈춰서는 아진.
석우 걸음을 멈추고 성호를 내려 놓는다.
아진의 얼굴.
<신96 > 철길 풍경 ( 현실 )
선로에서 불빛이 희게 부서지고 있었다.
선로와 바퀴와의 마찰이 끊임없이 하얀 불꽃을 일궈낸다.
기관차는 쉬임없이 달리고.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 그 나뭇잎들 사이에도 불빛이 잘게
부서져 빛을 낸다.
<신97 > 기관실
영규 야 저것 좀 보세요.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빛들이 너무 아름답네요.
결혼할 여자가 있다면 여기 태워서 한번쯤 구경시킬만 하겠 어요. 사모님 태워 보셨어요?
석우 (고개 끄덕인다)
영규 좋아하시던가요?
석우 그 여잔 나하고 함께라면 뭐든지 좋아했어.
뭐든지 "좋아요" " 좋아요" 그 말밖엔 할 줄 몰랐어
나를 세상에 최고의 남자로 알았지.
영규 재혼 안하고 계신 이유를 알만 하네요.
석우 그 사람 떠나고 난 혼자라고 생각해 본적 없어.
이 철길 위엔 항상 집사람이 있으니까.
오늘 석탄을 실으러 가는 쪽에 문곡이 내 고향인데
거기 언덕 솔티재에 집사람이 묻혔거든.
기차가 지나갈 때 보여.
영규 오늘은 밤이라서 안보이겠네요?
석우 내 눈에는 보이지.
<신98 > 병실 (회상)
침대에 누워 있는 아진(32), 병색이 완연하다.
석우(40)는 아진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아진은 자신의 고향 얘기를 하고 있다.
아진 마을 앞에 긴 방죽이 있거든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늘 그 길을 걸어 다녔어요.
당신 성호 인혜 우리 네 식구가 방죽을 따라 걸으면
정말 좋을 거예요. 해질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석우 (안타깝게 보고 있고)
아진 우리집 장독대 밑에는 씨를 안뿌려도 해마다 봉숭아하고
채송화가 피거든요? 아마 지금도 피어 있을텐데....
석우 당신 퇴원하면 꼭 함께 가자....이번에는 꼭 약속 할게.
아진 정말요?
그럼 이번 방학 때는 우리 성호하고 인혜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줄 수 있겠네....
석우 그럼...당신도 들여 내가 들여 줄게.
<신99>방죽길
고향을 찾는 석우내외 그리고 성호 인혜
저쪽 끝에서 뛰어와 반기는 아진의 부모들, 동네 꼬마들
아진 (E) 고향 어른들이 당신을 보면 모두 좋아 하실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구요....
<신100>호수가(밤)
낚시를 하고 있는 장인과 사위
아진 (E)우리 아버지는 밤낚시를 좋아하시는데 당신을 보면 분명 함께
밤낚시를 가자고 성화를 대실 거예요.( 숨가빠 하는)
<신101>병실
아진 그땐 성호도 꼭 데리고 가세요.
석우 (목 메인).....그래 알았어.
아진 횟감을 잡아오면 어머니가 회를 치실 거예요.
<신102>시골집
회를 쳐 부엌에서 내오는 어머니
아진 (E)우리 엄마 회치는 솜씨는 동네에서 아무도 못따라 와요.
밤에 평상에다 그 횟감을 놓고 장인하고 사위가 막걸리를
나눠 보세요. 우리 성호랑 인혜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힘이 드는지 잠시 눈을 감는다)
<신103>병실
석우 여보..( 마침내 울먹인다)
아진 ........밤하늘의 별을 세다가 잠이 들지도 몰라요......
당신은..... 사그러져가는 모깃불을 다시 피워야... 할 거예요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이 남았으니까요
석우 미안해... 미안해... .
진작에 ......당신 고향에 가 봤어야 했는데...
아진 상호 아빠.... 그런 말 마세요.
고향에 못 가도 상관없어요. 여지껏도 안가고 행복했는데요 뭐.
난 지금이 좋아요. 당신 성호 인혜 모든 게 나한테는 너무 과분 해요......설사 내일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해도 나는 좋아요....
다 좋아요...행복해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석우 (그의 얼굴에 회한과 함께 눈물이 쉼없이 흐른다.)
<신104 > 철길 (현실)
태백을 지나고 솔티재 부근에 온 기차가 삑 기적을 울린다.
<신105> 기관실
기적을 울리고 있는 석우.
영규 왜 기적을 울리세요? 차단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커브 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석우 저기가 문곡 솔티재야.
언덕에 우리집 사람이 나를 보고 있어.
석우는 다시 한번 기적을 울린다.
그런 그의 눈에는 눈물이 번득인다.
<신106 > 어둠 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107> 제천역
기차가 제천역으로 들어선다.
거대한 창고같은 입고창이보인다. 신호에 따라 서서히 입고되는
기관차. 기차가 서고 두사람 내린다.
영규 수고 하셨습니다. 박기관사님을 모시고 첫 운행했다는 사실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석우 나도 그래. 덕분에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어요.
<신108 > 기관사 사무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졸고있던 직원이 인사를 한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숙사에 머물게 될 기관사들의
성명 화차 번호 출발 역 도착시간 등이 빽빽히 적혀 있다.
직원 박기관사님 어서 오세요.
8031호지요? 예정 시간보다 좀 늦었네요.
석우 한 40분 늦었죠?
(칠판에 도착 시간을 적는다)
직원 서울 따님에게서 전화가 세번이나 왔었어요.
12시쯤 다시 전화 한댔습니다
<신109> 사무실 밖
공중 전화를 걸고 있는 석우.
공중 전화는 기관사숙사 정문 측백나무 옆에 있다.
석우 인혜니? 왜. 무슨 일로 전화 했어?
인혜 아빠 피곤하시지요?
석우 괜찮아. 좋은 일이라니 뭔데? 혹시 오래비 소식이라도 들었니?
인혜 아빠 놀라지 마세요 우리 식구가 늘어 났어요.
어쩌면 봉희네를 내보내야 될지도 몰라요
석우 성호가 왔구나! 그렇지?
인혜 오빠 아기예요! 아빠!
<신110> 서울 집 안방.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인혜의 등 너머로는 갓난아기와
등을 돌리고 자고 있는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혜 오늘 퇴근하고 들어오는데 웬 젊은 여자가 갓난 아기를 안고 아 버지와 저를 찾는 거예요. 오빠 아기래요 아버지
(석우) 아들이냐 딸이냐.(목이 메인다)
인혜 아들이예요. 오빠를 쏙 빼 닮았어요. 백일 됐대요
자고 있는 갓난아기를 다시금 돌아보는 인혜도 목이 메인다.
인혜 모자가 지금 아빠 방에서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신111> 기관사 숙사의 공중 전화 부스.
석우 여자는 어떤 여자니?
(인혜) 예쁘고 얌전해 보여요. 오빠 학교때 친구래요. 왜 오빠가 좋아하 는 타입 있잖아요.
석우 성호는 어디 있대? 왜 같이 안들어 왔다니?
(인혜) 외항선을 탔대요. 이제 아빠가 되었는데 아버지 신세를 더 이상
질 수 없다구요......
오빠 학교 등록금도 벌고 아기 옷이랑 저랑 아버지 선물도 사오겠 다고 .......(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먹인다.)
석우 (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인혜) 아빠 오실 때 아기 이름 생각해 오세요....
석우 알았다. 끊자.....
(인혜) 참 아빠! 오빠가요 아빠한테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대요.
어머니는 돌아가신 엄마 한 분 뿐이라구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석우 ......알았다
석우는 수화기를 놓고 부스를 나온다.
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철로 변으로 내려간다.
<신112> 철길
철길을 따라 걷는 석우.
수은등이 비추는 시멘트 난간 위에 걸터 앉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갑 속에서 여러겹 접은 종이를 꺼내 펴 본다.
여성 잡지 한 페이지를 오린 칼라판 사진이다.
옥순의 얼굴이 웃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인정받은 한국의 디자이너 제인 정" 이라고 머릿기 사가 박혀 있다. 얼마나 오래된 기산지 접힌 자국대로 금이 가 있 는 옥순의 얼굴은 행복해 보인다.
석우는 라이터를 꺼내 그 종이에 불을 붙인다.
(지 에미가 아진이 아니라는 것을 성호는 고등학교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제 성호는 돌아 왔다. 오랜 방황이었다.
설사 성호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성호의 아들이 있는 한 성호는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다.
옥순이 자신의 곁에 없어도 성호가 있으므로 옥순이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이제 성호의 아들이 있으므로 이 사진은 필요가 없다.
옥순이 없어도 성호가 없어도 그는 성호의 아들을 키울 수 있어
행복할 것이다.)
활짝 웃고 있는 옥순의 아니 '제인 정'의 얼굴이 점점 불꽃에
사그러들고 마침내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리자(그 욕망의 허무함!)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석우.
검은 재의 티끌들은 어둠 속의 철로 변에 흩뿌려진다.
석우는 멀리 불빛이 켜진 기관사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측백나무와 공중 전화가 보이고 그의 등 뒤로 길게 뻗은 철길들 과,
산처럼 쌓인 석탄 더미들이 원경으로 멀어진다. (끝.)
-지루하셨지요/ 대본 저도 처음 끝까지 읽었어요.ㅎ
휴머니즘의 대본- 열기가 웅크린 추운 겨울을 녹이겠지요.(德田)
맺음말(인터넷에서)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작품은 이념보다도, 달콤한 연애감정보다도, 바로 따뜻한 인간애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옥순과의 회환으로 남은 사랑, 옥순이 병원에서 죽어간다 하여 잊기 위해 노력하던 석우가 달려가는 것, 술집작부 출신 아진의 현모양처형 아내역할, 살만할 때 걸리는 병과 죽음, 아침에 들려왔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로 집 나간 아들 성호의 아이라는 귀결을 두고 신파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더 드라마적이고, 더 신파적이다. 삶과 인간,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난한 얼개에 합목적성이나 합리성, 논리적 일관성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 삶은 모순과 모순의 변증법적 재현의 장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주된 정서가 인생은 쓸쓸하고 고독하다는 명제와 연결되기에, 이를 작가의 고급정서인 센티멘탈리즘의 표출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따뜻한 휴머니즘은 우리에게 ‘삶이 쓸쓸하고 고독해서 행복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순응하며 사랑과 용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유의 깊이를 지닌 작가의 요절은 우리 문학계에 큰 손실이다. (끝)